오래 기다려온 평화의 시간

‘크리스마스’는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 예수가 태어나신 기쁜 날이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메시아 앞에 경배하러 온 사람들 중에 신분이 높은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 서기관은 있지 않았다. 반면에 목자들과 동방박사는 예수 탄생의 자리에 초대되었다.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기에 천사로부터 소식을 듣고, 하늘의 별을 따라 베들레헴 마구간까지 찾아갔을까? 만왕의 왕 아기 예수가 더럽고 초라한 마구간 구유에 태어나신 이유는 또 무엇일까? 렘브란트가 1600년대 중반에 그린 여러 성화聖畫들을 보다가 이런저런 궁금증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역사상 가장 많이 출판되고, 가장 많이 판매된 책은 성경이다. 지난 50년 동안 전 세계에 출판된 성경은 약 40억 권이었고 (인터넷 검색 엔진 스퀴두 닷컴Squidoo.com 통계 근거 )

이전 시대까지 헤아린다면 훨씬 수량이 많아질 것이다. 성경은 판매량도 대단하지만, 인류의 발전에 미친 영향력은 더 대단하고 독보적이다. 서양 문물의 주춧돌인 성경은 정치, 경제, 과학, 문학, 예술, 건축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발전의 동력이 되었고, 미술 분야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가 되면 종교 유무와 상관없이, 우리는 예수 탄생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자주 볼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샤갈 등 수많은 화가들이 성경 스토리를 그렸는데, 그중에서도 렘브란트의 그림은 여느 작가들의 것과 품격이 달랐다. 렘브란트의 화풍은 바로크 미술의 대표 화가인 루벤스와 정반대이다. 메시아 예수를 생동감 있는 유력한 존재로 그린 루벤스에 비해, 렘브란트는 낮고 천한 사람들의 친구로 그렸다. 당시에 유행하던 르네상스 미술의 우아함과 고상한 품위를 그는 미의 기준으로 삼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게 아름다움이란 ‘진실된 사랑’과 ‘어둠을 밝히는 빛’이 기준이었다. 이제, 렘브란트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그린 그림들을 보면서 크리스마스 맞을 준비를 해보자. 

저 맑고 환한  밤중에 구유에서 태어나

로마 황제의 명에 따라 요셉과 마리아는 고향 베들레헴으로 호적을 하러 왔다가 산고를 느낀다. 마침 여관에 빈 방이 없어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는데, 그 아기는 오래 전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였다. 이때 인근 들판에서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메시아의 탄생 소식을 알려준다. 

<그림1>렘브란트가 1646년에 그린 ‘경배하는 목자들 The Adoration of the Shepherds’은 누가복음 2장 17~20절을 묘사한 작품이다. 현재 영국 런던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림1>렘브란트가 1646년에 그린 ‘경배하는 목자들 The Adoration of the Shepherds’은 누가복음 2장 17~20절을 묘사한 작품이다. 현재 영국 런던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림1> ‘경배하는 목자들’의 시작은 여기서부터다. 천사로부터 기쁜 소식을 듣고 달려온 목자들은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와 대면한다. 무릎을 꿇고 경건한 자세로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는 목자의 뒷모습, 그 옆으로 지팡이를 왼팔에 끼고 아기 예수를 바라보며 천사에게 들은 소식을 전하는 목자가 보인다. 약간 들뜬 그들의 목소리를 화폭엔 그린 건 아니지만, 그림을 보면 그 소리가 느껴진다.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셨다!”는 그들의 외침과, 기쁨을 이기지 못해 마구 고동치는 심장 소리를 말이다. 아기 예수가 발하는 강한 빛은 남루한 차림새의 목자들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다. 깊은 내면의 세계를 표현할 때 렘브란트는 ‘어둠과 빛’을 강하게 대조시키는데, 아기 예수로부터 나온 빛이 인물들의 모든 시선을 한곳으로 모으고 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의 성경 구절처럼, 예수가 온 세상의 어둠을 없애주는 메시아임을 보여주고 있다. 뒤에 선 늙은 목자가 손에 든 등불은 겨우 자기 몸 하나 밝힐 정도에 불과하지만, 아기 예수에서 시작된 빛은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해서 어둠 속에 가려진 사람들의 표정을 밝게 되살려낸다. 그들의 얼굴엔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를 만난 감격과 감사가 가득 담겨 있다. 렘브란트는 아기 예수가 어두운 세상을 밝힐 진정한 빛임을 화폭에 증명해준 것이다.  

예수 탄생에 제일 처음으로 초대 받은 목자들 

그렇다면 메시아 아기 예수를 만나러 달려온 목동들은 어떤 유형의 사람들이었을까? 2천 년 전 이스라엘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당시 목자라는 직업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낮은 계층에 속했다. 사람들이 자기 집에서 편히 누워 잘 때에 그들은 하늘을 지붕 삼고 구름을 이불 삼아 들판에서 자야 했다. 양떼와 함께 지내다보니 양과 사람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몸에는 늘 퀴퀴한 짐승 냄새가 배여 있었다. 목자들은 그런 스스로를 향해 쓸 만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미천한 신분에 힘없는 존재였지만, 메시아는 자기 같은 사람을 사랑하신다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림2>1634년에 작업한 렘브란트의 동판화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는 누가복음 2장에서 8~12절을 표현한 작품이다. 21x26cm의 작은 크기지만, 거대한 서사적 표현이 담겨 있다.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 그 소식에 화들짝 놀란 목자들과 짐승들의 모습이 생생하다.
<그림2>1634년에 작업한 렘브란트의 동판화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는 누가복음 2장에서 8~12절을 표현한 작품이다. 21x26cm의 작은 크기지만, 거대한 서사적 표현이 담겨 있다.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 그 소식에 화들짝 놀란 목자들과 짐승들의 모습이 생생하다.

<그림2>처럼, 어느 깜깜한 밤 하늘에 갑자기 천사가 나타났다. 들판에서 자던 목자들은 깜짝 놀라 두려웠으나 천사가 전해준 메시아 탄생 소식에 주저하지 않고 마을로 달려간다. 마치 땅거미질 무렵 집을 향해 뜀박질하는 아이들처럼. 그들은 메시아가 짐승이 사는 마구간에 태어나신 것을 보고 실망하기는커녕, 자기들 모습처럼 더럽고 누추한 이곳에 오신 것에 감사가 더욱 커졌다. 아기 예수를 만난 그들은 진심으로 경배하고, 기쁜 마음으로 다시 돌아갔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천사는 왜 메시아의 탄생을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알려주었을까? 이사야서 61장의 예언처럼, 가난한 자에게 탄생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였을까?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할 자’를 뜻한다. 그래서 누구든 예수를 마음으로 만나 연결되면 벙어리가 말을 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우주탐사선 보이저1호가 1990년에 촬영한 지구 사진. ‘창백하고 푸른 점 Pale Blue Dot’으로 불리는 아주 작은 점(빨간 동그라미 안의 점)에 우리가 살고 있다. 하늘의 해와 달 그리고 별을 관측하다 보면 세상의 명예와 성공에 아둥바둥하지 않게 된다. 그래선지 예로부터 천문학자들은 광활한 우주의 초월적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해왔다. 별을 따라 메시아를 찾아간 동방박사들도 밤하늘을 보며 예언의 징조가 나타나길 기다렸을 것이다. 사진@나사NASA
우주탐사선 보이저1호가 1990년에 촬영한 지구 사진. ‘창백하고 푸른 점 Pale Blue Dot’으로 불리는 아주 작은 점(빨간 동그라미 안의 점)에 우리가 살고 있다. 하늘의 해와 달 그리고 별을 관측하다 보면 세상의 명예와 성공에 아둥바둥하지 않게 된다. 그래선지 예로부터 천문학자들은 광활한 우주의 초월적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해왔다. 별을 따라 메시아를 찾아간 동방박사들도 밤하늘을 보며 예언의 징조가 나타나길 기다렸을 것이다. 사진@나사NASA

아기 예수께 경배하러 온 최초의 이방인  

한밤중에 목자들이 다녀간 뒤에 멀리서 예물을 들고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별을 따라온 동방박사들이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이 어떻게 알고 메시아를 만나러 왔을까? 헬라어 신약성경에는 동방박사를 마기magi라고 표기하고 있다. ‘마기’는 천체와 별의 움직임을 연구하는 점성술가로서, 지금의 천문학자에 해당한다. 예로부터 천문학은 ‘왕의 학문’이었으며, 왕은 가까이에 천문학자들을 두었다. 그러므로 동방박사도 왕의 품격에 어긋나지 않는 지식과 인품을 갖추었을 것이다. 

별들의 궤도에 숨어 있는 창조주의 신비를 탐구하는 일을 하면서 그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광활한 하늘에 비해 자신이 형편없이 작고 부족하다는 사실을 수없이 느끼고 깨닫지 않았을까? 지금 자신이 있는 자리가 덧없음을 알았을 때, 자신이 추구해온 것들이 한시적인 세상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와 다른 새롭고 영원한 것을 모색하지 않을까? 마치 어항의 더러운 물을 쏟아내고 새 물을 담듯이. 하지만 그런 사실을 깨달았다고 모두가 가던 길을 바꾸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별의 징조를 따라 발걸음을 옮겨 메시아를 만난 동방박사들은 남다른 지혜의 소유자였다. 이들에 대해 영어 성경도 지혜로운 자 ‘Wise Men’으로 기록하고 있다.

메시아를 두려워한 세상의 권력자 헤롯왕 

<그림3>렘브란트의 ‘동방박사의 경배’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632년 작품이다.
<그림3>렘브란트의 ‘동방박사의 경배’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632년 작품이다.

<그림3>은 별의 이상한 징조를 따라 온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만나 경배하는 장면이다. 마태복음 2장 내용을 바탕으로 한 그림에는 상이한 두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 즉, 그림의 왼쪽 위엔 당시 유대 땅을 다스린 헤롯왕이 서 있고, 오른쪽 아래에는 마리아의 품에 아기 예수가 안겨 있다. 바닥에 지푸라기가 깔려 있는 허름한 이곳에 헤롯왕이 찾아올 리 없겠지만, 렘브란트는 메시아의 존재를 내심 두려워한 헤롯왕을 의도적으로 그려 넣었다. 

풍채가 좋은 헤롯왕은 위세를 더하려고 어두운데도 햇빛 가리개를 펼치고 있다. 그는 뒤에 따르는 대신들과 장군들을 제지하려는 듯 양 팔을 벌려 고압적인 자세로 서 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당당한 태도와 다르게 초점을 잃고 있다. 그는 베들레헴의 두 살 이하 남자아이들을 모조리 죽일 만큼 메시아 아기 예수를 두려워했다. 그의 뒤에 선 사람들을 보면 여러 갈래로 시선이 흩어지고 있으며 마음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느낄 수 있다. 자신의 이익을 따라 조변석개하는 그들은 지금 헤롯왕 그늘에서 살고 있지만, 내일의 충성을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렘브란트는 어두운 암흑 속에 헤롯왕과 추종자들을 두고 있다.

평강의 왕으로 세상에 태어난 아기 예수 

그림에서 헤롯왕이 차지한 면적이 가장 넓지만,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강한 빛을 따라서 작고 여린 아기 예수에게로 모아진다. 메시아를 만난 동방의 늙은 박사는 천천히 모자를 벗어 바닥에 놓고 조용히 무릎을 꿇는다. 머리를 조아리는 그의 이마는 반쯤 벗겨졌고 수염과 머리카락은 허옇다. 황혼의 나이가 될 때까지 그가 메시아를 기다린 인고의 세월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노인은 마리아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 예수께 두 손을 모아 존경의 예를 표한다. 어쩌면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가 나이가 많아 죽음과 가까워지고 있는데, 메시아를 만나 뵙고 예물을 드릴 수 있다니…. 오! 하나님 이런 은혜를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며 낮게 읊조리지 않았을까.

고대에 왕이나 신에게 예물을 드렸던 것처럼, 동방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아기 예수께 세 가지 예물을 드렸다. ‘황금’은 만왕의 왕이신 메시아의 왕권을, ‘유향’은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대제사장의 직분을 상징한다. 그리고 ‘몰약’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유향과 몰약은 고난 받을 메시아를 위해 미리 준비된 예물이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아기 예수의 탄생은 인간의 죄를 지고 고통을 당하는 죽음을 담보로 한다. 죄 지은 인간의 입장에선 기쁜 소식이지만, 예수의 운명 자체는 고난의 길이었다. 우리 인간의 슬픔을 지고 질고를 지고 고통을 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기대한 메시아의 모습

이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인간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세상에 온 메시아를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왜 푸대접을 했을지 한 번 생각해보자. 

사람은 하루에도 수만 가지 생각을 한다. 그 생각의 부스러기 속에서 고정관념이 하나둘 만들어진다. 어린아이에게 ‘위대한 왕’ 흉내를 내보라고 하면, 십중팔구 턱을 약간 치켜들면서 어깨를 세우고 눈에 힘을 주는 표정부터 짓는다. 동화책이나 애니메이션에서 본 위대한 왕들의 외형적 특징이 관념에 입력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왕도 이런 모습일진대,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는 훨씬 더 위대한 이미지여야 한다고 사람들은 기대한다. 특히 성공지향적인 사람일수록 ‘위대함 = 좋은 모양새’라는 공식을 대입해, 메시아도 ‘좋은 외형’으로 규정해놓는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품격 있는 모습과 권세 있는 말투를 가진 메시아의 모습을 흠모했고,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줄 초월적 능력자를 기다렸다. 

동방박사들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별을 따라가다가 예루살렘에 이르자, “유대인의 왕으로 난 분이 어디에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면서 소리쳐 물었다. 만왕의 왕 메시아는 왕궁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탄생할 것으로 짐작했던 모양이다. 헤롯왕에게 불려간 그들은 예언서에 기록된 메시아의 탄생지가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알고 서둘러 길을 떠난다.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의 거리는 약 8킬로미터. 그 길을 가며 동방박사들은 이렇게 행동한 근본 이유를 돌이켜 보았을지 모른다. “우리가 너무나 어리석었지? 왕이니까 당연히 왕궁이라고 생각했어.” “밤하늘의 별만 보고 오다가 갑자기 휘황한 예루살렘을 보니까 여기다 싶었지.” “맞아, 별이 멈춰선 것도 아닌데 우리 맘대로 행로를 멈춘 거야.” 그들은 이런 대화를 나누며 베들레헴에 도착해 별이 가리키는 집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드디어 메시아를 만났다. 

위대하다는 것은 겉모양이 위대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영구불변한 진리를 찾겠다면서, 자기가 원하는 모습을 진리로 아는 역설逆說의 삶을 살고 있진 않은지 되새겨볼 일이다.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는 메시아 

성경은 메시아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집이 아닌 마구간에서 태어난다고 했다. 예수의 모습은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 라고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어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왜곡시키거나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성향이 있다. 예들 들어, 예수를 나타내는 여러 묘사 중에 ‘어깨에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등의 구절을 내세우며 ‘힘 있는 지배자’의 모습을 부각시키려고 한다. 그런데 그 구절은 외형과 외모를 일컫는 게 아니라, 메시아가 지닌 내면의 본성과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메시아 탄생 당시에, 아기 예수가 누군지 알아본 사람들은 목자들과 동방박사들 외에 경건한 사람 시므온과 여자 선지자 안나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메시아를 자기 방식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천사의 소식을 듣고, 별의 움직임을 따라, 또 성령의 지시를 받고,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였다. 예수의 모습이 마른 땅을 힘겹게 뚫고 나온 줄기 같다고 했으니, 곧지 못하고 얼마나 구불구불 비뚤어져 있겠는가. 하지만 이들은 자기가 보는 것에 기준을 두지 않았다. 모든 진리는 겉모양에 있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메시아를 인간의 눈에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세상에 보내셨고, 그를 기쁘게 맞이할 사람은 낮고 가난한 마음의 소유자라고 정해두셨다. 그래서 메시아는 약하고 악한 사람들의 친구이며, 누구나 그 사실을 마음에 받아들이면 메시아와 연결되는 ‘공개된 비밀’의 세계가 보인다. 하지만 자기의 관념을 믿는 사람들은 아직도 슈퍼맨 같은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린다. 이제 곧 모두가 기다리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시작된다. 세상 모든 이의 기쁜 날인 것은 맞다. 그러나, 좀 더 엄밀히 말하면 마음이 약하고 악한 사람들이 기뻐할 날이다. 

그림은 언어를 몰라도 이해할 수 있는 예술 장르이다. 렘브란트는 성경에 담긴 창조주의 마음과 섭리를 그림으로 그려, 네덜란드 말을 모르는 사람들도 메시아가 베푼 구속의 사랑과 은혜를 발견할 수 있도록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발견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

네덜란드 미술사에 황금시대를 불러온 최고의 화가로 신구약 성경의 주요 장면들을 많이 그렸다. 렘브란트의 작품에 감동한 반 고흐(1853~1890)는 ‘그의 그림 앞에서 보름 동안 마른 빵만 먹으며 앉아 있을 수 있다면 내 삶의 10년도 기꺼이 바치겠다.’는 글을 남겼다. 렘브란트가 작품 활동을 할 당시에 네덜란드는 상공업과 무역의 발달로 경제적 부를 크게 축척해가는 과정이었고, 그로 인해 그림 주문이 많아지면서 렘브란트도 명성과 부를 얻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작품에 표현된 빛과 어둠의 대비처럼 행복과 불행이 교차했다. 

아내와 자식의 죽음, 불행한 재혼, 경제적 파산 등 시련은 끝없이 찾아왔고, 이런 문제들로 인해 그는 영적인 빛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수십 년 창작활동을 해오면서 화풍이 변하고 주제도 달라졌지만, 렘브란트가 한결같이 지켜온 원칙이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이후 불순종으로 인간이 타락했고, 죄에 빠진 인간을 메시아가 구속하셨다는 것을 표현의 중심에 두는 것이다. 그래선지 그의 그림은 실패와 고통이라는 어둠 가운데에도 환히 비치는 희망의 빛 때문에 지금도 보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감사를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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