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도에 스리랑카로 해외 봉사를 다녀온 최원태 씨는 최근 그 시절이 떠올랐다. 스리랑카의 자프나Jaffna 지역을 5일 동안 무전여행하면서 얻은 소중한 추억이 자꾸 생각난 것이다. 언어도 잘 통하지 않는 곳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누구를 만날지 전혀 종잡을 수 없었지만, 현지인들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을 느끼며 무전여행을 무사히 마쳤다. 그 경험을 살려 이번엔 생애 두 번째 무전여행을 떠났다. 최소한의 짐을 담은 배낭과 기타 하나를 어깨에 메고 말이다. 그의 기행이 궁금해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무전여행을 떠나게 된 이유

군 생활을 하면서 여러 책을 읽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을 묻는다면 스물아홉, 인생의 느낌표를 찾아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이 담긴 김강은 씨의 <아홉수, 까미노>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젊었을 때 할 수 있는 도전이 무엇일까?’ 하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많이 던졌다. 그녀처럼 배낭 하나를 메고 떠나보는 상상을 자주 했다. 그러다 3년 전 스리랑카에서 떠났던 무전여행이 떠올랐다. 설렘보단 두려움을 안고 떠난 그 여행은 내 인생에 다시는 맛볼 수 없는 따뜻함을 남겼다. 그때의 감정을 되살려 한국에서의 무전여행을 계획했다. 하지만 지인들 모두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그렇게 할 수 없다.”라고. 처음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지만, 계속된 우려에 나도 겁이 덜컥 났다. 떠나기도 전에 걱정만 잔뜩 늘었는데, 나의 무전여행 계획을 들은 또 다른 친구가 “나도 하고 싶다.”고 반응했다. 그렇게 우리 둘의 여행이 시작됐다. 이 여행, 무사할 수 있을까?

고성에서부터 제주도까지

우리의 계획은 이러했다. ‘대한민국의 최북단에 위치한 행정도시인 고성을 시작으로 최남단에 위치한 제주도까지 가보는 것.’ 단 하나의 목표만 있었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이동하고, 먹고, 자는 것이었는데, 사실 걱정이 앞섰다. 혹시 밖에서 잠을 자야 할 상황을 만날까 봐 텐트를 챙겨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빌린 텐트가 너무 커서 가져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리곤 ‘어떻게 될지 모른다’라는 걱정에 쌓여만 가던 짐들을 조금씩 덜어냈다. 최소한의 짐만 챙기고, 모든 걸 하늘의 뜻에 맡겨보기로 했다. 각자 하나의 배낭과 기타를 챙겨 동서울 터미널에서 만났다. 그렇게 우리는 버스를 타고 고성에 도착했다.

나와 친구가 고성에 내리자마자 한 일은 버스킹 연습이었다. 맹연습을 마친 뒤 우리는 길목에 서서 엄지를 치켜들었다. 속초로 갈 차를 타기 위해서였다. 얼굴엔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속은 얼어붙었다. 누가 우리를 보고 차를 세워줄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어떤 차가 멈추어 섰다. 나와 친구는 환호성을 질렀고, 그분께 큰 소리로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무전여행 중인 대학생들입니다. 속초까지 가려고 하는데, 가시는 곳까지 얻어 탈 수 있을까요?”

“마침 속초에 가는 길이예요. 타세요.” 처음 *히치하이킹에 성공하니, 자신감이 생겼다. 그 후로도 우리는 안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손가락을 치켜들었고, 많은 분의 도움을 받으며 이동했다. 차 안에서는 처음 뵌 운전자분과 속 깊은 대화도 나누고, 젊음을 응원해주시는 덕담도 들었다. 그분들은 우리를 철없이 바라보지 않으셨다. “지금 청년들처럼 이런 도전은 가슴이 떨릴 때 해야 해요. 다리가 떨릴 때가 되면 못해.”, “무전여행 같은 도전은 지금 아니면 못해요. 돈은 나중에도 벌 수 있어요. 지금처럼 젊었을 때만 할 수 있는 일을 하세요.” 이런 용기 나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따뜻한 응원 덕분에, 우리 마음이 참 포근했다.

무전여행을 하는 동안 먹었던 음식들. 맛있고 정성이 가득 들어간 음식들로 풍요로웠다.
무전여행을 하는 동안 먹었던 음식들. 맛있고 정성이 가득 들어간 음식들로 풍요로웠다.

밥은 어떻게 먹어야할까?

속초에 도착해서, 우리는 속초시장에서 버스킹을 열었다. 많은 분들이 우리의 노래를 들으며 천 원, 오천 원 지폐를 앞에 둔 기타 가방에 넣어주셨다. 그렇게 번 돈으로 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제주도로 갈 뱃삯 먼저 남겨둬야 했다. 배는 히치하이킹이 안되니 말이다. 돈을 좀 아끼자니, 꼬르륵거리는 배가 야속했다. 친구와 상의한 끝에 밥을 사 먹지 말고 부탁해보기로 했다. 우리는 시장 안의 국밥집에 들어가 사장님께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말씀을 드렸다. “청소나 허드렛일, 공연이든 뭐든지 시키시는 건 무엇이든 할 테니 찬밥 한 끼 얻어먹을 수 있을까요?” 우리의 부탁에 사장님께선 호탕하게 웃으시며, “하하하, 뭔 찬밥이에요. 앉아요, 밥 차려줄 테니까. 국밥 괜찮죠?”라며 우리에게 따뜻한 국밥 한 끼를 건네주셨다. 허기진 배에 너무나 풍족한 양이었다. 우리는 감사의 뜻으로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들과 손님들에게 노래 한 곡을 불렀다. 그곳에 계신 모든 분들이 너무 즐거워하시며, 우리의 여행을 응원해주셨다. 몇 번이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네고 우리는 식당을 나왔다.

이후로도 우리는 방문한 도시의 식당을 찾아가 청소나 허드렛일을 해드리거나 공연하며 끼니를 해결했다. 우리의 요구가 당황스러울 수 있었을 텐데, 많은 식당 주인분들께서는 넉넉한 마음으로 우리를 품어주셨다. 그리고 식당을 나설 땐, 모두가 웃으시면서 다음에 또 오라고 해주셨다. 물론 끼니를 거를 때도 있었고 거절당할 때도 있었지만, 결국 그것마저도 행복한 추억으로 남았다.

단양에 패러글라이딩이 유명하다고 해서 무작정 찾아갔다. 한 사장님께서 무전여행 이야기를 들으시곤 자신의 젊은 날을 추억하시며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나와 친구 모두 패러글라이딩이 처음이라 무척 설레고 행복했던 날이었다.
단양에 패러글라이딩이 유명하다고 해서 무작정 찾아갔다. 한 사장님께서 무전여행 이야기를 들으시곤 자신의 젊은 날을 추억하시며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나와 친구 모두 패러글라이딩이 처음이라 무척 설레고 행복했던 날이었다.

언제나 사람이 남는다

가장 어려웠던 건 잘 곳을 찾는 일이었다. 종일 돌아다니다 보니, 몸은 서서히 녹초가 됐고, 어디라도 등을 대고 눕고 싶었다. 시골이다 보니 밤은 생각보다 더 빠르게 찾아왔다. 길에는 걸어다니는 사람을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어쩌다 사람을 만나서 부탁을 드리면, 다들 너무나 미안해하면서 거절하셨다. 처음 보는 낯선 두 남자를 집으로 데려간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거절하는 게 마땅한데도 너무나 미안해하시는 모습을 보며,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전해졌다. 그런데도 우리는 길에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처음 강릉에선 모텔 사장님이 방 열쇠를 주셔서 그곳에서 잠을 청할 수 있었고, 그다음부터는 주민회관, 이장님 댁, 해인사에 위치한 ‘청년객실’ 등 제공해주시는 곳에 누워 안전하게 취침할 수 있었다. 매일 색다른 곳에서 맞이하는 아침이 경이로웠고, 감사했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선 새로운 경험도 정말 많이 할 수 있었다. 히치하이킹을 통해 만난 분들은 자기들이 가평으로 놀러 가는 중인데 같이 가자고 했다. ‘처음 본 사람과 여행이라니…,’ 정말 가도 되는 건지 의아하기도 하고, 듣고도 믿을 수 없었지만 따라가 보았다. 가평에 위치한 펜션에 도착해서야 여행에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같이 고기도 구워 먹고 수영장에서 수영하면서,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무작정 떠나온 여행을 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예상치 못한 일을 겪으며 ‘여행의 묘미’가 진하게 남았다. 이외에도 우린 양떼목장을 관람하고, 패러글라이딩도 탔다. 거기에 만나는 분들이 주신 선물들까지…. 최소한의 짐만 가지고 떠난 우리의 배낭엔, 어느새 여기저기서 받은 선물과 음식이 쌓여갔다.

1. 무전여행을 하면서 바위가 나오면 앉아서 쉬고, 그늘이 나오면 잠시 몸을 식혔다. 2. 강릉을 지나칠 때,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양떼목장을 관람할 수 있었다. 3. 합천 해인사에 있는 청년객실에 묵고, 제공해주신 밥을 먹고 지냈다. 스님과 기념사진을 남겼다. 4. 히치하이킹을 하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여행을 응원해주고 격려해주신 분들 덕분에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1. 무전여행을 하면서 바위가 나오면 앉아서 쉬고, 그늘이 나오면 잠시 몸을 식혔다. 2. 강릉을 지나칠 때,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양떼목장을 관람할 수 있었다. 3. 합천 해인사에 있는 청년객실에 묵고, 제공해주신 밥을 먹고 지냈다. 스님과 기념사진을 남겼다. 4. 히치하이킹을 하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여행을 응원해주고 격려해주신 분들 덕분에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마지막 목적지 제주도로

우리는 배를 타려고 삼천포로 향했다. 제주도로 향하는 배를 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제주도 행 배가 이미 만석이라, 우린 다시 제주도로 가는 배가 있는 여수로 향했다. 여수에 도착해서, 지금까지 모으고 모아온 돈을 처음으로 꺼내 표를 끊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음 날 아침 제주도에 도착했다. 제주도에 오자, 비로소 이번 여행의 목적지에  왔다는 사실에 온몸의 긴장이 풀렸다.

우린 지금까지 모아온 돈을 꺼내 조그마한 선물을 구입했다. 우리의 여행을 응원해주고 도와주신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해주고 싶어서였다. 사실 모든 분의 연락처를 가지고 있던 게 아니어서 아쉬웠지만, 연락처를 받았던 분들에게는 안부 인사와 함께 선물을 부쳤다. 선물을 받은 그분들은 전화를 걸어와서, 우리를 기억해줘서 고맙다는 말씀을 남겼다. 우린 그렇게 무전여행을 마무리 지었다.

우리의 여행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시작하여 사람들의 도움으로 끝났다. 지금도 여행 사진을 간간이 꺼내어 SNS에 올리곤 하는데, 그 사진을 본 친구들이 내게 “대단하다.”라고 한다. 난 그럴 때마다 “도와주신 분들이 더 대단하지.”라고 답한다. 무전여행이 가능했던 건 도전한 우리가 대단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여행을 응원하고 도와주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다행히 그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여행 중 우리를 도와주셨던 몇몇 분들과 나눈 대화 속에 ‘삶의 굴곡을 겪은 사람들이기에, 누군가가 어려울 때 손을 내밀어줄 수 있구나.’라고 느꼈다.

제주도에 도착한 뒤, 도움을 주신 분들께 전해드릴 선물을 샀다. 모든 분들께 전달해 드리진 못했지만, 감사한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다.
제주도에 도착한 뒤, 도움을 주신 분들께 전해드릴 선물을 샀다. 모든 분들께 전달해 드리진 못했지만, 감사한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다.

여행은 끝났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 또한 삶의 여유가 없고 힘들 때, 누군가가 도움의 손길을 바란다면 나도 이 사람들처럼 손을 내밀어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그리곤 ‘나의 형편과 상관없이 마음이 넉넉한, 작지만 도움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목적지를 잡아본다. 이 목적지로 향하는 여행이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오늘도 그 곳을 향해 한 발자국 내디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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