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Essay_'지리학자의 인문 여행'

학창 시절, 지리는 나에게 만만하지 않은 과목이었다. 강원도에 무엇이 많이 나고, 어느 대륙의 지리적 특징은 무엇인지 등을 배웠던 것 같은데, 처음에 약간 재미있다가도 조금 딱딱한 부분이 나오면 금방 흥미를 잃었다.

다행히 어른이 된 후에는,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면서 지리에 관심이 생겼고 가끔은 세계 지리에 관한 책도 읽었다. 얼마 전, 나는 한 권의 책을 통해 좋은 지리 선생님을 만났다. <지리학자의 인문 여행>의 저자 이영민 교수이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여행과 지리’라는 강의를 하셨는데,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모양이다.

학창 시절과 달리 ‘지리’에 대한 관심이 커져 있었고, ‘여행’은 두말할 것도 없이 좋아하는 나는 제목만 보고 바로 책을 주문했다. <지리학자의 인문 여행>은 말 그대로 지리학자의 여행에 대한 생각을 말하는 책이다. 지리에 대한 지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여행 속에 잘 녹여 놓아서 지리에 박식하지 않아도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은 내가 여행하며 생각해보지 못한 것들을 알려주어 내가 갖고 있던 여행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나’ 중심에서 벗어난 여행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문장이 있었다.

많은 여행자는 ‘나’를 중심에 놓고

어떻게 여행하고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이 말하는 여행에는 ‘나’ 자신만 있다.

여행을 하면서 ‘나’를 중심에 둔다는 것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여행은 모두 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하지 않는가. 특별히 봉사 활동이나 행사에 참석하는 게 아니라면 내 돈으로 내 시간을 내서 가는 여행이기에 내가 편해야 하고, 내 보기에 좋아야 하고, 내 마음에 쏙 들어야 했다. 저자는 이런 것은 여행이 아니라 관광이라고 말한다. 여행이란 다양한 환경을 이해함으로써 자기를 바로 알고, 새로운 ‘나’를 만들어가는 작업이라고 덧붙인다. 맞다. 지금까지 내가 캐리어나 배낭을 메고 이리저리 다녔던 것은 관광이었다. 현지를 이해하려 하기보다, 나 위주로 내가 필요한 것들을 채우는 데 급급했으니 말이다. 짧은 몇 줄의 문장이 여행에 대한 내 생각을 뒤집어 놓았다.

저자는 우리 머리와 마음속에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제각각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심상지도 mental map’가 있다고 한다. ‘심상지도’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을 하거나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될 때 수정된다. 이것은 개인이 장소와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 된다. 책 내용 중에 ‘모든 장소에 우리가 모르는 많은 것이 숨겨져 있으므로, 어디를 가든 이동하면서 늘 호기심의 안테나를 세워야 한다’는 저자의 말은 우리의 여행을 살아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나는 지방에 자주 간다. 도착지에서 봐야 할 업무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긴장이 되지만, 매일 지내던 장소에서 잠시 떠나는 느낌은 늘 좋다. 그러나 고속열차를 이용하는 여행은 그리 달갑지 않다. 어릴 적에 탔던 느릿한 기차와 달리, 고속열차를 타면 창밖으로 감상할 것이 없다는 생각에 빨리 도착하기만 기다렸다. 어떤 때에는 창밖을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창밖의 풍경은 조금씩 달라지긴 해도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아름답고 정겹다.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지나가지만, 만약 내가 마음의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더라면 제대로 된 여행의 맛을 누렸을 것이다.

사실, 창밖의 풍경은 없어도 좋은 것이었다. 저자의 말대로 여행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여행에서 창밖의 풍경은 배경음악이 될 순 있지만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곧 지방 출장을 가기 위해 예매한 비행기표와 기차표가 미워 보이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나의 ‘심상지도’이다.

여행자에게 언어란?

나는 일본어를 조금 할 줄 알아서, 일본에 갈 때는 비교적 마음이 편하다. 종종 교과서에서 벗어난 표현을 들으면 당황스럽지만, 내가 애써서 상대방을 교과서적인 표현 안으로 끌고 오면 되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또 일본인들은 모르는 사람에게 무엇인가 알려줄 때 무척 친절하다.

2017년에 큰아들과 함께 1주일간 독일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우리는 독일로 떠나기 전에 인터넷으로 기차표와 버스표를 예매했다. 여행하는 동안 버스를 딱 한 번 탔는데, 프랑크푸르트에서 로맨틱 가도를 달려 퓌센(디즈니랜드 성이라 불리는 노이슈반스타인 성이 있는 곳)까지 여덟 시간 걸리는 코스였다. 문제는 하루에 한 대밖에 없는 그 버스를 타는 위치가 예고도 없이, 수시로 바뀐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버스 회사가 변경된 위치를 어딘가에 표시해 두는 것도 아니었다. 인터넷 블로그나 카페를 검색해보니, 정류장을 찾지 못해 버스를 놓치거나, 그럴 뻔했다는 글이 많았다.

어떤 블로그에는 “정류장을 찾지 못해서 경찰서 같은 곳에 들어가서 ‘버스 스톱’이 어딘지 물어봤는데 한 건장한 청년이 눈을 크게 뜨며 화난 목소리로 ‘노!’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설마 했다. ‘그런 사람이 있어도 내가 그 사람을 만날 일은 없겠지.’라고 생각했다. 며칠 뒤 우리가 버스를 타기로 한 날이 되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원래 있어야 할 곳에 정류장이 없었다. 예고 없이 바뀐 것이다. 주변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봤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아들 손을 꼭 잡고 근처에 경찰서처럼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익스큐즈 미”하고 물어보려고 하자, 블로그에 등장한 사람처럼 보이는 한 사람(분명히 그 사람이다.)이 ‘노’도 아니고 ‘놉!’이라고 쏘아붙여 우리는 깜짝 놀라 나와 버렸다. 다행히 정류장을 찾아 버스를 탈 수 있었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독일어를 구사했으면 이런 무안을 피할 수 있었을까? 아니, 영어라도 좀 제대로 발음을 했다면 괜찮았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행을 다녀오면 항상 “그래, 이제 제대로 영어 공부해야지!”라는 결심을 한다. 그러고는 안 한다. 저자는 이토록 게으른 나에게 아래와 같은, 다소 위안이 되는 이야기를 했다.

오히려 각자의 언어로 조잘거릴 때

신기하게 소통이 잘 됐다.

언어를 잘 구사해서 하는 여행이 불편한 것은 줄여주겠지만, 저자는 그러지 말라고 한다. 때론 통하지 않는 언어가, 서로의 눈빛과 손짓이 서로의 마음을 열게 하기에. 이걸 미리 알았다면, 그때 나는 “저기요, 어이, 저기요.”라고 한국말로 물어보았을 것이고, 그 청년은 내가 한국말을 하는 것이 신기해서 좀 더 다정하게 대했을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언어가 안 된다고 해서 여행을 가서까지 입을 닫을 필요는 없겠다.

저자는 여행을 세 번 할 수 있다고 한다. 가기 전에 한 번, 가서 한 번, 다녀와서 한 번. 그중 세 번째 여행을 ‘정리를 위한 여행’이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이 첫 번째, 두 번째 여행보다 더 중요하다고 한다. 세 번의 여행을 마친 이들에게 저자가 마지막으로 질문한다.

여행을 다녀온 후 지도가 어떻게 달라 보이는가?

글쓴이 박문택

부산 해운대 바다를 놀이터 삼아 자랐다. 학창 시절에는 공부에 별 흥미를 느끼지 않았는데, 우연히 책을 읽으면서 독서의 기쁨을 터득한 그는 책을 통해 공부도, 미래의 꿈도 하나씩 이루어갈 수 있었다. 사법시험 합격 후 사법연수원을 수료했고, 법률사무소 담소 대표변호사이다. 한편 청소년 지도자로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사단법인 국제청소년연합 회장으로 있다. 블로그에 글쓰기가 취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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