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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막다른 길이라고 행복까지 끝난 건 아니에요방문요양사 에모토 치히로
최지나 기자 | 승인 2022.05.12 15:11

일본에서 ‘쿠라시아くらしあ (당신의 삶에 행복을) 방문요양센터’ 를 운영하는 에모토 치히로 씨를 만났다. 아직 서른이 채 되지 않은 그는 차가운 고독 속에서 생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노인들에게 ‘하루 한 번이라도 웃을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어 이 직업을 선택했다고 한다. 오늘 열렬히 기뻐할 수 있도록, 삶의 행복을 기억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곤 자신을 웃음 짓게 하는 노인들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미래를 그리지 않던 이들이 내일을 약속할 때의 눈빛, 살고자 하는 의지를 내비치는 순간 등은 고단한 하루를 기쁨으로 바꾸었다. 에모토 치히로 씨의 하루를 들여다보며, 이 직업을 선택하기까지 걸어온 길을 따라가 보았다. 

Q. 많은 분들을 만나고 오셨을텐데, 오늘은 어떤 하루였나요?

에모토 치히로 일본에서 영화제작을 전공했지만, 예상치 못한 일을 맞아 인도로 해외봉사를 떠난다. 그곳에서 새롭게 배운 것들로 방문요양사의 길을 걷고 있다.

여러 분을 찾아뵙고 왔는데요. ‘누군가의 내일을 함께 고민한 하루였다’로 요약할 수 있겠네요. 오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증후군’을 앓는 분의 집을 다녀왔어요. 이 증후군의 증상은 갑자기 주변 물건들이 작아지거나 커진대요. 이 병을 앓는 분들은 언제 어떻게 주변이 달라질지 예상할 수 없어서, 밖을 나서는 것조차 쉽지 않아요. 밖에 있는 동안 갑자기 건물들이 커지거나 작아지면 안정을 찾기 어려우니까요. 그래서 온종일 집에만 계시는데, 이 시간이 길어지면 패닉 상태가 돼요. 이분 역시 최근에 힘든 일을 겪으셔서, 앞으로 어떻게 지내면 좋을지 같이 고민하고 왔어요. 한 번씩 ‘이런 걸 같이 해보자’라고 제안하면, 열심히 해보시곤 기분이 어땠는지 이야기해주시거든요. ‘덕분에 활기차게 하루를 보냈다.’라고 이야기해주실 땐 참 뿌듯하고 기뻐요.

Q. 지금까지 만난 분들 중에서 기억에 남는 분이 있을까요?

지금은 입원해 계시는 분인데, 이분이 젊었을 때 야쿠자였어요. 오랫동안 야쿠자 생활을 하다 보니 지금 곁을 지키는 가족이나 친구가 아무도 안 계세요. 그런데도 여전히 자존심 하나로 살아오신 분이라, 제게 항상 삶에 대한 미련이 없다고 이야기해요. 한번은 이분께 제가 살아온 이야기를 털어놓은 적이 있어요. 어릴 적 이야기, 꿈, 해외 봉사를 다녀온 일화, 내가 왜 이 일을 시작하게 됐는지도요. 그랬더니 저한테만큼은 자존심도 내려놓으시고, 경계심도 푸셨어요. 진심은 마음의 빗장을 열게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많이 힘들었겠다, 왜 고생길을 선택했느냐, 밝게 지내는 거 보면 신기하고 기특하다.”라고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더 기쁜 건 지금까지 살아온 제 삶을 보시곤, ‘너는 나를 진심으로 대해주는구나, 단순히 직업 때문이 아니라 헌신해주는구나’라고 생각하시고, 저를 믿어주세요. 언제 한번은 제게 “내가 앞으로 10년은 더 살고 싶다.”라는 말씀을 하시길래 이유를 여쭤보니까, 제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사는 걸 보고 돌아가고 싶으시대요. 그 말을 듣는데 너무 기뻤어요. 좀 더 살고 싶은 이유가 된 거니까요.

Q. 사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 고단하잖아요. 그런데도 치히로 씨는 행복이 더 많이 배어 있네요. 쉽게 가질 수 없는 마음일 텐데요.

저 역시 삶의 이유 없이, 단순히 살아있기 때문에 살았던 적이 있어서 그런가 봐요. 12년 전에 아버지와 남동생이 갑자기 죽었어요. 그 일로 엄마, 저 그리고 여동생은 오랫동안 방황했고요. 그때의 기분은 뭐랄까, ‘불 꺼진 방 안에 갇힌’ 느낌이었어요. 누군가를 탓하고 원망해야만 겨우 방 안에서 한 발짝 나올 수 있는 핑계가 생겼던 거 같아요. 엄마는 엄마대로, 저는 저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슬픔에 잠긴 채 시간을 보냈고, 서로를 탓하며 상처를 주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리석지만, 그땐 그랬어요. 그랬던 제가 지금은 누군가가 한 번이라도 웃으면 좋겠고, 행복하면 좋겠고, 단 하루라도 더 살길 바란다는 게, 저도 신기해요.
 

그는 노인분들의 집에 찾아가 건강 체크를 하며 하루 일정을 시작한다.

Q. 현재의 마음이 되기까지 어떻게 지내셨는지 이야기해줄 수 있나요?

고등학교에 진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을 잃는 그 일이 있었어요. 장례식을 마치고 학교에 갔는데, 수업 시간에 동생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제 동생이 똑똑했거든요. 공부를 잘해서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애였어요. 그런데 동생이 아닌 제가 교실에 앉아있다는 게…,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걸까?’, ‘내가 살아서 공부해도 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가만히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웠어요. 그렇게 학교를 빠졌어요. 엄마한테는 학교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온종일 지하철에 앉아 있거나 아르바이트하며 지냈어요. 계속 부지런히 움직이고, 시끄러운 곳을 찾아다녔어요. 조용하면 어김없이 생각이 났거든요. 나중엔 제가 졸업을 못 하니까 엄마도 제가 학교를 계속 결석한 사실을 아셨고, 졸업까지 4년 반이란 시간이 걸렸어요.

Q. 딸의 방황에 엄마도 마음이 아프셨겠네요.

사실 엄마도 살아갈 이유를 잃어버리신 것 같았어요. 직장을 그만두신 엄마는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하셨어요. 매일같이 술을 드시며 슬픔을 잊어보려고도 하셨고, 조용한 집에 혼자 있는 게 너무 힘드셔서 시끄럽고 정신없는 곳을 찾아가셨어요. 그래서 한동안은 파친코 도박에 빠져서 빚도 많아졌고요…. 엄마는 안 그래도 힘든데, 저까지 방황하니까 많이 괴로워하셨죠. 이렇게 서로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털어놓지 못했어요. 각자 힘든 걸 어떻게든 해결해보려고 했는데, 해결은커녕 어려움만 눈덩이처럼 불어났죠.

Q. 어머니의 방황도 치히로 씨에겐 꽤 충격이 컸겠는데요.

그렇죠…. 제가 알던 엄마가 아니었으니까요. 남편과 자식의 죽음은 사람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꿔버렸어요. 엄마는 제게, 저는 엄마에게 상처를 입히고, 동생은 가시가 돋친 사람처럼 거칠어졌어요. 그러던 중 엄마를 향한 원망이 하늘을 찌른 사건이 발생했죠. 대학 등록금으로 내려고 학자금을 대출받았는데, 엄마가 그 돈으로 먼저 빚부터 갚으신 거예요. 돈이 없어서 학교를 못 가는 상황이 오니까, ‘엄마가 내 인생을 망치려 한다’는 생각에 얼마나 엄마를 미워했는지 몰라요.

결국 대학을 중간에 포기했어야 했는데, 돈이 없어서라는 이유가 너무 부끄러웠어요. 그만두는 데에 그럴싸한 명분이 필요했어요. 그 당시 동생이 멕시코로 해외 봉사를 다녀왔었는데, 저 역시 ‘어디든 일본보다 낫지 않겠나?’ 하는 심정으로 해외 봉사를 결정했어요. 친구들한테나 교수님께는 해외로 봉사활동을 간다는 멋진 핑계를 대고 학업을 포기했죠.

학교를 그만두고 인도로 떠나기 전까지 그는 엄마와 매일같이 전쟁을 치렀다. 싸움이 끝나면 ‘내가 취직은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앞으로 무얼 하며 살아야 하지?’ 하는 걱정에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떠나서일까? 그는 인도에서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누군가를 탓하지 않아도 되고, 행복하면 웃고, 혹은 행복한 척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Q. 편안함을 느끼셨다니 다행이네요. 인도에선 어떠셨나요?

저는 인도 ‘아쌈’이라는 지역에서, 제 인생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요. 아쌈 지역을 관리하는 지부장님은 어떤 일을 하시든지 “절대 포기하지마 Never give up”를 모토로 삼으시는 분이었는데요. 처음엔 그 모습이 무모해 보였는데, 포기하지 않으니까 결국 일이 성사되더라고요. 한번은 인도 학생들을 위해 큰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주지사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어요. 하지만 주지사를 만나는 게 쉽지 않잖아요? 몇 번을 찾아갔지만 만날 수 없었어요. 그런데 행사 하루 전날, 새벽 2시에 연락이 닿아 행사를 크게 할 수 있도록 허가받았어요. 덕분에  6천 명이 넘는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죠. 해외 봉사를 하면서 안될 것 같던 일들이 되는 걸 수없이 목격했어요. 

저는 ‘돈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지’라는 이유로 포기하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을까 봐 두렵다는 이유로 도망치면서 살았어요. 환경을 탓하면서 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고, 포기하는 게 맞다고 여겼거든요. 그런데 저와 정반대로 사시는 지부장님을 보면서 삶을 사는 새로운 방법을 배웠어요. 도망치듯 떠났던 인도에서, 도망치지 않는 법을 배우고, 삶의 행복도 느꼈죠.

Q. 도망침의 이유였던 엄마와의 관계는 개선되었나요?

인도에서 웃고 행복해도 엄마와의 관계는 늘 제게 풀리지 않는 숙제였어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엄마와 마주쳐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제 이야기를 지부장님께 털어놓았는데요. 제 이야기를 들으시곤 “너도 참 힘들었겠구나…. 그런데 엄마의 마음은 생각해봤니?”라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이 세상에 자식이 불행하길 바라는 부모는 없어. 자식이 행복해지길 바라는 게 부모란다. 어머니도 너희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으셨을 거야. 하지만 모든 일이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잖아, 네가 인도에 와서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처럼. 너희 어머니도 생각처럼 안 된 거야. 한국에서 건너와 부족한 일본어로 너희를 키우신 어머니가 대단하지 않니? 너도 영어가 안돼서 답답한 적 많았지? 어머니는 그 답답한 환경에서 너희들을 잘 기르기 위해 열심히 살아오셨어.”

이 말씀을 듣고 처음으로 엄마의 입장을 생각해봤어요.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나쁜 엄마가 되진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해봤더니, 원망만 했던 제 모습이 부끄럽고,  제 옆에 살아계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더라고요. 그날 어머니께 전화해서 처음으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어요. 12년간 묵혀둔 이야기를 나눴죠. 지금은 서로 사랑하는 걸 아니까 싸우다가도 금방 풀리고, 가장 친한 친구예요.(하하)

인도 아이들의 해맑은 눈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내 마음속 근심이 사라지곤 했다.

Q. 많은 문제를 넘고서야 지금의 마음을 갖게 됐군요.   

맞아요. 슬픔이 한순간에 삶을 덮치듯, 기쁨도 순식간에 삶을 바꾸더라고요. 그걸 몸소 경험하니 저처럼 삶의 막다른 골목길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도 행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도망치지 말라고요.
지금 제가 하는 일이 그런 일인 거 같아요.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삶의 마지막 순간일지 모르는 날에 ‘우리’가 만난 거잖아요. 지금까지 그분들의 삶이 어땠든 간에 ‘삶이 참 행복했다’고 느끼시면 좋겠어요. 조금이라도 이 행복을 오래 느끼셨으면 좋겠고요.

“내일은 무얼 하며 놀까? 우리 맛있는 빵 먹으러 가자.” “오늘 수고 많았다. 내일도 잘 부탁한다.” “꽃이 예쁘게 피었던데, 꽃구경을 하러 가자.” “배드민턴 치러 갈까?” 에모토 치히로 씨의 하루 끝에는 이런 문자가 수북이 쌓여 있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의 내일은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미래를 그릴 수 없을 만큼 컴컴하고 긴 터널을 지났다. ‘손을 뻗어 함께 터널 안을 걷고 있는 엄마와 동생을 잡았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다가, 이내 거뒀다. 터널 안에서 그들은 이미 서로가 있다는 기척을 느꼈을 터이다. 지금은 그 터널을 나와 행복을 나누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면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을까? 오늘보다 내일 더 흥겨운 웃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그들을 생각하니, 기자 역시 기쁨으로 출렁인다. 그를 만나 행복해진 한 사람이 더해졌다.    

최지나 기자  41536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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