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에 올라가자 아버지는 2개짜리 방을 3개로 만들어 나에게 자투리 방 하나를 쓰게 해 주셨다. 그전까지 나는 다락을 썼고, 마당 세면장이 내다보이는 작은 창문 앞에 앉은뱅이책상 하나를 놓고 있었다. 그곳엔 거의 쓸 일 없는 살림살이가 가득했고, 나무와 먼지가 섞여 퀴퀴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새로 옮겨간 자투리 방도 볼품없고 방음이 안 되긴 마찬가지였지만, 드디어 다락에서 해방이 되어 좋았다. 작은 방 한 면에 세워둔 큰 책꽂이에는 도서 외판원을 하는 이웃집 아저씨가 팔던 전집이 꽂혀 있었는데 주로 위인전이었다.

나와 책의 인연은 이게 전부였고, 중학교 2학년 이후부터는 책을 보지 않았다. 책은 필요할 때 보면 되고 그렇지 않을 때엔 덮어두면 그만인 것으로 생각했는데, 공교롭게도 나는 책이 필요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잘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어 공부를 시도해보았지만 기대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하나 마나 뻔하다는 생각이 들어 더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이 싫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내 삶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계획이나 방향 없이 되는 대로 살았다. 인생을 놓고 차분하게 ‘생각’이라는 걸 할 능력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행운이 왔다. ‘책’이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행정병으로 근무하면서 바로 위 직속 선임병 두 명이 책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면서였다. 이들의 손에는 항상 책이 들려 있었고, 1년이 지나도록 다 못 읽었는지 늘 같은 책이었다.

그래도 책을 들고 다니는 모습이 무척 신기했다. 나도 그들을 따라 하고 싶었다. 책을 읽지 않아도 들고 다니는 건 나도 할 수 있었고, 나는 그렇게 흉내라도 내고 싶었는데 그것이 나를 살렸다.

책이 나를 바꾸기 시작했다. 나는 선임들과 똑같은 책을 사서 팔에 끼고 다녔다. 내용이 이해되지 않아도 욕심부리지 않고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스산하고 으스스할 때 한 장의 얇은 담요라도 덮으면 온몸이 따뜻해지듯이 책이 나를 데워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나는 책이 보여준 새로운 세계로 망설이지 않고 들어갔다. 화려하게 꾸며 듣기 좋게 나오는 말보다 담백한 글이 좋았다.

책을 읽기 시작하자 영원히 멈추어 있을 것 같던 ‘생각’이 서서히 힘을 받아 움직였고, 그동안 생각의 부품에 슬어있던 녹과 끼어 있던 찌꺼기들이 벗겨져 나갔다. 내가 왜 실패를 하고, 절망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책이 알려주었다. 책은 실천해야 할 리스트를 강조하면서 나를 밀어붙이기보다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이끌었다. 심지어 소설인데도 말이다. 선임병들을 흉내 내기 위해 책을 샀던 것처럼 나는 책이 시키는 대로 따라갔다. 그러다 보니 생각을 바꾸며 여기까지 왔고, 지금도 여전히 나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고 있다.

 강해진 건지 약해진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책 없이 하루를 버티지 못한다. 책이 없었다면, 책이 나에게 오지 않았다면 내가 어땠을까 싶다. 집에는 여기저기 보다만 책들, 신문 서평을 보고 급하게 주문해 온 책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다. 책 속의 글은 계속해서 내 속으로 들어오고, 나도 글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월간 투머로우는 우리 모두에게 다가오는 행운이다. 처음부터 차근히 읽어도 되겠지만, 표지의 젊은 대학생들의 미소만 보아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 한 장씩 넘기면 책 속의 글들이 여러분을 따뜻이 덮어올 것이다.

글 박문택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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