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 헵번의 초콜릿

영화계의 요정으로 모든 이의 사랑을 받아온 오드리 헵번. 그는 미모와 명성, 재능과 품위를 갖춘 배우였다. 하지만 자신이 꿈꾸던 단란한 가정은 끝내 얻지 못했다. 어느 날, 초콜릿을 보며 그는 가장 참혹했던 전쟁터에서 받은 사랑을 기억해낸다. 배부를 땐 보이지 않던 작은 씨앗을 그때 마음에 심었고, 받은 사랑은 이제 주는 사랑으로 발아해 많은 어린이들에게 행복을 주고 있다.

‘요정’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렸던 오드리 헵번. 그는 뛰어난 연기력과 청순한 아름다움으로 당대 최고의 배우라는 찬사와 함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남편의 사랑은 그렇지 못했다. 단란한 가정을 꿈꿨고 이를 위해 어떤 노력과 희생도 아끼지 않았지만 뜻한 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영화계를 일찍 은퇴하면서까지 아내와 엄마의 자리를 지키려 했던 그는 결국 두 번의 결혼을 모두 이혼으로 끝내야 했다.

1986년, 중년에 이른 오드리 헵번은 스위스 톨로체나츠라는 작은 마을에서 하루하루를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평상시처럼 그는 거실 서랍장 안에 둔 초콜릿을 꺼냈다. 외로움과 슬픔을 날려버리는 데 이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초콜릿을 입에 넣으려는 순간, 마음속 깊이 쟁여 둔 ‘그날’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날은 2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국에 살고 있던 오드리 헵번의 가족은 전쟁의 안전지대를 찾아서 네덜란드로 온다. 그러나 1944년 연합군의 ‘마켓가든 작전’ 실패로 더 비참한 상황을 맞았고, 독일군이 식량보급로까지 차단해 2년간 그곳에서 인간 이하의 참혹한 삶을 살아야 했다. 수만 명을 굶어 죽게 한 대기근이 이어졌고 그도 아사 직전의 고통을 받고 있었다. 얼어붙은 땅을 파서 튤립 뿌리를 캐먹고 벌레까지 씹어 먹으며 연명했고, 쓰레기통을 뒤지다 상한 음식물을 발견하면 배탈이 날 걸 번연히 알면서도 허겁지겁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비쩍 마른 그에게 한 군인 아저씨가 초콜릿 일곱 개를 건네주었다. 안타깝게 바라보는 따스한 미소와 함께 말이다.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입에 우겨 넣은 오드리 헵번은 달콤한 초콜릿 맛에 잠시 행복했던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전쟁의 아픈 상흔으로 봉인해둔 그날의 기억이 서랍장 안의 초콜릿과 함께 터져 나오면서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너무 오랫동안 굶어 빈속에 들어간 초콜릿이 배탈을 불러왔지. 그래도 난 먹어보고 아팠던 게 너무 행복했어.’ 그러면서 생각은 예전에 영화 ‘파계’를 촬영하러 갔던 콩고 현장으로 옮겨갔다.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그는 아프리카 환경이 열악하다는 말을 듣고, 에어컨과 비데까지 모두 챙겨갔던 사람이었다. 자신도 한때 전쟁 난민이었고 굶주렸던 경험이 있는데, 그때는 가난한 콩고 아이들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기억은 또 다른 기억을 소환했고, 오드리 헵번은 종전終戰 당시를 회상했다. 영원할 줄 알았던 전쟁도 독일의 철수로 끝나고, 1945년에는 전쟁으로 인한 질병과 기근으로 고통받는 어린이를 위해 국제구호기금(유니세프의 전신)에서 보낸 구호품 트럭이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마을로 들어왔다. 훗날 유니세프 친선대사가 될 오드리 헵번을 비롯해 6백만 명의 전쟁 어린이들은 이 구호품 덕분에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트럭에 잔뜩 실린 밀가루와 버터, 온갖 생필품들은 169cm 키에 39kg이었던 그에게 밥다운 밥을 먹게 해준 은인과 같았다.

‘그래, 내가 유니세프의 도움을 받은 최초의 어린이였지. 만약에 그 초콜릿을 받지 못했다면, 그때 구호품 트럭이 오지 않았다면, 나는 굶어죽고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몰라. 지금 내가 있는 것은 누군가가 내게 사랑을 베푼 날이 있어서야.’

이런 생각은 그를 상실감에서 끄집어내, 삶에 새로운 방향을 그어 주었다. 이윽고 오드리 헵번은 더 가치 있는 일에 헌신하고 싶다고 마음을 정한다.

이듬해 가을, 그는 마카오에서 열리는 국제 음악 페스티벌에 특별 손님으로 초대받아 참석했다. 출연진들이 출연료 전액을 유니세프에 기부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는 앞으로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할지 직감했다. 스위스로 돌아와서 유니세프 사무국을 스스로 찾아간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부터 물었다. 유니세프는 유엔 산하기관이지만 필요 재원을 모두 기부금으로 충당하기 때문에 후원자 모집이 가장 큰 관건이었다. 그는 이 일에 함께 하기로 했다.

1988년 3월, 무보수로 봉사의 삶을 약속하는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임명된 그는 ‘내가 이 일을 하려고 평생 리허설만 하다가 마침내 그 배역을 따냈나 보다’라고 소감을 피력했다. 친선대사가 된 지 2주 뒤, 그는 에티오피아로 갔다. 북쪽 메켈레 지역 고아원을 방문했을 때 “내가 그동안 집에만 있었던 것은 두 아들 때문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이젠 수많은 아이들을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게 되었네요.”라고 했다.

어느 수용소에서 만난 어린 소녀에게 ‘커서 무엇이 되고 싶냐’는 평범한 질문을 던졌다가 그는 큰 충격을 받는다. 소녀의 대답은 “살아 있는 거요.”였다. 그가 이런 아이들에게 정작 해줄 수 있는 것은 끌어안고 손을 잡아주는 일 외에 없었기에 더 마음이 아팠다. 병으로 고통받는 자식을 둔 아프리카 엄마들을 만나면 그는 이렇게 위로의 말을 전했다. “다음날 자식에게 어떻게 먹을 걸 마련해 줄지 모르는 채로 잠자리에 드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나도 알아요. 전쟁 중에 우리 엄마도 늘 그러셨어요.” 이뿐 아니라, 함께 현장을 다니는 동료가 현지 음식을 어려워하면 “굶주림에 허덕여 본 사람은 스테이크가 덜 익었다는 이유로 음식을 절대 돌려보내지 않아요.”라고 말하며 생각의 기준을 낮춰주기도 했다.

오드리 헵번은 아프리카뿐 아니라 엘살바도르, 방글라데시, 베트남, 과테말라, 타이 등지를 5년간 50여 차례 방문했다. 그러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언론 인터뷰와 홍보 활동이었다.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스페인어, 네덜란드어에 능통한 그는 홍보 영상을 찍을 때 필요한 언어로 즉시 연설을 했으며, 아이들을 안고 웃는 오드리 헵번의 모습을 본 전 세계 사람들은 하나둘 모금에 관심을 보였다. 그의 활동에 힘입어, 유니세프 후원금은 몇 배로 늘어났다.

1992년 9월, 내전과 기아로 허덕이는 소말리아로 그는 최후이자 가장 힘겨운 여행을 떠났다. 몸의 이상을 느끼고 있었으나, 자신이 목격한 현장을 전 세계에 알리는 일을 마치고 나서야 병원을 찾았다. 결장암 말기로 3개월 시한부라는 진단을 받은 그는 담담히 스위스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가족, 친구들과 함께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이듬해 1월,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영화배우로서의 인생보다 아프리카에 고통받는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이 더 행복했다고 말한 그는 어릴 때 받은 사랑의 물결이 퍼져나가게 해서 세상이 더 따스해지도록 최선을 다했다. 이런 발자취를 따라 많은 이들이 자선 활동에 동참했고, 어머니의 뜻을 기리려는 두 아들도 지금은 ‘오드리 헵번 아동기금’을 설립해 세계 아동들을 돕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무대 위에서 눈부셨던 오드리 헵번은 지금도 무대 밖에서 여전히 빛나고 있다.

편집자 주

이 기사는 오드리 헵번이 살았을 때 아프리카에서 만나 인터뷰를 했다면 좋았겠다는 전제 하에  아래 세 권의 책을 바탕으로 쓴 글이다. <오드리 헵번 스토리> 알렉산더 워커 저, 김봉준 번역, 북북서 발행, <오드리 앳 홈> 루카 도티 저, 변용란 번역, 오퍼스프레스 발행, <배우 오드리 헵번> 박효성 저, 북스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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