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태 검찰수사관

“제 이름이 적힌 공무원증을 목에 걸고, 30여 명의 선배님들이 일하고 계시는 사무실에서 큰 소리로 인사했어요. ‘안녕하십니까! 박진태입니다!’ 그날 마주하는 모든 순간이 꿈같이 느껴졌어요.”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 박진태 수사관은 첫 출근 날을 잊을 수 없다며 그날의 사무실 풍경, 분위기 등을 생생하게 풀어놓기 시작했다. 2021년이 시작되던 1월 11일의 일이었다. 올해를 돌아보면 힘든 기억보다 즐거운 기억이 대부분이라는 박진태 씨. 그에게 즐겁게 사는 비결을 묻자 ‘실패가 준 선물 덕분이다’고 하며 웃었다. 그와 마주앉아, 그가 받은 선물과 같은 시간들을 들어보았다. 

박진태 광주에서 태어나 자랐다. 대학 시절, 해외봉사를 비롯한 다양한 대외활동을 했다. 기나긴 대학 생활을 마친 후 3년 만에 2020년 검찰수사관 공채에 합격했다. 실패는 힘들었지만, 그 시간이 행복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었다고 말한다.
박진태 광주에서 태어나 자랐다. 대학 시절, 해외봉사를 비롯한 다양한 대외활동을 했다. 기나긴 대학 생활을 마친 후 3년 만에 2020년 검찰수사관 공채에 합격했다. 실패는 힘들었지만, 그 시간이 행복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었다고 말한다.

첫 출근 날이 재미있습니다. 신입 수사관으로서 맡은 첫 업무는 무엇이었나요?

다양한 기록들을 보관하고 대출해주는 것이 첫 업무였어요. 검찰은 크게 검사, 수사관, 실무관으로 구성되어 있고요. 수사관은 검사의 지휘를 따라 수사하거나 형사 기록을 작성해 보존하고 전반적인 행정 사무도 봅니다.

저는 검찰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후, 수습기간 동안 서울중앙지검 기록관리과로 출근했습니다. 처음에는 수사 기록, 증거 기록, 소송 기록의 방대한 양과 묵직한 무게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 기록들이 실제 수사에 중요하게 쓰인다고 생각하니 형용 못할 비장한 책임감이 생기더라고요. 한 장 한 장 소중하게 정리하고, 관리했습니다(하하).

그리고 올해 8월에 성남지청으로 발령받았습니다. 이곳에서는 주로 *자유형 미집행자 검거 업무, *형 집행정지 업무(*자유형 미집행자 : 징역, 금고 또는 구류의 형이 확정됐으나 피고인이 달아나 형을 집행할 수 없는 범죄자를 말한다. *형 집행정지 : 형을 계속 집행하는 것이 인도적인 차원에서 수형자에게 가혹하다고 보이는 사유가 있을 때 검사의 지휘로 형의 집행을 정지할 수 있다.  )등을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진 선배님들로부터 일을 배우는 단계라 실수도 많고 혼날 때도 있습니다. 긴장되는 순간도 많고요. 하지만 제가 책에서 배운 내용들이 실제 상황에서 적용되는 것을 볼 때 신기하고 조금씩 배우며 알아가는 과정이 즐겁습니다.

검찰공무원은 업무 강도가 높은 편이라 사명감과 책임감이 필요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진로를 이 방향으로 생각했나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저도 20대에 진로에 대한 고민이 가장 컸습니다. 시험 성적에 맞춰 진학한 대학의 학과가 적성에 맞지 않았고, 다른 과로 편입하기 위해 1년 간 휴학해 공부하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했죠. 그래서 졸업할 때까지 제 적성을 찾아보려고 노력하며 다른 학과의 수업을 다양하게 들었어요. 그러다 형사소송법 수업을 들었는데 너무 흥미로웠어요. 또한 평소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보람된 일을 찾고 있었기에 검찰직을 발견하곤 ‘이거다!’ 싶어 바로 도전했지요.

그때가 2017년으로, 열심히 공부하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착각이었죠. 일 년에 한 번 칠 수 있는 시험을 연속 두 번 떨어졌어요. 그러니 ‘이 길이 정말 맞는 걸까?’ 하고 수없이 되묻게 되더라고요. 세 번째 시험을 치고는 가채점도 하지 않고 책을 다 버렸어요. 그땐 공부를 그만두고, 아예 다른 길을 가려고 했거든요.

처음에 ‘실패가 준 선물이 있다’고 하셨는데요. 거기서 ‘실패’가 공무원 시험에 낙방했던 일을 뜻하는 것인가요?

돌아보면, 그뿐만 아니라 삶에서 만났던 크고 작은 실패나 어려움 그 모든 순간들이 제게 좋은 선물이었어요. 학창 시절에 시험을 망쳤던 순간, 케냐로 해외봉사를 떠나 난생처음 맡은 공연 기획에 실패했던 순간, 검찰수사관으로 일하며 실수했던 순간 등 모두 다요. 그런데 그 어려움이 결국 제게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건 공무원 시험에 낙방한 뒤였어요. 덕분에 10여 년간 풀지 못했던 삶의 난해한 문제의 답도 찾았습니다. 

박진태 씨는 아직도 자신이 검찰수사관이 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 종종 공무원증을 빤히 바라보곤 한다.
박진태 씨는 아직도 자신이 검찰수사관이 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 종종 공무원증을 빤히 바라보곤 한다.

풀지 못했던 삶의 난해한 문제가 무엇인가요?

대학 시절에 1년간 케냐로 해외봉사를 다녀왔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방송부, 학생회 등 활동적인 일들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케냐에서도 즐겁게 지낼 자신이 있었고, 열심히 활동하려고 했죠. 아카데미든 공연이든 한 프로그램을 맡으면 쉬는 시간도 없이 일에 몰두했고, 말라리아에 걸렸을 때에도 2~3일 만에 벌떡 일어나 비틀거리며 일을 했어요. 그렇게 해야 속이 시원했거든요.

그런데 이상하게 제가 하는 일마다 문제가 생겼어요. 분명히 한 달 동안 꾀부리지 않고 공연을 준비했는데 음향 CD 녹음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행사 당일에 알게 된 경우도 있었고, 핵심적인 소품을 챙기지 않아 프로그램에 차질이 생기기도 했어요.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내가 먼저 배려하면 누구와도 잘 지낼 수 있다’라고 생각했는데, 제 노력이 무색할 만치 사이가 틀어지는 경우도 있었죠.

그런 일들을 생길 때면 ‘나는 왜 이럴까’ 하며 좌절했어요. 그리고 ‘더 꼼꼼하게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일에만 더 몰두했죠. 그렇게 하는 게 맞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런 저에게 케냐 친구들과 동료 단원들이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일 그만하고 좀 쉬면 좋겠다.”였어요. 봉사단 지부장님도 저를 불러서 진지하게 일을 그만하라고 하시기도 했어요. 그때 저는 사람들이 저에게 왜 그렇게 이야기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그 이유를 몰랐죠. 이젠 그 말의 뜻을 알게 되었다는 거네요.

제 답이 100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젠 조금 알 것 같아요(웃음). 돌아보면, 제 삶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성실’이었던 것 같아요. 특출한 재능은 없지만 성실함만은 자신이 있었던 거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땐 그 특기를 더욱 살려야 했어요. 다른 친구들에 비해 늦은 나이까지 공부하면서 부모님께 죄송했고, 조금이라도 빨리 합격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으니까요. 몇 년 동안 기숙사와 학원만 오가면서, 1분 단위로 시간을 썼어요. 그래서 붙을 거라는 희망을 가졌어요. 첫 번째 시험을 치르고 조정점수 2점 차로 떨어졌을 땐 충격적이긴 했지만 ‘노력이 부족했구나. 더 열심히 해야겠다’ 하고 심기일전했어요. 그런데 다음해 시험에서도 한 문제 차이로 낙방하니 온몸에 힘이 빠지더라고요.

성실함이 제 삶의 유일한 기둥이었는데 나의 열심과 성실에 한계가 있다는 것,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어요. 그러니 앞으로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어요.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그땐 시시때때로 강렬한 불안감과 공포감에 시달릴 만큼 힘들었죠.

케냐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비닐봉지로 축구공을 만들어 아이들과 함께 놀았다. 평소 일만해서 ‘로보트’라 불렸던 나였지만, 작은 것에도 기뻐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내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케냐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비닐봉지로 축구공을 만들어 아이들과 함께 놀았다. 평소 일만해서 ‘로보트’라 불렸던 나였지만, 작은 것에도 기뻐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내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그때 제 소식을 들은 케냐 지부장님이 가끔 연락을 주셨어요.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어보고, “진태야, 괜찮아. 지금까지 잘해왔어.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그 일이 아닌 다른 일도 시작할 수 있어. 즐겁게 살 수 있어.” 하며 토닥여주셨어요. 나만의 세상에 갇혀서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제게 다가와 말 걸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어요. 그때부터 시간을 내서 창업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아르바이트로 에어컨 청소 등도 해보았어요. 그렇게 지내보니 새로운 마음이 들더군요. ‘다른 일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네.’ ‘이것도 재미있네.’

그렇게 두 달을 보내며 조금씩 기운을 차렸고, 고민 끝에 미련을 남기지 않기 위해 마지막 세 번째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그즈음 지부장님이 제게 이렇게 이야기하시더군요.

“진태야, 내가 네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안타깝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네가 더 행복해지겠다는 생각도 했어. 살다 보면 원하지 않는 아픔, 실패와 마주해야 할 때가 있잖아. 그런데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더라. 완벽하고 당당한 모습이 아닌, 조금 부족한 모습일 때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고마움도 느끼고, 누구든 쉽게 판단하지 않게 되고, 그런 마음을 표현하면서 마음이 따듯해지고 넓어지더라.”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난 시간이 내게 어려움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구나. 내게 선물이 될 수 있는 거구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졌고, 한편으로는 지난 시간을 어리석게 살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케냐에서 사람들이 제게 했던 이야기의 의미를 알겠더라고요.

“진태야, 성실한 것이 좋은 거지만 네 속에 갇혀서 사람들과 교류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 네가 좀 못난 사람이 되더라도, 함께하는 걸 배우고 느끼며 즐겁게 지내기 바라.”

모두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던 거였어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해에 바로 합격했네요.

맞아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놀랐고, 기뻤습니다. 꼭 제 마음의 변화를 누군가 지켜보는 기분이었거든요. 마지막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마음이 무척 편안했고, 시험도 편하게 쳤습니다. 특별히 잘 친 것 같지 않았기에 수험생활을 정리하고 합격 발표일도 잊고 지냈는데, 어느 날 합격 문자가 왔더라고요. 제가 열심히 공부한 것도 사실이지만, 몇 차례 경험으로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하늘을 보고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어요.

감사해서 더 큰 책임감이 느껴지고, 어려운 일을 넘어갈 힘이 생기는 것 같아요. 또 늦깎이 신입사원이라 걱정해주시는 분들도 있었는데, 저는 아직 그런 걱정을 해본 적은 없네요(하하). 선배 수사관님들, 검사님들 모두 사명감으로 밤낮 가리지 않고 일하시는 걸 보면 존경스러울 따름이죠. 저는 아직까지는 아침에 일어나 출근할 곳이 있다는 것, 그게 가장 행복해요. 올해 특별한 1년을 보낸 것 같습니다.

내년은 어떤 해가 되기를 바라나요?

지금의 저를 보면 아직 업무에 적응하기도 벅찬 모습인데요. 늘 낮은 위치에서 배우며 성장해서 국민들을 위해 묵묵히 일하는 수사관이 되고 싶습니다. 또한 심리분석 분야를 꾸준히 공부해서 전문 수사관이 되고 싶습니다. 범죄를 근본적으로 예방할 수 있는 마음의 세계를 공부해서 청소년들에게 범죄 예방 마인드교육도 해보고 싶습니다. 그 길을 가기까지는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을 만날 수도 있겠지요. 물론 어려움이나 실패는 여전히 피하고 싶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서 제가 좀 더 넓어지고 조금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요(웃음).

많은 사람이 ‘열심히 하면 불가능은 없다’는 문구에 용기를 얻고, 무언가에 도전한다. 하지만 살다 보면 최선을 다했음에도 안 되는 현실을 인정해야 할 때가 있다. 그때 우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 삶에 해일까, 득일까? 박진태 씨는 득이라고 대답한다.

실패가 오랜 기간 지속된다면 정말 견디기 힘들고 괴롭겠지만, 그 시간들이 마침내 삶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바탕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아직 그 길을 모를 뿐이지 행복으로 가는 길이 분명히 있음을 배웠기 때문이란다. 행복을 찾으면 지난날의 괴로움은 잊히고, 그때 그토록 얻기 힘들었던 것을 거짓말처럼 쉽게 얻기도 하는 것이 인생인 것 같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취재 고은비 기자  사진 배효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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