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Therapy 윌리엄 포크너 <헛간 불태우다>

노벨상을 수상한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의 단편 소설 <헛간 불태우다>는 남북전쟁 이후의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남부는 산업이 발달한 북부와 달리 커다란 농장을 가진 대지주 중심의 사회가 깊이 뿌리내린 곳으로, 전쟁 이후에도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이나 지주와 소작농 간의 계층 갈등과 같은 어둑한 그림자가 여전했다.

소설의 주인공은 남부 지역에서 소작농으로 살고 있는 한 백인 가족이다. 아버지 스놉스 애브너, 어머니, 큰아들, 두 딸, 그리고 막내아들 사티. 이 여섯 식구의 삶이 막내아들 사티의 시각으로 서술되는데, 그 첫 장면으로 재판이 열린 마을의 한 가게가 등장한다.

“이것으로 본 사건을 종료합니다. 스놉스, 당신 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찾지 못했지만 충고 한마디 해야겠소. 이 마을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마시오.”

아버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도 그럴 생각입니다. 이런 인간들이 사는 마을엔 살고 싶지 않아서요.”

소작농으로 일하는 사티의 아버지는 자신의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나 억울한 일을 마주할 때면 지주의 헛간에 불을 지른다. 누군가에게는 총과 칼이 그러하듯, 그는 불을 자신을 보호하는 도구라고 여긴다. 이 때문에 사티 가족은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닌다. 첫 장면에 나오는 재판으로 인해 이들은 열세 번째 이사를 떠난다.

아버지 애브너가 헛간에 불을 지르는 것을 다 알고 있는 가족들의 태도는 각기 다르다. 사티의 엄마는 남편의 행동이 잘못된 줄 알지만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입을 다물고 괴로움을 홀로 삭인다. 덩치가 큰 큰아들은 담배를 질겅질겅 씹으며 별 생각 없이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방화를 돕는다. 살이 찐 두 딸은 음식과 잠잘 곳만 찾을 뿐 그 외의 것에는 무관심하다. 야위고 체격이 작은 막내 사티는 아버지가 불을 지르는 것이 너무 괴롭다. 아버지 편에 서고 싶지만 재판 때 사람들 앞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싫고, 또래 아이들로부터 ‘헛간에 불을 지른 놈’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것도 싫기만 하다. 사티는 아버지가

더 이상 불을 지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열세 번째 이사를 떠나는 마차에 몸을 싣는다.

이튿날 새로운 소작농 집에 도착한 뒤, 애브너는 가족들에게 짐을 정리하게 하고 사티를 데리고 어딘가로 향한다. 그곳에는 사티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희고 큰 저택이 있다. 사티는 그 크기에 감탄하며, 어쩌면 아버지가 이렇게 큰 저택을 보고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기쁨에 젖는다.

저택 입구에 도착한 애브너는 신발을 닦고 안으로 들어오라는 흑인 하인에게 “비키지 못해, 검둥이.”라고 말하며 밀쳐버리고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간다. 집안에 깔려 있는 고급 양탄자에 그의 발자국들이 찍히고, 농장 주인인 드스페인 소령이 집에 없자 애브너는 그냥 돌아간다. 사티 가족의 저녁 식사 시간, 드스페인 소령이 말을 타고 더럽혀진 양탄자를 가지고 와서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애브너에게 발자국들을 지워서 가져오라고 한다. 애브너는 아내와 딸이 빤 양탄자에 돌멩이로 금을 그어 돌려준다. 드스페인 소령은 손상된 양탄자 값으로 애브너가 농사지어 수확할 옥수수 550킬로그램을 요구하고, 며칠 후 열린 재판에서 판사는 ‘애브너가 드스페인 소령에게 수확한 옥수수 270킬로그램을 주라’고 판결한다.

그날 저녁, 애브너는 코트를 걸치고 모자를 쓴 후 5갤런짜리 깡통에 석유를 붓는다. 아내가 그의 팔을 끌어당기며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애브너는 큰아들과 함께 떠나기 전, 아내에게 막내 사티를 붙잡고 있으라고 말한다. 어머니가 사티의 손목을 꽉 잡았지만, 사티는 몸부림치며 빠져나와 농장 주인 집으로 달려가 드스페인 소령에게 소리친다. “헛간이에요!” 사티는 다시 헛간이 있는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도중에 말을 탄 드스페인 소령이 지나가고, 얼마 뒤 총소리가 들려온다. 이미 늦었음을 깨달았지만 사티는 계속 뛴다. 그리고 두 번의 총성이 더 울린다. 사티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나무들 사이를 숨을 헐떡거리며 달리면서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아버지! 아버지!”

Boy with a Crow, Akseli Gallen-Kallela, 1884.
Boy with a Crow, Akseli Gallen-Kallela, 1884.

인간은 누구나 불을 지른다

“한밤중에 그는 산마루에 앉아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멀리 달려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비애와 절망은 이제 더 이상 그에게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묘사된 사티의 모습이다.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사티가 가여웠다. 소년은 불을 지르는 아버지가 싫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해야 하는 것이 싫고, 이사를 다니는 것이 싫고 불편했을 뿐이다. 그래서 불을 지르는 아버지를 막으려고 농장 주인에게 달려갔던 것뿐인데, 아버지가 드스페인 소령이 쏜 총에 맞아 죽고 만 것이다. “아버지! 아버지!” 흐느끼던 소년은 한밤중에 산마루에 앉아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난다. 이제 불을 지르는 일은 더 이상 생기지 않을 테고, 가슴 졸이거나 모르는 체해야 할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가 성장한 뒤 가슴에 품고 살아갈 죄책감과 슬픔, 아버지를 죽인 농장 주인에 대한 증오 등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얼마 전에 내게 고민을 털어놓았던 한 남학생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내게 아버지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사업에 실패한 후 술을 마시기 시작한 아버지는 술에 취하기만 하면 가족들에게 욕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어릴 적엔 그런 아버지가 그저 두렵기만 했는데 점점 자라면서 아버지에 대한 증오도 마음에서 함께 자랐다. 술을 마시지 않을 땐 평범한 아버지였기에 마음 한편에서는 가족을 위해 수고하시는 아버지가 감사하기도 했지만, 이틀에 한 번 꼴로 술을 마시고 소리를 지르는 아버지를 보면 다시 증오심에 휩싸여 반항하며 아버지와 싸우는 날이 많아졌다고 했다. 증오심과 죄책감에 힘겨워하던 학생은 집에서 나와 살고 있었다. 사티와 그 남학생이 겹쳐 보였다.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이처럼 괴로워하는데 두 아버지는 무엇 때문에 그런 행동을 계속했던 걸까?’

사람은 누구나 잘살기를 원한다. 가능하다면 조금 더 똑똑한 사람, 외모가 조금 더 멋진 사람이 되고 싶고, 좀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살길 원한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도 하고, 일도 한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모두 1등이 될 순 없다.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지원한 100명이 모두 열심히 공부했어도, 자리가 20명밖에 없으면 80명은 떨어지고 만다. 어떤 사업을 최선을 다해 했어도 더 잘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뒤처지고 만다. 그래서 경쟁해야 한다. 가지지 못한 이는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가진 이들은 자신의 것을 지키고 더 많이 갖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부정을 저지르면서라도 경쟁한다. 그렇게 살면서 자신이 ‘모자란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할 때 우리는 괴로워한다.

나는 ‘사티의 아버지 애브너나 남학생의 아버지 또한 그 시작은 잘살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헛간에 불을 지르고 쫓겨나듯 이사하는 일을 반복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술을 마시고 가족들을 괴롭히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들도 가족과 함께 멋지게 사는 인생을 꿈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경쟁에서 뒤처지고, 평생 노력해도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느낄 때, 자신의 모자람을 마주할 때 괴로움을 느끼고, 그 괴로움이 자신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이라고 여길 때 분노하며, 그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 각기 표출할 수단을 찾았을 것이다.

애브너가 살았던 세상, 남학생의 아버지가 살고 있는 세상,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모양은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같은 세상이다. 그곳에서 사람은 누구나 불을 지른다. 누군가는 애브너처럼 과하게 불을 질러 사람들이 금방 알아채지만, 많은 이들은 마음속으로 불을 지르며 살아간다. 어떤 이는 뒤에서 누군가를 욕하고, 어떤 이는 홀로 분노를 삭이며 체념하고, 어떤 이는 조용히 세상과 단절하고, 어떤 이는 술을 진탕 마신다.

Auguste Renoir, sunset, 1879 or 1881.
Auguste Renoir, sunset, 1879 or 1881.

슬픈 사실은, 고통과 괴로움과 화를 풀기 위해 그 탈출구로 욕을 하고 술을 마시고 헛간을 불태워도 그것이 진정한 해방을 가져다주진 않는다는 것이다.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괴롭게 만들고, 결국에는 총구가 자기 자신을 향하게 만드는 등 다른 고통과 괴로움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차별이 있고 공평하지 않으며 부조리가 있는 세상을 살아야 하는 애브너는, 남학생의 아버지는, 우리는 계속 불을 지르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걸까?

만약 애브너와 드스페인이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드스페인이 ‘소작농 주제에 내 양탄자를 더럽혀? 내게 도전하는 거야?’라는 생각 대신 ‘저 사람은 어떤 사연이 있기에 반항적으로 사는 걸까?’ 하며 그의 마음을 이해해보려 했다면 어땠을까. 애브너가 ‘소작농인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지주들은 앉아서 돈을 벌고 나는 늘 어렵게 살아야 해’라는 생각 대신 ‘전쟁 때는 사는 게 힘겨웠는데 오늘 가족들과 함께 지내며 즐겁게 밥을 먹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 하며, ‘주인댁에서 하인으로 지내는 흑인 친구는 삶에 어려움이 얼마나 많았을까’라는 마음을 가졌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어린 사티가 아버지를 보고 괴로워해야 할 일도 없고,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죄책감 속에서 살아야 할 일도 없으며, 세상을 증오하며 살아야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나보다 잘난 사람이나 뛰어난 사람들을 보며 자신이 모자라다고 여길 때가 많다. 때로는 박탈감을 느끼기도 한다. 10을 가진 사람은 100을 갖기 원하고, 100을 가진 사람은 1000을 갖기 원하며, 1000을 가진 사람은 10000을 갖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 다른 사람을 돌아볼 틈이 없고, 내 것을 지키기 위해 날카로워진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삶의 모양의 격차가 모두 사라질 수는 없겠지만, 누군가와 비교하며 ‘나는 모자라, 더 나아지고 더 잘살아야 해’라는 생각에서 벗어난다면 각기 자신의 자리에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려 하고 배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땐 차별이 있어도, 같이 웃으며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사람들이 멋진 외제차를 소유하는 가치보다 푸른 하늘을 보는 가치를 더 크게 느끼며 살아간다면 어떨까. 오늘 하루 밝은 세상을 보고 따스한 햇살을 받을 수 있어서, 시원한 공기를 마실 수 있어서, 아름다운 자연을 볼 수 있어서 행복한 것이 어떤 것보다 크다면, 값비싼 음식을 먹지 못하거나 해외여행을 떠나지 못해서 불행하다는 생각에 빠져서 살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헛간, 불태우다>를 덮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우리는 진짜 행복과는 반대되는 길을, 잘못된 습관처럼 걸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글쓴이 심문자

서울과학기술대학 사회교육계발원에서 독서교육을, 방정환 교육센터에서 부모교육을 하고 있다. 예루살렘 라디오 ‘북적북적 북클럽’ 진행자이다. 독서지도사, 청소년상담사, 독서논술교사 등 책과 관련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헛간, 불태우다>는 20세기 미국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 윌리엄 포크너의 단편 소설이다. 그는 한평생 미국 동남부에 거주하였으며, 고향을 모델로 하는 가상의 지역을 중심으로 대다수 작품을 형상화하였다. 1949년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두 차례 퓰리처상을 받은 바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고함과 분노> <압살롬, 압살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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