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style #2 문화산책

오늘은 특별히 오후 반차를 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새로 산 옷으로 갈아입고, 크로스백을 어깨에 멨다. 여름 방학이 시작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인턴 생활을 하고 있던 나에겐 큰 의미가 없었다. 방학을 맞아 자유로운 시간을 만끽하고 있는 친구들의 SNS 사진들을 보며 부러워만 하던 나는, 어느 평일의 오후 일과를 비우고 친구와 함께 하루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언젠가 여행 잡지에서 이런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여행이란 결국, 평소 가지 않았던 곳을 찾아가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는 과정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나는 그 글처럼 자주 가보지 않은 곳으로 가고 있었다. 연극이나 뮤지컬은 가끔 보러 다니지만, 미술은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어서 전시 관람은 늘 뒷전에 미루어왔다. 그런데 며칠 전, 친구가 미술관을 가자며 연락을 해온 것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도착한 곳은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이 열리는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이었다.

나와 동행한 친구는 디자인을 업業으로 하는 터라 전시를 보러 자주 다닌다고 했다. 그런 ‘든든한’ 친구와 같이 전시장에 도착했고, 작품 해설을 해주는 오디오 가이드 기기를 대여했다. 평일 오후라 전시장은 한산한 편이었다. 아주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폰으로 흘러들어오는 해설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겼다.

‘피카소’ 하면 ‘입체주의’라든지 형이상학적인 모습의 그림들만 떠올렸는데, 미술관 안에는 네 살배기 아들을 섬세하게 그린 그림부터 판화, 조각, 도자기 등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작품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어서 흥미로웠다.

90대까지도 계속 그림을 그렸다는 피카소. 작품 설명 속에는 ‘그의 연인’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했는데, 그 연인의 이름이 시기에 따라 또 자주 바뀌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이름이 바뀔 때마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느낌도 달라지는 것을 보며 작가가 그린 의도나 당시 마음 상태가 어땠는지, 무엇이 다른지 살피기 시작했다.

그의 네 번째 연인이었던 ‘도라 마르’는 예술가이자 사진작가였는데 무척 똑똑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다른 여인들의 초상화보다 그의 초상화는 세련되고 지적인 느낌이 강했다. 그런데 동일 인물을 그린 <모자를 쓴 여인의 상반신>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우울한 회색빛 배경 위에 그려진 여자의 얼굴은 심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해설을 듣고 보니, 도라 마르와 함께했던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가장 암울한 시기였으며, 이러한 시대 상황이 도라 마르의 초상화에 반영된 것이란다. 옆으로 조금 더 가보니 1944년 작품인 <파란 모자를 쓴 여인의 상반신>이 있었는데, 이는 전쟁의 끝이 보이던 시기에 그린 것으로 밝은 푸른색과 초록색으로 새로운 세상을 향한 희망을 작품에 담고 있다. ‘내게는 역사 속 한 장면이었던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그 시대를 실제 경험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심정일까?’

해설 오디오를 듣지 않았으면 내가 보고 느낀 것에서 그쳤을 텐데, 하나하나 설명을 들으니 그가 살았던 세상은 어떠했는지, 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난해하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그림의 의미를 알아가는 것이 꼭 사람을 만나고 가까워지는 과정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서로 겉모습만 보면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행동하는지, 말하는지를 알아가다 보면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인턴 생활 중 가장 힘든 것이 인간관계인데, ‘내가 보는 것으로만 판단하진 않았는지, 그 사람의 마음은 어땠는지, 들어보려는 노력은 했는지’ 스스로 자문해 보았다. 그렇다고 내가 당장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마음을 열고 대화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의 마음도 ‘오디오 해설’처럼 쉽게 들어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파란 모자를 쓴 여인의 상반신(1944), 피카소 ⓒ 2021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파란 모자를 쓴 여인의 상반신(1944), 피카소 ⓒ 2021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처음에는 분명 친구와 나란히 걸으며 전시를 보았는데 문득 둘러보니 우리는 멀찍이 떨어져서 각자의 속도대로 전시된 작품들을 관람하고 있었다. 무엇인가에 쫓기듯 살다가, 차분한 분위기에서 무엇인가를 가만히 바라보고 생각하는 시간이 의미가 깊었다. 그 친구는 평소 생각이 많은 편인데 그림을 보는 동안에는 한 가지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단다.

모두 일곱 섹션으로 구성된 전시를 보고 나오자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전시장을 나오면서 피카소 기념품 숍을 지나칠 수 없어 한참을 둘러보다 엽서 두 장을 샀다. 그 다음은 수다를 떨 차례다. 사 온 엽서를 들여다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가 느낀 것들을 이야기했다.

“피카소는 평생 사랑하며 살았는데, 그 수많은 아름다운 작품들의 영감을 뮤즈에게서 받았다고 했잖아. 솔직히 피카소가 바람둥이인 건 확실한 것 같아(하하). 하지만 이 많은 작품들이 온전히 자신에게서 나온 게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영감을 받은 덕분이라고 표현하는 게 신기했어.

사실, 요즘 고민이 많았거든. 회사에서 지금까지는 선배님들의 의견을 취합해 작업만 하는 사람이었다면, 이제는 기획자로 넘어가야 하는 시점에 있는데 ‘내게서 정말 좋은 의견들이 나올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거든. 그런데 피카소가 다른 누군가에게서 영감을 얻었듯 일상 속에 만나는 사람들과 세상, 그리고 선배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것부터 시작해보려고 해.”

같은 걸 보고도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달랐다. 피카소 전 이야기로 시작한 우리의 대화는 최근 진로에 대한 고민과 서로에 대한 응원으로 끝이 났다. 집으로 돌아와 휴대폰을 꺼내 SNS에 오늘 찍었던 사진들과 느낀 점을 간략하게 적었다. 비록 짧은 여정이었지만 100년 가까운 시간을 넘어 한 시대의 거장을 만난, 어쩌면 스페인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살았던 한 사람의 ‘인생’을 만날 수 있었던 깊고도 먼 여행이었다. 침대에 누워 ‘다음번에는 아예 하루를 휴가 내서 더 많은 전시장으로 떠나야겠다’라는 생각과 함께 잠을 청했다.

글 권소영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