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대학의 글쓰기 교육은 혹독하다고 알려져 있다. 전공과 상관없이 모든 학생이 글쓰기 수업을 들어야 하는데, 어떤 수업보다 가장 어렵다고 한다. 수업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살면서 내 마음을 글로 옮겨야 할 때가 있다. 시험을 치를 때면 지식을 글로 적어야 하며 사업 보고서 또한 글로 표현해야 한다. 어렵지만 피할 수 없는 글쓰기. 그 습관은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나는 중학교 2학년 2학기 때부터 일기를 썼다. ‘2학년 2학기 때’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그때 대구에서 서울로 전학을 왔다. 어느 날 국어 시간, 선생님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어이, 이건우! 여기 한번 읽어봐!”

제대로 잘 읽었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지금 무슨 소리 했는지 아는 사람???”

선생님은 아이들을 부추기고 있었다.

“어이, 이건우~ ‘의사’라고 한번 말해봐!”

나는 분명 ‘의사’라고 발음했다. 동시에 교실은 웃음바다가 됐다.

“아니, ‘의사’를 하라는데 왜 ‘이사’라고 하는 거야???”

선생님은 나를 놀리고 있었고, 아이들은 재미있어 했다. 그렇게 전학생 신고식을 치른 나는 숫기가 부족해 위축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담임 선생님이 일기장을 제출하라고 했다. 나는 대학노트를 마련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글을 제대로 써본 적이 없었다. 처음으로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그날그날 일을 충실히 썼다. 한번은 전학생이 느끼는 스트레스 이야기를 적었다. 일기 검사가 끝나고 노트를 돌려받았다가 깜짝 놀랐다. 붉은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어? 일기를 읽으면서 검사하셨네?!’

그냥 마지막 날짜만 보는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처음에는 마음이 불편했지만 이내 방향을 잡았다. 나는 ‘공식적인 독자’인 담임 선생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일기에 마음껏 털어놓았다. 어떨 때는 담담함을, 또 어떨 때는 감사함을 담았다. 2학년 2학기가 끝날 때까지 일기 쓰기를 즐겼다.

중 3이 되면서 일기 쓰기를 더는 하지 않았다. 고입 본고사를 준비해야 했다. 학교에서도 일기 검사를 더는 하지 않았다.

습관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 기억한다. 고등학교 진학 후 그걸 깨달았다. 언젠가부터 늦은 밤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감춰뒀던 노트에 뭔가를 쓰고 있었다. 어느 날은 기분 좋게 서늘했던 밤공기를 느끼며 끄적였다. 사춘기의 예민함이 그대로 담긴 글이었다. 예전 같은 ‘공식 독자’는 없었다. ‘저자’가 유일한 ‘독자’였다. 누구도 의식하지 않은, 보나 마나 유치했을 글이지만, 모았다. 글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은 친구였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무탈하게 건널 수 있게 해주었다.

시간이 지나며 글을 쓴 노트가 몇 권 쌓였다. 책상 서랍에 넣고 잠가뒀다. 글을 추가하고 싶을 때 꺼내 썼고, 어떤 날은 옛날 글을 읽곤 했다. 대단한 글은 없었다. 기껏해야 누군가를 생각하며 쓰는 정도였다. 그것도 자신이 없어서 직접 표현하지도 못했다. 비틀고 빗대며 대상과 설렘을 감췄다. 그런 글을 혼자 들여다보며 생각을 키우곤 했다. 스물 즈음이었다.

쓰는 습관은 입대 후에도 여전했다. 강원도 화천 민통선 안 내무반에서도 노트를 감춰두고 있었다. 한겨울 보초를 서고 들어와 노트를 꺼내곤 했다. 대단한 내용이 담기지는 않았다. 졸병 때부터 쓰지는 못했다. 상병 달기 직전부터 썼다. 그 노트는 제대 후에도 나름의 역할을 하다가 이십 대 후반 어느 날 멈췄다.  

그 후 나는 글을 직업적으로 쓰게 됐다. 신문사 기자가 된 것이다. 직업적 구경꾼이자 직업적 기록자가 됐다. 처음엔 ‘참, 글 못 쓰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질책받으며 혼자서 터득해야 했다. 어설픈 자신감이 생겼을 즈음에는 다른 사람들 글을 폄하하기도 했다. 조금 더 알게 됐을 때 글이 무서워졌다. 뭣 모르고 썼다가 부끄러워한 적도 많았다. 어떨 때는 글쓰기가 두렵기도 했다. 늘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나이가 들어,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왔다. 나는 남보다 조금이라도 잘하는 게 뭔가 생각했다. 글이었다. 글쓰기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던 꿈은 깨졌다.

출판사 간판을 걸었다. 남의 글을 만지게 됐다. 얼마 전엔 <누구나 책쓰기>라는 책을 펴내며 책을 쓰는 법을 연구하고 강연을 하고 있다.

돌아보면 내 인생에 ‘글쓰기’는 수많은 의미였다. 한때는 내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였으며 사춘기를 넘어서게 하는 완충재였다가 생을 책임졌던 업이자 두려움의 존재였다. 이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다. 

왜 글쓰기가 어려울까? 

출판사 일을 하면서 저자들을 살폈다. 왜 글쓰기가 고통스러울까? 세 가지 이유였다. ‘다들 너무 잘 쓰려고 한다.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컴퓨터 앞에 앉는다. 평가를 너무 의식한다.’ 인간이기에 겪는 고통이다. 모든 글 쓰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주변에 글쓰기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런 충고를 해준다. “너무 잘 쓰려고 하지 마라. 자료 준비를 철저히 해라. 평가를 두려워하지 마라.”

“글쓰기가 두려운 까닭은 잘 쓰겠다는 욕심 때문이다” <대통령 글쓰기>를 펴낸 작가 강원국의 말이다. 그는 해결책으로 “우선 한 문장만 쓰자. 주술 관계만 맞춰 쓰자. 한발씩 야금야금 들여놓자” 등을 제시했다. 맞는 말이다. 너무 잘 쓰려고 하면 한 줄도 쓰지 못한다. 글을 잘 쓰는 방법은 가벼운 마음으로 가장 편한 상대에게 이야기하듯이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면서.

“나는 많은 정보와 사실을 논리적으로 질서정연하게 배열한 것이 잘 쓴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보와 사실이 많고 그것이 정확해야 하고, 그 배열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어야 되는 것이죠. 나는 그런 글이 뛰어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가 김훈이 한 말이다. 보통 사람들이 쓰는 글은 문학적인 글보다는 비문학적인 글이 많다. 비문학적인 글을 쓴다면, 그 글에는 미사여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감동하는 것은 미사여구가 아니다. 진지하게 정보와 사실을 찾아 고민하고, 그것을 솔직담백하게 쓴 것에 감동한다. 포장보다는 내용물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글쓰기는 머리를 쥐어짜서 수려한 글을 만드는 게 아니다. 먼저 정확하고 많은 자료를 모으는 게 좋은 길을 쓰는 지름길이다.

어느 출판사의 베테랑 교정 교열 팀을 소개한 기사에 따르면 대학교수도 글이 거칠고, 문인들 글도 언제나 야무지진 않다고 한다. 하지만 신문기자 출신 소설가 장강명은 손댈 데가 별로 없다고 칭찬했다. 신문사에서 혹독하게 훈련한 덕분일까. 장강명은 피드백의 유용성과 함께 그 과정의 심리상태를 이렇게 설명했다. “수치심을 무릅쓰고 자기 글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준 뒤 피드백을 받아봐야 한다. 처음에는 칭찬 외에 다른 말을 한마디만 하면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를 것이다. 그 단계도 넘어야 한다.” 글쓰기 근육을 키우는 데 피드백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 남에게 내 글을 보이는 게 처음에는 쑥스럽고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한번 용기를 내면 다음부터는 편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개인으로서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다. 하지만 거기서 한 발짝 나아가면 살면서 부모나 가족 사회로부터 받았던 수많은 가치, 지식, 지혜를 기록하고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큰 의미가 있는 일이다. 나누는 범위가 ‘나’ 혹은 소수일 수도 있지만, 그 공감의 폭이 넓어지면 훌륭한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사람들에게 글을 써보라고, 책을 쓰라고 권한다.

글쓴이 이건우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뒤, 조선일보 편집국 스포츠레저부, 수도권부 등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스포츠투데이 편집국장으로서 신문을 만들었다. 그 경험을 토대로 그는 현재 일리출판사 대표로 일하며 글을 쓰고, 책을 만든다. 최근 <누구나 책쓰기>를 펴내면서 책쓰는 법을 연구하고 강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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