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 9일, 선교사인 부모님을 따라 생전 처음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내 나이 열네 살이었다. 목적지는 아프리카였는데, 마치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기분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아는 아프리카는 만화 라이온 킹에서 봤던 세렝게티 초원과 동물들과 자유롭게 어울려 노는 정글의 왕 타잔이 전부였기 때문에 ‘나도 타잔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며 나이지리아로 떠났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나이지리아의 라고스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매연으로 가득 찬 뿌연 하늘은 내가 상상한 초원이나 정글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그리고 깨진 유리를 테이프로 붙여서 다니는 자동차는 물론 사이드 미러라곤 찾아볼 수 없어 오직 감각으로만 운전하는 차, 그리고 비좁은 택시 안에 최소 6명이 타고 있는 모습들은 아프리카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도착한 첫날 밤, 밖에서 무슨 행사를 하는지 연신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생각보다 아프리카가 삭막하지는 않구나’라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잠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날, 밖에 나가서 알게 된 사실은 어젯밤 폭죽 소리는 총격전이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첫인상은 그렇게 충격적으로 내 뇌리에 박혔다.

생각보다 아프리카의 삶은 더 어려웠다. 이곳의 외국인들은 국제학교에 다니는데, 학비가 너무 비싸서 우리는 다닐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현지인들이 다니는 공립중학교에 입학했다. 학교라고 하기엔 시설이 너무나 열악했고, 선생님도 수업에 거의 들어오시지 않았다. 나중에 현지 친구들에게 선생님께서 수업에 잘 들어오시지 않는 이유를 묻자, 여러 학교를 동시에 맡아 가르치시기에 수업이 겹쳐서 못 오신다고 했다.

그리고 교실에 비해 학생 수가 너무 많아 책상이 늘 모자랐다. 아침 일찍 학교에 도착하지 않으면 좋은 자리는 이미 다른 친구들이 차지했고, 늦게 온 학생들 은 교실 밖에서 수업을 듣기 일쑤였다. 아침 일찍 집을 나와서 좋은 자리를 맡은 날이면 공부하는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를 옮겨다니며 선교하시다 보니 전학이 잦았다. 한국에서는 공부하고 싶어한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는 그곳에서는 정말 공부가 하고 싶었다. 공부할 기회만 생기면 날을 새서라도 공부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프리카에서는 한 끼, 한 끼를 걱정해야 했다. 잘 먹질 못하다 보니 몸도 많이 약했고, 가족들 모두 말라리아나 장티푸스에 자주 걸렸다. 의료 환경도 좋지 않다 보니 아파도 쉽게 병원에 갈 수가 없었고, 그로 인해 위험한 고비도 많이 넘었다.

이런 일들을 자주 겪으면서 아프리카에서 선교하시는 부모님이 이해가 되지 않고, 왜 이런 고생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원망스러웠다. 그러곤 ‘나는 절대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나는 꼭 돈도 많이 벌고 넉넉한 환경에서 살 거야. 전기세 아껴야 한다고 이 더운 날에 몇 번이나 에어컨 켜는 걸 고민하면서 살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아버지를 따라 어느 시골 마을에 갔다. 그 마을에서 한 부부를 만났는데, 예전부터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아 이혼 직전의 상태였다. 그들은 아버지를 보자마자 상대방의 단점을 들추어내며 헐뜯기 시작했고, 함께 살 수 없는 이유를 늘어놓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서로 헐뜯는 그 이야기 속에서 그들이 가진 행복의 조건을 찾아내셨고, 그 내용을 그 부부에게 다시 들려주셨다. 분명히 서로를 잡아먹을 듯한 모습이었는데, 이야기가 다 끝날 때쯤엔 서로를 ‘최고의 남편’, ‘최고의 아내’라고 부르게 됐다.

몇 달 후, 그 마을에 다시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그 부부가 가장 먼저 우리에게 달려와 자신들이 얼마나 행복한 부부로 살고 있는지 이야기했다. 더더욱 신기한 것은, 부부가 변한 것을 보고 마을 사람들이 부부를 찾아와 그 이유를 물었고, 그 후에 마을에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서로를 부를 때 상대방의 이름 대신에, “장관 어머님”, “대통령 아버님”, “최고의 추장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장난스럽게 시작했지만, 상대방을 “대통령 아버지”라고 계속 부르다보니 진심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혼 직전의 부부가 변한 것처럼 마을 사람들도 모두가 변했다.

나는 그 변화를 직접 목격하면서 부모님의 행복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부모님을 만난 사람들이 행복하게 변하는 기쁨이 상당히 컸기에, 아프리카라는 낙후된 환경과 어려운 문제들을 점점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의 행복을 두 눈으로 본 후에도 나는 여전히 공부에 목을 맸다. 부모님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결정엔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 나는 그토록 원하던 프랑스 대학에 합격했고, 대학원까지 좋은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살았던 경험과 외국어를 사용하는 장점을 최대한 살려 국제 행사에도 많이 참석하고, 아프리카 몇몇 국가의 대통령 통역을 맡는 기회도 얻었다.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노력했고, 마침내 한국 대기업에 취업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드디어 내가 원했던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동안 했던 고생은 끝나고, 돈을 벌면서 내가 하고 싶은 것도 하고 부모님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돈을 벌면서 전에 갖지 못했던 물건들이 하나둘 생겼고, 삶은 더없이 풍요로워졌다. 그런데 이상하게 삶이 무미건조해지고, 행복하게 웃는 날들이 줄어갔다. 마치 어린 시절 한국에서 살 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좋은 조건들과 환경이 있었음에도 행복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러다 문득 아프리카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보는데, 마냥 행복하게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보았다. 분명히 그곳에서 가난했고, 전기와 물이 자주 끊겨 불편했고, 말라리아에 걸리면 2주를 시름시름 앓았는데, 사진 속의 나는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그곳에서 나는 작은 것에 행복할 줄 알았다. 아침 일찍 학교에 가서 좋은 자리에 앉았을 때 행복했다.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내게 아프리카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영어를 가르쳐줄 때 행복했다. 불어를 쓰는 나라에 갔을 때에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 수업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는 내게 친구들이 책을 펴서 하나씩 가르쳐줄 때 행복했다. 물이 끊겨 씻지 못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내리는 비를 맞는 게 그렇게 즐겁고 또 행복했다.

2021년 3월, 김요셉 씨와 그의 아내는 아프리카 토고에 도착했다. 부모님의 길을 따라 걸을 그는 많은 현지인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2021년 3월, 김요셉 씨와 그의 아내는 아프리카 토고에 도착했다. 부모님의 길을 따라 걸을 그는 많은 현지인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프리카에 살면서 나는 행복했던 기억과 순간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늘 어려웠던 때에만 초점을 맞추고 살았던 것 같다. 힘들게 사는 것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렸고, 그렇게 사는 동안 정작 중요한 인생의 가치를 잊고 있었다.

나는 이제 아프리카로 돌아간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던 그곳으로, 행복했던 추억들이 가장 많이 있는 곳으로. 지금은 아프리카가 라이온 킹이나 정글의 왕 타잔에 나오는 곳이 아니라는 걸 잘 안다. 그런데 열네 살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가슴 두근거림을 지금은 느낀다. 아프리카에서 제2의 시작을 앞두고 앞으로 느낄 많은 행복들을 기대한다.

글 김요셉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