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유달리 힘든 한 해를 보낸 사람들을 위해 투머로우는 마음쓰기 에세이 공모전을 열었습니다. 마음에서 어려움을 이기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듯, 공모전 글쓰기를 통해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감사와 행복을 찾길 바라는 취지였습니다. 
편집부에 코로나를 겪으며 경험한 희망의 글들이 속속 날아왔습니다. 공모전에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올해에는 독자 분들께 좋은 일, 행복한 일이 가득하길 바라며, 마음쓰기 공모전 2등 수상작을 이번에 소개합니다. 


예부터 국난이 있을 때마다 우리 국민들은 똘똘 뭉쳐 이겨냈다. 남자들이 전쟁터에서 총과 칼을 들고 싸우는 동안, 여자들은 치마폭에 돌을 나르거나 의병들의 식사를 준비하며 든든한 힘이 되었다. 국민의 결속력을 높이는 데에는 외세의 침략만 한 것이 없다는 이야기는 역사책만 펼쳐 봐도 충분히 납득이 간다.

코로나로 온 나라가 휘청거렸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곧 가정의 위기이기도 했다. 저마다 사연 없는 집은 없다고, 잘살면 잘사는 대로, 못살면 못사는 대로 가가호호 코로나와 지지고 볶고 사투를 벌였을 것이다. 물론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다. 이 전례 없는 재난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도무지 감이 서지 않았다. 평소 가족들 간에 마음도, 몸도 거리가 멀었던 터라 더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릴 적 ‘가족’에 관한 시를 써오라는 숙제를 받고 ‘투명 인간 가족’이라는 시를 제출한 적이 있다. 그 덕분에 담임 선생님께서 집으로 전화를 하셨다. 내 유년 시절의 기억은 낮이고 밤이고 부딪히기만 하면 싸우는 부모님과, 웬일로 싸움이 없는 날이면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집에서 언제 또 싸움이 터질지 몰라 두려워하는 내 모습뿐이다. 당연히 식사도 각자 방에 들어가 따로 했고, 외식을 한 횟수는 손에 꼽는다. 친구네 가족이 매일 같이 저녁식사를 하며 가족회의를 한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머리가 더 크고 나서야 우리 가족은 별난 게 아니라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릴 때는 소통의 부재로 삭막한 우리 가족 분위기가 너무 슬프고 싫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사춘기 때는 오히려 나를 향한 간섭과 걱정을 덜 받을 수 있어서 편했던 것 같다.

하지만 사회인이 되고 나서 따뜻한 가족 분위기가 간절해졌다. 특히 회사에서 온갖 세파를 겪어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안고 귀가했을 때, ‘수고했어’라는 말 한마디 듣지 못하고 쥐 죽은 듯 조용한 거실을 볼 때면 세상 한가운데 홀로 있는 듯 외로웠다. 본래 ‘거실’이란 장소는 가족들의 대화로 항상 왁자지껄한 곳이 아니던가.

그러던 어느 날 코로나가 처음 발병하고, 온갖 뉴스에서 주의사항들을 떠들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 위험성을 피부로 감지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가족들의 안전이 걱정이었다. 동생은 타지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부모님 두 분은 나이도 많으신데다 생계를 책임지셔야 해서 아직도 밖에서 궂은일을 하시며 하루에도 낯선 이들을 수없이 만나야 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노년층에게 더 위험하다는데, 마스크가 연일 품절 사태를 기록하는 걸 보면서 이를 어찌해야 하나 하며 발을 동동 구르기 일쑤였다. ‘어느 동네에 확진자가 나왔다더라’ 하는 불확실한 소문들은 안 그래도 불안한 마음을 더 들쑤셨다.

(일러스트=김현정)
(일러스트=김현정)

나는 부모님의 건강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으로서 한시도 마음 편할 새가 없었다. 두 분이 외출하실 때마다 현관에 손 소독제를 비치해놓고, 면 마스크나 일회용 마스크라도 꼭 챙겨 쓰라는 당부의 말만 전하기에는 사태가 너무 심각했다. 매일매일 새로 쏟아져 나오는 뉴스들을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일일이 일러주기도 힘들었다. 전쟁은 실질적으로 정보전이라는 말이 절로 실감이 가는 나날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가 막히게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바로 가족 단톡방을 개설하는 것이었다. 힘 들이지 않고 가족들 모두에게 코로나 관련 소식들을 쉽고 빠르게 공유할 수 있음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소통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사실 코로나는 핑계에 가까웠다. 이전부터 친구들의 가족 단톡방이 부러웠지만 만들 만한 특별한 구실도 없고 나 또한 낯간지러워 차마 만들지 못하고 있었는데, 코로나가 그럴 듯한 이유가 돼 준 것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단톡방을 만들고, 가족들이 하나씩 초대되었다는 메시지가 뜰 때마다 나는 혹시라도 금방 나가버릴까 봐 마음을 졸였다. 비록 온라인상이지만, 이렇게 한 공간에 머문 것이 참 오랜만이었기에 얼굴을 보고 있지 않아도 서로가 어색해하고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코로나 관련 공유할 정보가 많아 한꺼번에 올리려고 만들었다’며 보이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 동생을 제외하고 부모님은 거의 일방적으로 듣고만 그럴 듯하게 취지를 설명했고, 가족들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특별히 거부 반응을 계시는 입장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 힘이 빠지기도 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매일 코로나 관련 소식들을 부지런히 퍼다 날랐다. ‘마스크는 꼭 코까지 올려 써야 효과가 있다더라’라는 식의 걱정 어린 메시지들과 함께, 가끔씩 유머 글이나 힘이 되는 시 한 편도 슬쩍 끼워 올리면서.

하루는 일방통행뿐이던 단톡방에 소통의 씨앗이 움트기 시작했다. 시작은 어머니였다. “00약국에 마스크 판다더라. 영규 아빠 한번 가봐라.” 미사여구도, 이모티콘도 없이 투박하기 짝이 없는 한 줄이었지만, 나는 거기서 진하게 묻어 나온 어머니의 가족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모두가 어색해서 말은 안 하지만, 사실 나보다도 가족들을 더 걱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것을 내가 읽어내지 못했을 뿐이다.

어머니를 시작으로, 가장 복병이었던 아버지도 어느 날부턴가 대화에 동참했다. 마스크를 구하지 못했다는 어머니 말에 다른 곳에 가보겠다는 답장을 하고, 때로는 나도 몰랐던 기사들을 먼저 공유하는 발 빠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점점 더 많아지는 메시지를 볼 때마다 내 얼굴에는 슬그머니 미소가 떠올랐다. 심각한 재난 가운데 이런 일도 있구나 싶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이후였다. 코로나가 서서히 진압되기 시작하며 마스크도 넘쳐났고, 재난 문자도 정확하고 빨라 가족 단톡방의 원래 기능은 상실되었지만, 아직까지 아무도 단톡방을 나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 방은 지금까지 재난 지원금 신청부터, 작게는 저녁 메뉴 식재료 구입 부탁까지 가족의 대소사가 오고 가는 공간이 되었다. 며칠 전에는 동생의 생일을 맞아 모두 한 마디씩 덕담을 올리기도 했다.

대화의 어색함이 걷히다 보니, 자연스레 휴대폰 액정이 아니라 얼굴을 보며 말을 건네는 일도 잦아졌다. 이쯤 되면 내 작전은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에게는 이번 코로나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최악의 기억으로 자리 잡겠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소통의 소중함과 행복을 일깨워준 시간이었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진정한 가족은 상황이 어렵다고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똘똘 뭉쳐 함께 이겨낸다는 것을. 앞으로 언제까지 코로나가 지속될지 모르겠지만, 가족들과 함께라면 남은 싸움이 그리 고되지만은 않을 것 같다.

글 박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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