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시키지 않아도 몽당연필이 되면 깍지를 끼워 썼고 그에 대해 불평 한마디 꺼내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가난하든 좀 넉넉하든, 사람들 모두가 검약과 절제를 기본으로 알고 살았다. 그 덕분에 우리나라는 ‘한강의 기적’을 만들고, 반만년 역사에 유례없는 경제적 풍요를 이루었다.

하지만 물질적으로 풍요해진 시기에 태어난 세대들이 부모님의 근검절약 가치관을 그대로 따르기란 쉽지 않다.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거나 굳이 하지 말아야 할 환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제하는 힘이 약해지면서 이들의 삶은 욕구를 따라 가는 길로 향했고, 사람들의 마음도 삭막하고 차갑게 변해갔다. 사람들은 더 이상 정을 주고받는 일에 예전처럼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바로 옆에서 사고가 나더라도 나와 직접 상관이 없으면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 사고로 내가 약간이라도 손해를 볼 것 같으면 어떤 비상식적인 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은 상식이 무너진 이기주의 영역으로 흘러갔다.

물질 풍요가 가져온 새로운 범죄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지 사람들이 모여 살면 범죄도 늘 있었다. 과거에는 생존을 위해 먹을 음식이나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을 훔치는 생계형 범죄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묻지마’ 범죄처럼 사회에 대한 증오심을 불특정 다수에게 표출하거나, 즉흥적인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발생하는 범죄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는 욕구를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자제력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최근에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국가가 생기고, 교도소 밀집도가 문제가 될 만큼 범죄율은 점차 높아지고 있다. 전 세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은 범죄로부터 안전한 생활환경을 조성해 시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다각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중이다. 범죄 예방 환경 디자인 즉, ‘셉테드’ 기법도 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셉테드 기법은 환경을 밝게 조성해 범죄 예방은 물론, 삶의 질도 높이려는 데 뜻을 두고 있다.
셉테드 기법은 환경을 밝게 조성해 범죄 예방은 물론, 삶의 질도 높이려는 데 뜻을 두고 있다.

셉테드CPTED는 ‘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al Design’의 약자로, 우리말로 옮기면 ‘범죄 예방 환경 디자인’이다. 도시 환경 설계를 통해 범죄를 사전에 예방하는 선진국형 범죄 예방 기법을 의미한다. 즉, 범죄는 치밀하게 계획해서 발생하기도 하지만, 물리적 환경에 따라 발생 빈도가 달라진다는 데에 초점을 두고 출발한다. 주요 기법으로는 인적이 드문 공원이나 지하 주차장에 주민의 동의를 얻어 감시카메라 설치, 가로등을 밝은 LED등으로 교체, 놀이터 주변에 관찰이 가능하도록 주변의 장애물 제거, 거리를 밝은 색으로 도색하는 방안 등이 있다.

환경 디자인으로 범죄를 예방할 수 있을까?

계속 증가하는 강력범죄 사건들의 공통된 특징의 하나는 취약한 물리적 환경에서 범죄가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노후된 주거단지, 방치된 건물 사이의 이격공간, 인적이 드물고 어두운 골목길 등이 그런 곳인데, 방범용 CCTV를 설치하거나 순찰 인력을 강화해도 근본적인 범죄 예방 대책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새로운 대안의 하나로 셉테드가 주목을 받게 되었다. 예컨대 밤늦은 귀가길, 아무도 없는 어두운 골목길에 들어설 때 혹시 누군가 뒤따라오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종종걸음을 해본 적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때 가로등이 환하게 켜져 어 있거나 비상벨이 설치되어 있다면 불안감은 한결 줄어들 것이다.

이렇게 환경을 밝고 산뜻하게 만든다고 범죄를 예방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다’이다. 과학적으로, 범죄 발생 통계로도 검증된 사실이다. ‘디자인이 범죄를 예방하는 역할을 한다’는 셉테드 개념은 ‘우리 삶을 편안하게 해주고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던 디자인 영역에 새로운 인식을 더해주고 있다.

어두운 골목길에 조명을 설치하면 범죄 발생을 낮출 수 있다.
어두운 골목길에 조명을 설치하면 범죄 발생을 낮출 수 있다.

우리가 사는 공간의 셉테드 원리

감시, 접근통제, 영역성 강화 등으로 이뤄진 셉테드 기본 개념은 다음과 같이 5가지 원리에서 우리의 삶과 환경에 적용된다.

자연감시Natural Surveillance 시야를 가리는 방해요소를 없애고 감시가 되지 않는 사각지대를 줄이는 방법이다. 주위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눈이 CCTV보다 훨씬 강력한 감시라는 생각 아래 담장을 허물고 출입구를 개방시키며 야간에도 어둡지 않게 조명등을 사용한다.

담을 없애서 누구든 볼 수 있게 자연적 감시를 유도한 사례
담을 없애서 누구든 볼 수 있게 자연적 감시를 유도한 사례

접근통제Access Control 범죄예방에 가장 직접적이면서도 효과적인 전략이다. 출입구와 담장, 조명을 이용하여 공간을 분리하고 외부인과 부적절한 사람의 출입을 직접적으로 가로막는 설계를 활용한다.

영역성 강화Territorial Reinforcement 주민들의 공간에 대한 소속감을 높여 책임을 가지고 지역을 관리할 수 있게 하는 방법. 울타리, 조경, 표지판 등을 설치하여 ‘우리’라는 공감대와 소유권을 알려서 범죄 예정자가 범행을 포기하도록 유도하는 설계다.

유지 관리Maintenance and Management 지속적으로 안전한 환경을 유지하고 관리하여 범죄가 일어날 가능성을 낮추는 원리다. ‘깨진 유리창 이론’*에서도 알 수 있듯이 관리되지 않는 공간과 시설에서는 각종 범죄 행위가 증가될 수 있다. 따라서 공간과 시설에 적절한 정비와 유지 관리가 필요하다.

활용성 증대Activity Support 사람들이 공공장소나 시설을 활발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함으로써 잠재적 범죄 의도를 가진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차단하는 원리이다. 방치된 공간을 주민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개조하여 활용성과 편의성을 높여 주민 생활에 도움이 되게 한다.

깨끗하게 정돈된 환경이 삶의 질을 높인다

영국의 로레인 개먼 교수는 범죄 발생률을 낮추려면 ‘범죄자와 피해자의 행동을 바꿀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디자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영국에서 가장 흔하게 일어나는 자전거 절도를 예방하기 위해 ‘자전거 도난 방지 디자인’ 프로그램을 실시했고, 자전거 주차장 환경과 거치대를 새롭게 디자인함으로써 자전거 도난 사건 발생이 크게 줄어들었다.

깨끗한 환경에서 범죄가 줄어드는 것처럼 셉테드를 통하여 학교 폭력도 줄어들고 있다. 2016년 셉테드 시범학교로 지정된 도봉구 창동의 가인초등학교는 주변이 준공업 지역으로 공장이나 자동차 정비소들이 밀집되어 삭막한 환경이었으나, 셉테드를 적용해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 여러 가지 곤충들과 예쁜 꽃들을 그려 넣은 벽화 거리를 조성하였다.

낙후된 환경이 범죄를 부추킬 수 있다는 깨진 유리창 이론(*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s Theory 미국의 범죄 심리학자인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이 1982년에 발표했다.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해 두면 그 다음부터 ‘계속 해도 된다’는 생각이 자라나 훨씬 더 큰 피해를 조장한다는 내용이다. 1980년대 뉴욕 시에서 실제 사회 정책으로 반영한 사례가 있다. 범죄의 온상지인 지하철에 ‘그라피티graffiti’ 낙서를 깨끗이 지웠고, 이로 인해 2년 뒤엔 지하철 중범죄 건수가 눈에 띄게 감소하였다. 그 결과 뉴욕은 범죄 도시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이제 세계 최대의 관광도시가 되었다.)
낙후된 환경이 범죄를 부추킬 수 있다는 깨진 유리창 이론(*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s Theory 미국의 범죄 심리학자인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이 1982년에 발표했다.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해 두면 그 다음부터 ‘계속 해도 된다’는 생각이 자라나 훨씬 더 큰 피해를 조장한다는 내용이다. 1980년대 뉴욕 시에서 실제 사회 정책으로 반영한 사례가 있다. 범죄의 온상지인 지하철에 ‘그라피티graffiti’ 낙서를 깨끗이 지웠고, 이로 인해 2년 뒤엔 지하철 중범죄 건수가 눈에 띄게 감소하였다. 그 결과 뉴욕은 범죄 도시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이제 세계 최대의 관광도시가 되었다.)

그 이후 등하교 환경이 깨끗해지고 활기찬 느낌으로 바뀌었다. 학생들의 스트레스는 곧 학교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조성된 스트레스 프리존Stress Free Zone은 학생들의 스트레스를 곧바로 해소하여 학교 폭력을 예방하고 동시에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디자인 정책으로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셉테드가 범죄를 완벽하게 예방해주는 건 아니다.

우리 마음에도 셉테드가 필요하다

사람 마음에는 시시때때로 부정적인 생각들이 떠오른다.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알 수 없는 두려움, 그리고 서로의 마음을 정확히 몰라서 생기는 갖가지 오해들…. 하루에도 정리되지 않은 수많은 생각들이 떠오르는데, 방치하면 깨진 유리창 이론처럼 우리 마음도 그렇게 된다. 그런 부정적인 생각은 순식간에 마음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어느새 어두움으로 가득 자리를 잡는다. 급기야 다른 사람과 소통이 어렵게 되고 혼자 고립 상태에 빠진다.

학교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스트레스를 줄여주기 위해 설치된 암벽 타기.
학교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스트레스를 줄여주기 위해 설치된 암벽 타기.

나는 내 마음이 강한 줄 알고 살았다. 인생의 어느 선까지는 마음먹은 대로, 목표를 세우는 대로 이루어져서 내 마음이 약한지 강한지에 대해 관심조차 갖지 않고 살아도 가능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어려움을 만나면서 내 마음이 약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처음에는 약한 자신을 스스로 강하게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혼자 쌓은 담장 안에 있을 때에는 그 안이 가장 안전하고 나를 지켜줄 것 같았지만, 결국 그 담장 안에 갇혀 속에서 올라오는 여러 생각들을 이겨낼 수 없었다.

담장을 허물어 밝고 개방적인 공간을 만들듯이, 내 마음의 담장은 어떤 상태인지 체크해 보자.
담장을 허물어 밝고 개방적인 공간을 만들듯이, 내 마음의 담장은 어떤 상태인지 체크해 보자.

그후 인생의 멘토를 만나면서 내 마음을 스스로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강한 마음과 연결될 때 비로소 마음이 안전하게 지켜진다는 것을 경험했다. 이제는 내 마음이 아주 약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유리창처럼 쉽게 다치기 쉬운 마음을 관리하기 위해서 종종 마음에 셉테드를 적용해본다.

시야를 가로막는 높은 담장을 허물고 밝고 개방적인 환경을 만들면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이 자연적인 감시 효과를 발휘해서 범죄를 예방할 수 있듯이, 우리 마음의 담장도 허물어 지혜로운 사람들과 연결되어 소통한다면 서로 마음을 지켜주어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내 마음의 담장은 어떤 상태인지, 체크해 보자.

글쓴이 김연아

공간디자인에 흥미가 많아 대학과 대학원에서 실내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졸업 후 백화점 디자인실에서 다년간 실무경험을 쌓았다. 고등학교 교과서 및 저서 활동과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디자인의 본질인 아이덴티티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여 건축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대구경북 건축경관심의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마음의 공간 디자인과 청소년 교육을 위한 대안학교 링컨하우스대구의 교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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