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델루나’ ‘고백부부’ ‘프로듀사’ 촬영감독 박기현

1인의, 1인에 의한, 1인을 위한 방송이 익숙한 지금은 바야흐로 1인 미디어 전성시대이다. 이젠 누구나 혼자서도 콘텐츠를 제작하고 방송할 수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어딘가에선 수백 명이 수개월간 동고동락하며 최고의 영화,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들어 내고, 그걸 보기 위해 시사회 앞자리와 본방 사수의 열정 또한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어느 때보다 ‘영상 콘텐츠’에 대한 관심도가 높은 요즘, 엣지 있는 영상으로 사람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선사하고 있는 촬영감독 박기현을 만나 본다.

김포에 위치한 박기현 감독의 사무실로 향하는 길에, 기자는 그의 약력을 읽으며 잠시 이런 상상을 해보았다. 충무로에 있는 학교로 등교를 하던 한 중학생이 영화 촬영 현장을 기웃거린다. 어제는 주인공 배우가 보고 싶어 촬영장을 두리번거렸는데, 오늘은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영화감독의 카리스마가 멋져 보인다. 그때부턴 학교에 가도 머릿속은 온통 영화 생각뿐이다. 방과 후엔 차곡차곡 용돈을 모아 산 캠코더를 가지고 동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데….

그렇게 영화감독을 꿈꾸던 중학생이 어느덧 중견 촬영감독이 되었다. 박기현 감독은 지금까지 카메라 앵글을 통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사람을 만나왔을까.

어릴 적부터 영화감독을 꿈꾸셨다고요.

서울 명동과 충무로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래서 영화는 익숙한 동네 풍경 중 하나였죠. 자연스레 영화감독을 꿈꾸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19살 때, 영화 조명 감독이었던 친구 아버지 밑에서 일한 것이 영화 일의 시작이었어요. 추운 겨울에 밤샘 촬영을 해가며 한 작품을 다 끝내고나서 30만 원을 받을 때도 있었어요. 그땐 젊어서 그랬는지 꿈이 있어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즐거운 추억이 많았어요. 그렇게 6년 정도 영화 촬영 현장에서 전선을 깔고 조명 설치하는 일을 배웠고, 그후에는 영화 시나리오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아마추어가 쓴 시나리오를 가지고 영화로 만들려는 제작사는 드물잖아요. 생계를 위해 한동안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어렵게 지냈죠. 그래도 한번은 기적처럼 어느 제작사에서 제가 쓴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했어요. 촬영까지 잘 마쳤는데 제작사와 투자자 사이에 마찰이 생겨 개봉을 앞두고 브레이크가 걸렸고, 결국 세상에 나가 보지도 못한 채 사장되고 말았어요. 기대를 했던 만큼 충격도 컸죠.

그후 다른 영화사에 들어가서 조감독 일을 시작했어요. 하지만 그 길을 계속 가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어요. 그때 연출 일을 하면서 처음으로 월급을 받았는데 100만 원이었어요. 당시 저는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가장이었기에 돈 들어갈 곳은 많고 수입은 적어 생활비 대느라 카드빚만 차곡차곡 쌓여갔어요. 그 즈음에 촬영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죠.

왜 촬영을 선택한 건가요?

지금 생각해도 신기해요. 어느 날 아내가 갑자기 촬영 일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묻더라고요. 그때 제 나이가 서른이라 ‘어느 세월에 기술을 배우지?’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어요. 그래도 아내에게 알겠다고 대답하고, 알고 지내던 촬영감독님에게 전화를 걸어서 알바 자리를 물었어요. 월급을 160만 원 준다고 하더라고요. “오케이”를 외치며 바로 일하겠다고 했지요. 그때 했던 작품이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탐나는도다’라는 드라마였어요. 영화 일을 꽤 오래 했지만 촬영에 대해선 전혀 몰랐는데, 그 드라마를 촬영한 1년 동안 많은 걸 익히고 배웠어요.

주로 어떤 걸 배웠나요?

카메라 두 대로 촬영했는데, 제가 들어간 팀엔 선배들이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카메라 감독님의 직속 스탭이 됐죠. 하루는 감독님이 새 카메라를 가지고 오셔서, 이전에 쓰던 카메라와 새 카메라의 촬영 값을 같게 맞추는 일을 제가 해야 했어요. 어떻게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고 함께 일한 사람들은 대부분 실습 나온 대학생들이어서, 그 친구들과 네 명이 모여서 카메라를 붙들고 값을 맞추었어요. 해보고 또 해보고…. 그런데 카메라 두 대의 색 값을 완벽하게 같게 세팅했는데도 한 카메라는 좀 더 초록색을 띠고 다른 카메라는 좀 더 파란 색을 띠는 거예요. 그래서 초록색이나 파란색을 없애려고 수치들을 하나하나 더하고 빼보았어요. 그리고 그걸 일일이 적어서 표로 만들었죠.

지금 와서 돌아보면, USB에 정보를 담아 다른 노트북에 옮기는 것처럼 색상 값이 저장된 메모리카드를 새 카메라에 꽂기만 하면 될 일이었어요. 모르니까 ‘노가다’를 하며 몸이 고생을 한 거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카메라의 특성을 알게 되었어요. 제주도에서는 비가 오거나 흐린 날에는 촬영을 하지 못했어요. 그런 날에는 할 일이 없으니까 카메라를 계속 만졌어요. 형광등 아래서 촬영할 때는 어떤 색이 튀는지, 어떻게 하면 색이 제대로 나오는지, 편의점 불빛 아래에서는 어떤 값을 빼거나 넣으면 되는지 등등을 연구하고, 그 결과를 하나하나 적어두었죠. 사실 막내 스탭은 카메라를 만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제가 그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건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것이 다른 촬영장에서 빛을 발했죠.

어떻게 빛을 발했는지 궁금하네요.

한번은 다른 드라마 촬영장에 갔는데, 거기도 ‘탐나는도다’ 팀과 같은 기종의 카메라 두 대를 쓰고 있었어요. 그런데 카메라 한 대의 색이 너무 다른 거예요. 보통은 후작업에서 색을 바로잡지만 생방송이라서 난감한 상황이었어요. 누군가가 “그대로 갈게요!”라고 하는데, 저도 모르게 “잠깐만요!” 하고 소리친 뒤 적어두었던 표를 꺼내 보면서 색을 맞추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저를 신기하게 보더라고요. 그때는 왜 저를 그렇게 보는지 이해를 못 했죠. 그 현장에 있던 어떤 분이 저를 눈여겨보았고, 마산 MBC 단편 드라마의 촬영감독으로 추천해 주셨어요.

박기현 감독의 첫 작품 '누나의 3월'은 3·15 의거를 소재로 한 드라마다.
박기현 감독의 첫 작품 '누나의 3월'은 3·15 의거를 소재로 한 드라마다.

그렇게 찍은 첫 작품이 ‘누나의 3월’이라는 드라마였어요. 김민성 촬영감독님과 함께 작업했는데, 피디님도 교양국 소속으로 드라마는 처음이었고, 작가님과 스탭들도 다 드라마는 처음이었어요. 저도 초보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회의를 정말 많이 했어요. 재미있었던 건 무엇이든지 공식이 따로 없었다는 거예요. 저희들이 알고 있는 조명, 촬영 지식을 총동원해 느낌을 따라서 정말 하고 싶은 대로 찍었죠. 그런데 그 드라마가 상을 많이 받았어요. 그때부터 촬영이라는 일에 어떤 희열을 느끼기시작했죠.

감독님은 촬영할 때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지요.

제가 촬영할 때 후배들이 자주 이렇게 물어요. “형, 왜 이렇게 해요?” 제가 일반적인 촬영 방식과 다르게 촬영할 때가 있거든요. 제가 많이 알아서가 아니에요. 촬영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까 저는 고정된 틀이 없었어요. 그래서 무조건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생각보다 ‘어떻게 하면 더 좋게 나올까?’를 고민하고 괜찮은 방법을 선택해요. 신기한 건 그렇게 하면 재미있고, 결과가 좋을 때도 많아요.

예를 들어, 촬영할 때 보통 조명과 카메라를 세팅해 놓으면 배우들을 그 범위 안에서 움직이게 해요.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이지만, 배우들에게 ‘이 라인을 넘어가면 안 된다’고 말해요. 저는 잘 몰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왜 그래야 하지? 촬영팀이 좀 더 움직이면 되는 거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그래서 배우들에게 그거 신경쓰지 말고 자유롭게 연기하라고 말해요. 스탭들이 더 힘들 수 있지만 조금만 더 움직이면 배우들이 편안해져서, 연기가 더 자연스럽게 나와요.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게 일해요. 배우가 눈물을 흘리는 감정 신을 촬영하는 경우, 보통 역순으로 촬영을 해요. 눈물 흘리는 모습을 먼저 바스트 샷shot으로 가까이에서 찍은 후에 인물 전체가 나오게 풀 샷을 찍는 거죠. 그런데 저는 웬만하면 풀 샷부터 찍으려고 해요. 하다못해 리허설이라도 풀 샷부터 해요. 그렇게 하면 대본을 보지 못한 각 팀 막내들도 뭘 찍는지를 알고, 준비를 할 수 있거든요. 또 소품이나 의상, 조명이 달라서 생기는 NG도 줄일 수 있고요. 숲을 보고 나무를 그리는 식이죠.

2016년에 방영된 드라마 ‘W(더블유)’ 촬영 현장. 액션 신 촬영 직후, 배우들과 함께 모니터로 촬영 장면을 살피고 있다.
2016년에 방영된 드라마 ‘W(더블유)’ 촬영 현장. 액션 신 촬영 직후, 배우들과 함께 모니터로 촬영 장면을 살피고 있다.

그가 촬영하는 현장을 처음 본 사람들은 그의 촬영 방식이 참신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건 단순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다수가 말하는 익숙한 틀을 지키려고 애쓴다. 그래서 그곳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그 범위에서 벗어나면 틀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조명 일은 오래해서 아는 게 많지만 촬영하는 법은 전혀 몰랐다. 그렇기에 ‘이렇게 해야 한다’는 틀이 없어서 새로운 길을 갈 수 있었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촬영장에서 생각한다. ‘꼭 이렇게만 해야 하나?’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다른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하고 고민한다.

최근에는 어떤 작업을 하고 계신가요?

얼마 전에 다큐멘터리를 찍었어요. 한 목사님의 일생을 담는 내용이었는데 이 일을 하면서 아까 말한 ‘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일을 시작하기 전에 주인공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해서 교회에 다니는 주변 분에게 그 목사님에 대해 물었더니, 안 좋게 이야기를 했어요. 속으로 걱정을 했지요. 그런데 촬영이 시작되고 하루하루 지나면서, 목사님이 목회를 어떻게 시작했는지부터 그분의 삶이 하나하나 이해되었어요. 사람들이 목사님을 안 좋게 말하는 이유도 알았어요. 보통 교회에서는 우리가 죄가 있다고 말하는데, 그 목사님은 성경에서 예수님이 죄를 다 씻었으므로 우리에게 죄가 없다고 말하시는 거예요.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거죠. 이걸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기존의 틀 안에 있느냐, 그걸 깨트리느냐’의 차이겠지요. 제가 하는 촬영 일 외에 어느 분야든지 ‘틀’은 존재하잖아요. 그래서 목사님이 어떤 분인지 더 궁금해졌죠.

가장 최근에 촬영한 다큐멘터리 '삶의 미션'. 박옥수 목사의 일생을 담았다.
가장 최근에 촬영한 다큐멘터리 '삶의 미션'. 박옥수 목사의 일생을 담았다.

다큐멘터리 촬영을 마친 후, 제가 느낀 건 목사님이 정말 부지런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오셨다는 거였어요. 자기 일을 사랑하고, 평생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살아온 모습도 멋있었죠.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면서 재미있는 일들도 많았어요. 인터뷰 촬영을 할 때, 보통 시나리오의 흐름에 맞게 할 말을 미리 이야기해줘요.

그런데 브라질에서 오신 연출감독님은 촬영 당일 실시간으로 인터뷰를 진행했어요. 주인공 목사님에 대해 이야기할 수십 명의 인물을 인터뷰했는데, 하나같이 질박하면서도 꾸밈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들으며 크게 웃기도 하고, 감동하기도 했어요. 그러다 정말 좋은 인터뷰 인물들을 만날 때면 ‘이 내용도 다큐멘터리로 만들면 안 되나?’라는 생각도 했죠.

제 직업이 사람을 찍는 거잖아요. 많은 사람들을 보고 만나왔는데, 이번 다큐멘터리를 찍으며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더 기뻤어요. 사람들의 좋은 이야기를 영상에 좀 더 잘 담고 싶은 욕심도 나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날은 계약에도 없던 카메라 두 대를 더 가지고 가서 촬영을 했어요.

감독님의 삶은 어떤지요. 독특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는지요.

특별한 건 아니지만, 돈을 쓰는 방식이 조금 다른 것 같아요. 함께 일하는 후배들과 수입을 나눌 때, 제가 좀 덜 가져가더라도 후배들 월급은 제대로 챙겨줘요. 제가 착해서가 아니라, 저는 그게 제가 잘되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카메라도 되도록 후배들이 직접 만지게 해주고, 다양한 경험을 쌓도록 최대한 도와줘요.

가정적으로는 돈이 있든지 없든지 아이들과 여행을 자주 다녀요. 제 직업 특성상 작업하지 않을 땐 오래 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아이들이 “여기 가보고 싶어요” 하면 무조건 가요. 아이들이 이곳저곳 직접 다니면서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해요. 그 덕분인지, 제가 가르친 적도 없는데 사람들에게 먼저 가서 인사하고, 문을 열어주는 등 배려하는 법을 배웠어요.

박기현 감독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즐겁다, 재미있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늘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비결이 궁금했는데 인터뷰를 마친 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촬영 교본에 맞춰 찍으려고 애쓰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촬영에 대한 모든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두었고, 실제로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즐거움을 알고 있었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며, <데미안>의 한 대목이 생각났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 이 순간에도 더 좋은 장면을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어제와는 또 다른 촬영법을 시도하고 있을 박기현 감독. 오늘은 어제보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크고 새로운 세계로 걸어갈 그의 행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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