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탈옥수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신창원은 어린 시절 매우 가난하고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간암으로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재혼을 했으나, 새엄마는 동생이 아무리 아파도 모르는 척했다. 이에 화가 난 신창원은 새엄마에게 부엌칼을 들이대며 오늘 안에 집을 나가라고 협박했다. 계모는 그날로 집을 나갔고, 신창원은 아버지한테 죽도록 얻어맞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에는 서울로 도망을 왔다가 가출 소년으로 잡히기도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가난한 집안 사정 등으로 친구들의 따돌림을 받고 담임선생에게 야단맞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결국 학교를 포기했다. 중학교를 중퇴한 신창원은 1982년 2월 절도죄로 김제경찰서에 붙잡혔는데 경찰이 훈방조치하자 그의 아버지가 버르장머리를 고친다고 아들을 다시 끌고 가서 “소년원에 보내 달라”고 사정했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인해 신창원은 본격적으로 반항적인 인생을 살게 된다. 소년원에서 풀려난 그는 다음 해에 상경해서 음식점 배달원 등으로 전전하며 절도를 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수감 생활을 하던 중 그는 탈옥하게 된다. 훔친 거액의 돈으로 선심을 쓰고, 자신의 일기장을 통해 ‘부잣집만 털고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는 신화를 만들어내며 ‘성공한 탈옥수’를 꿈꾼 신창원. 그는 한 시민의 제보를 받고 출동한 경찰의 제압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일러스트=김현정)
(일러스트=김현정)

그때부터 그의 마음속에 악마가 생겼다

그가 쓴 책 <신창원 907일의 고백>에 의하면, 초등학교 5학년 때 선생님의 말 한마디로 인해 범죄자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지금 나를 잡으려고 군대까지 동원하고 엄청난 돈을 쓰는데 나 같은 놈이 태어나지 않는 방법이 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너 착한 놈이다’ 하고 머리 한 번만 쓸어 주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5학년 때 선생님이 ‘이 새끼야, 돈 안 가져왔는데 뭐 하러 학교 와, 빨리 꺼져’ 하고 소리쳤는데 그때부터 마음속에 악마가 생겼다.”

신창원은 후에 ‘사회에서 문제아로 치부해 버린 아이들은 정에 굶주린 불쌍한 애들’이라며 사회의 관심을 당부하기도 했다.

“가까이 가서 꾸짖으면 그들이 폭행을 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그들이 마음의 문을 열면 의외로 여린 순수함을 가지고 있어서 다들 놀라게 될 것이다. 그들은 별종이 아니다. … 나 같은 범죄자가 다시는 없도록, 사회와 가정에서 문제아에게 사랑을 주길 바란다.”

선생님이 던진 말이 어린 신창원의 마음에 큰 상처가 되었고, 심한 굴욕감과 반항심을 갖게 만들었다. 살에 난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고 새 살이 돋아나 깨끗해질 수 있지만, 가슴의 상처는 오래도록 아물지 않고 아픔을 주는 경우가 많다. 사실 신창원만 그런 게 아니라 누구나 이런 처우를 받으면 마음속의 악마가 우리 안에서 뛰쳐나올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내 옳은 말로 아들의 방황을 잠재울 수 없었다

내 아들은 고등학교 때 다른 도시로 전학을 갔다. 교직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길을 걷는 아버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아들은 많이 어려워했다. ‘아버지가 그냥 학교 선생님으로 계시면 우리가 이렇게 고생 안 해도 될 텐데 왜 아버지가 갑자기 인생의 길을 바꾸어 우리를 이렇게 고생시키나?’ 하는 불만 때문에 방황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들에게 이야기했다.

“아들아, 우리나라가 일본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의 국권을 빼앗고, 왕궁에 쳐들어와 황후까지 살해하고 석유를 뿌려 불태우고는 연못에 던지는 만행을 저질렀어. 또 우리나라 국민들의 재산을 빼앗아 가고 자기 나라 전쟁에 우리나라 사람들을 잡아가서 전쟁터에서 죽게 했어. 심지어 나라말과 글까지 못 쓰게 막고 독립투사들을 죽였지.

그때 우리나라를 일본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애국지사들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만주와 상해로 다니면서 독립운동을 하느라 가족을 돌볼 겨를이 없었어. 그분들의 자식들은 학교도 못 다니고 거지처럼 고생해야 했어. 그런 분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 어떻게 되었겠니? 그런 분들이 존경받아야겠니, 비난받아야겠니?”

“존경받아야 하죠.”

“나는 죄악과 고통 속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소망과 기쁨을 주는 일을 하고 있어. 아빠의 강연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절망과 어둠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변하는 걸 너도 보았잖아? 네가 좀 어렵더라도 독립군 아들이라고 생각해라.”

그러나 어린 아들은 여전히 불만이 많았고 공부에는 마음이 없었다.

“그래도 제 친구들은 전부 메이커 옷과 메이커 신발을 신고 다니는데, 저는 맨날 이렇게 사는 게 싫어요.”

내 옳은 말과 훈계로도 아들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바뀌어야 하는데, 그 마음을 굴복시키는 일은 내 역량으로는 불가능했다. 방법이 없었다. 세상에 몸의 병을 고치는 좋은 약이 그렇게 많고, 약국도 많고 약사도 많은데, 병든 마음을 고치는 약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날 이후 아들은 선생님에 대해 마음을 닫았다

아들이 어느 날 영어 수업을 할 때였다고 한다. 영어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칠판에 ‘house’라고 쓰고 “자 이거 읽을 줄 아는 사람?” 하시는데, 손을 드는 친구가 없었다. 아무도 손을 안 드니까 아들이 용기를 내어 손을 들었다.

“어, 그래. 한번 읽어봐라.”

“호~세”

그러자 선생님은 “야, 이 자식아, 이게 하우스이지 호~세냐? 너는 마우스도 모세라고 읽냐, 이 멍청한 자식아?”라고 하시면서 창피를 주셨고, 친구들이 다 웃었다. 고등학생이 ‘house’라는 단어도 못 읽어 할 말은 없었지만, 아들은 그 순간이 너무 부끄러웠고 모욕감을 느꼈다.

그때부터 영어 선생님에 대해 마음을 닫고 영어는 아예 안 배우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러면서 점점 더 반항아로 변해갔다. 나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아들을 때려도 보고 애원도 해보고, 아들의 마음을 열어 보려고 별별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은 열 길이 없었다.

나는 너무 고통스러워 아들 앞에서 울기도 하고, “너 때문에 창피해서 못 살겠다. 너 보는 데서 아빠가 죽겠다”고 자살 소동을 벌이며 아들의 마음을 돌이켜 보려고 했다. 그러나 아들의 마음은 단단한 바위였다. 내가 볼 때 아들이 저렇게 살다가는 아무래도 교도소 아니면 정신병원 두 군데밖에는 갈 곳이 없을 것 같았다.

도덕적 훈계가 아닌 마음으로 다가가는 분을 만나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한참 거친 야생마처럼 야성野性이 동하면 감당이 안 되었고 아들의 장래를 생각할 때 너무 고통스럽고 마음이 무거웠다.

아들은 오랫동안 내 마음을 짓누르는 납덩어리 같았다.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했지만, 내게는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몹시 고통스럽고 부끄럽기도 했다.

그때 나는 청소년 문제 해결의 권위자에게 아들 문제를 맡기고 싶었다. 그 분야에서는 최고의 전문가로 정평이 나 있는 분이 내가 존경하는 목사님이었다. 그분은 “이래라, 저래라”하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 안에서 작동하는 힘의 원리와, 마음을 지배하는 생각의 근원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서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청소년들을 변화시켜왔다. 교육 이론이나 도덕적 훈계가 아니라, 마음으로 다가가 문제 학생들이 새롭게 살도록 이끌어주는 그분은 바쁜 가운데도 기꺼이 아들을 만나주셨다.

모든 사람들이 내 아들을 보고 “너는 인간 안 돼, 이놈아. 너 같은 놈은 말이 필요 없고 많이 맞아야 돼”라고 말했다. 아들 자신도 ‘나는 왜 이럴까? 나 같은 놈은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는데, 그분은 “너도 변할 수 있어, 네가 변화되면 앞으로 전 세계를 다니면서 지금의 너 같은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놀라운 일을 하게 될 거야”라고 하면서 계속 믿음과 소망을 마음에 불어넣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다.

신창원의 아버지도 자식을 잘 키우고 싶었을 것이고, 나도 자식을 잘 키우고 싶었다. 자식 사랑하는 부모 마음은 다 같고, 자식 잘 키우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잘 키우고 싶다고 잘 키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자식의 마음을 이끌 수 있는 능력과 지혜가 없으니까 신창원의 아버지도 자식 농사를 실패했고, 나도 실패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아들도 그냥 내버려두면 또 다른 신창원이 되는 길에 있었다.

신창원이 빗나가기 시작했을 때 그의 아버지와 주변 사람들이 해줄 수 있는 방법은 격리와 통제였다. 그러나 신창원은 교도소 안에서 마음이 새로워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능적인 범죄 수법을 배우고 더 큰 죄를 짓게 되었다.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는 없었다. 그의 몸을 감옥에 가두어 둘 수 있었지만 마음의 교정이나 교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그런 아이들이 변하는 경우를 보았다. 마약이나 게임, 음란이나 폭력적인 삶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이게 아닌데,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고 괴로워하면서도 그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격리와 통제가 아닌 새로운 방법으로 그런 삶에서 완전히 벗어나 밝고 깨끗한 삶을 사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지혜로운 자와 연결시키는 것이 지혜다

나는 한번씩 생각해 본다. ‘신창원의 아버지와 나는 무엇이 달랐지?’ 그건 아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의 한 가지 차이였다. 내 아들을 맡은 목사님은 사람을 다루는 당신의 철학을 ‘필요할 땐 꾸짖기도 하지만 마음으로 뜨겁게 끌어안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분은 고산 윤선도의 증손이며 다산 정약용의 외조부였던 윤두서의 시조를 종종 즐겨 외우셨다.

옥에 흙이 묻어 길가에 버렸으니

오는 이 가는 이 다 흙이라 하는고야

두어라 알 이 있을 것이니 흙인 듯이 있거라

그분이 사람을 어떻게 보고 대하는지를 이 시조가 단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흙이 묻은 옥을 흙처럼 보는 사람이 있고, 흙만 털어주고 닦아내면 되는 귀한 옥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 그 목사님은 누구를 보든지 ‘저 사람은 흙만 조금 털어주면 귀한 옥인데, 그것만 깨우쳐 주면 되는데’라는 눈으로 보셨다.

많은 사람들은 옥마저도 흙으로 본다. 나 역시 그런 눈으로 세상을 나 자신을 보았고, 아들도 ‘저놈은 저 흙 때문에 안 돼’ 하는 눈으로 보았다. 아들은 허물투성이인 자신을 옥으로 대해주면서 흙을 닦아내준 그 목사님의 지극한 마음을 느끼면서 자연스럽게 마음이 옥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자존심밖에 없던 아들이 자존감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면서 아들은 신기하게 달라졌다. 그분도 너무 기뻐하셨고, 나는 평생 갚을 수 없는 은혜의 빚을 지게 되었다.

지금 내 아들은 가장 열악한 나라 중 하나인 아이티에서 지난날의 자신 같은 청소년들 마음속에 ‘나도 변할 수 있구나. 나도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구나’ 하는 소망을 불어넣고 있다. 그런 삶이 자신이 받은 사랑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 일로 알고 있다. 아들이 가끔씩 페이스북에 행복하고 감사하다는 글을 올리는데 그것을 읽다 보면 내가 행복해진다. 깊은 사랑이 무쇠 같던 아들의 마음을 녹였고, 참된 지혜가 원석 같던 아들의 인생을 보석 같은 삶으로 바꿔주었다.

어떤 사람의 말은 인생을 파괴시키기도 하지만, 남다른 혜안과 예지叡智를 가진 분의 말은 망가진 인생을 아름답게 바꾸어 놓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말로 상처를 주고, 어떤 사람은 말로 상처를 아물게 한다. 상처와 고통으로 얼룩진 아들의 마음에 새 살이 새록새록 돋아나게 해준 목사님의 사랑 덕분에, 어두웠던 날들의 흉터가 깨끗이 아물고 많은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며 보람 있게 사는 지금의 아들이 있다.

글쓴이 이한규

고향이 경북 성주인 그는 유교적이고 보수적인 집안에서 성장했다. 사범대학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한 뒤, 교단에서 여러 해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경험들을 토대로 이 시대에 필요한 교육 철학과 부모의 역할에 대하여 꾸준히 글을 써 오고 있다. 전국 대안학교 총연합회 서울시 지부장을 지냈고, 최근에는 청소년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교육 특강 및 개인 상담을 온라인으로 하고 있다. 본지 외에 신문에도 칼럼을 연재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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