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이사를 했다. 25년 살던 집을 팔고 새로운 동네로 옮기려니 가진 돈이 부족했다. 전세를 찾고 있는데 누군가 주택 담보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은행에 찾아가 글씨가 깨알 같은 대출거래 약정서를 읽고 사인을 여러 번 하고 나서야 대출금이 나왔다. 그리고 매달 15일이면 통장에서 어김없이 이자가 빠져나간다. 나는 그 날짜에 은행 잔고를 맞추려고 달력에 동그라미 표시까지 해둔다.

은행은 집의 부동산 가치를 보고 몫돈을 내준 것이지, 내 이름만으로는 만원한 장 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은행 빚은 경제 원리에 입각한 물리적 부채라서,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연체료를 물어야 하고 그것이 반복되면 담보물을 넘겨야 한다. 대출로 모자란 집값을 보탤 수는 있었지만, 그 일로 인해 은행 앞을 지날 때마다 내 마음에 감사가 솟구치진 않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은행 빚만 지고 있을까?’ 담보도 없이, 어떤 대가도 없이 내가 받은 것들이 얼마나 될까? 어떤 빚은 되갚아야 할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갚을 수도 없고 독촉도 하지 않는 사랑, 포용, 위로, 용서, 호의와 같은 것들이다. 이런 빚을 나는 감사의 빚이라고 부르고 싶다. 하지만 감사를 베푼 모든 분들을 생생히 기억하진 못한다. 망각의 커튼을 들췄을 때야 ‘아, 그때 그런 도움을 받았지’ 하면서 뒤늦게 고맙고, 반가운 얼굴들이 휘저은 식혜 밥처럼 동동 떠오른다. ‘그래, 내가 여기 있음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가능한 것이었구나!’

감사의 빚은 내 마음속에 박제剝製로 서 있지 않고, 내가 거저 받은 것들을 남들에게도 전하라고 용기를 준다.

다시 곰곰이 생각해본다. 스스로의 어리석은 결정에 화가 나거나 잘했다는 뿌듯함에 휩싸일 때는 있어도, 내가 나 자신에게 감사했던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감사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고, 감사를 일으키는 동인動因 역시 내면이 아닌 외부로부터 온다. 따라서 감사를 표현할 대상 역시 내가 아닌 그 누군가이다. 그런데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감사를 간과해 버리기 십상이다. 영어의 Think(생각하다)와 Thank(감사하다)가 같은 어원에서 파생되었듯이, 사고思考의 터널을 지나야 감사의 세계가 명확히 보이는 법이다.

12월이면 늘 따라붙던 ‘다사다난’이란 수식어가 올해엔 코로나19로 더 실감나게 다가온다. 지난 시간을 돌아볼 연말에, 감사한 분, 감사한 일들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고마웠던 사람을 떠올리며 편지를 써보자. 마음에 감사의 빚이 많은 사람은 행복할 조건이 많은 사람이다.

글=조현주 발행인‧편집인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