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화가의 길을 걷다

모네는 1840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이나 친구들이 그가 그린 그림을 사려고 할 정도로 그림 실력이 뛰어났던 그는 18세가 되자 아버지의 반대를 뒤로하고 무명 화가였던 고모의 집으로 가서 그림 수업을 받았다. 그 후 빛으로 색을 표현하는 풍경화가 외젠 부댕의 영향을 받아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자연과 빛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졌다.

1859년 봄, 파리의 사립 예술학교 ‘아카데미 쉬스’에 입학한 그는 젊은 예술가 그룹에 가입해 예술과 문학 공부에 매진한다. 1860년에는 군대에 소집되었고, 제대 후 파리로 간 그는 유명한 역사화가인 샤를 글레르의 화실에 들어가 오귀스트 르누아르, 알프레드 시슬레 등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들과 함께 그림을 배운다. 그는 1864년에 화실을 나와 노르망디에 머무르면서 지역의 풍경을 그렸다. 이때 그렸던 작품 2점을 모네가 파리의 살롱전에 출품해 호평을 받는다.

모네의 아내였던 카미유가 작품의 모델로 등장한<초록 드레스를 입은 여인>
모네의 아내였던 카미유가 작품의 모델로 등장한<초록 드레스를 입은 여인>

1865년에 샤이 지방으로 옮겨간 모네는 <초록 드레스를 입은 여인>을 그린다. 이 작품은 그의 그림들을 혹평했던 비평가들로부터도 찬사를 받아 냈으며, 이 작품의 모델이었던 카미유와 결혼하고 아들 장을 낳는다. 하지만 그는 서 프랑스의 여러 지역을 오가며 그림을 그렸다.

새로운 도전을 하다

1870년에 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모네는 가족들과 함께 영국 런던 으로 피한다. 그는 영국에서 영국의 풍경화가인 존 컨스터블과 윌리엄 터너의 영향을 받아 빛과 색의 표현을 배운다. 모네는 말하길,

“나에게는 풍경이 풍경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빛이 풍경을 매 순간마다 바꾸기 때문이다. 그래서 풍경은 계속해서 바뀌는 주위의 분위기와 공기, 빛에 의해서 다시 살아난다”라고 하였다.

1874년에 모네는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과 함께 전시회를 열어 9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1873년 아르장퇴유에서 그린 <아르장퇴유의 양귀비 들판>과 <카퓌신 대로>도 출품했는데, 이 작품들에서는 사람이 마치 바람에 나부끼는 것과 같이 가볍게 붓터치를 하여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인물을 묘사했다. 하지만 첫 인상주의 전시는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 못했고, 이에 다른 화가들은 화풍을 바꾸었지만 모네만은 계속해서 인상주의 화풍을 고수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876년 4월에 열린 2회 인상파 전시회에서 모네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언론도 그의 재능에 호의를 표했다.

빛에 의해 변화하는 풍경을 그린 <생 라자르 역>
빛에 의해 변화하는 풍경을 그린 <생 라자르 역>

그가 1877년에 그린 <파리의 생 라자르 역>에서는 기차 위로 연기처럼 솟아오르는 증기와 유리를 통해서 증기의 소용돌이가 비치는 빛의 효과를 표현했다. 그는 이 찰나를 포착하기 위해 길가나 건물 안에 이젤을 놓고 기차역을 주의 깊게 탐색하며 12점의 <생 라자르 역>을 완성했다. 이 중 7점을 1877년에 열린 3회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해, 같은 주제로 여러 작품을 구성하는 새로운 방식을 선보였다. 이 전시에서 40여 편의 기사가 다뤄질 정도로 인정을 받았지만 모네는 여전히 생활고를 해결하지 못해 1878년에 가족들과 파리로 떠난다.

그곳에서 딸 미셀을 낳았지만 산모와 아기의 병원비조차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다시 베퇴유로 이사한다. 베퇴유에서 모네는 그를 후원하던 에르네스 오슈데 가족과 함께 살며 도시의 혼잡함을 벗어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작업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잠깐의 평화로운 시절을 보내고 둘째 아이를 출산한 뒤 극도로 몸이 약해진 그의 아내는 1879년에 세상을 떠난다.

그 후로 1880년까지 그린 그의 작품에는 아내의 죽음을 맞이한 슬픔이 담겨 있다. 그가 센 강의 얼어붙은 모습을 화폭에 담은 <베퇴유 근처의 해빙>은 이전에 그린 겨울의 풍경화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이 그림에는 겨울이 주는 창백함과 정적과 황량함을 보여주는데, 이는 당시 그가 겪었던 가난과 아내를 잃은 슬픔을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모네는 이 시기에 혼자 어려움을 이겨내며 작업에 몰두한 덕분에 다른 인상주의 화가와는 차이가 있는 인상주의 화풍을 발전시킨다. 그 전까지 그는 풍경화에 나오는 인물을 사물에 빗대어 표현했다면 이 시간을 통해 그의 주관적 경험을 더하는 방식을 작품에 반영하게 된다.

지칠 줄 모르는 그림에 대한 열정

1883년 모네는 시골 마을 지베르니로 가서 가족들과 그곳에 정착하여 산다. 그는 그곳에서 <건초더미> 연작을 그리고, 그 그림들과 풍경화 7점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건초더미> 연작에서는 계절감과 아침해가 뜨기 시작할 무렵부터 질 때까지의 빛과 분위기의 변화를 포착했다. 그는 찰나의 인상을 화폭에 담았으며 눈이나 서리에 덮인 건초더미나 안개 속의 건초더미를 그렸다.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은 그의 작업 시간이 말해준다. 그는 루앙 대성당을 주제로 아침 8시부터 오후 6시 무렵까지 하루에 10시간씩 작업했다. 하루에 열두 개까지 캔버스를 바꿔가며 그림을 그렸다. 성당의 서쪽 정면이 빛에 의해 밝은 면과 그림자가 시시각각 달라지는 순간을 화폭에 옮겼다. 그의 작품으로 본 루앙 대성당의 모습은 빛의 강렬함과 따뜻함이 엿보이고, 빛의 변화에 의한 서로 다른 색채가 주는 분위기의 대조가 돋보인다. 그는 회색, 흰색, 무지개 색, 파랑색, 이 네 가지 색이 주를 이루는 각기 다른 색채의 그림을 완성시켰다.

모네는 자신의 집에 정원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이내 그는 아름답고 다양한 종류의 꽃이 피는 풍성한 정원을 만들었다. 1900년 11월부터는 정원의 수련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아내와 아들, 친구를 잃은 슬픔을 이겨내고 8미터에 이르는 <수련>을 완성한다. 프랑스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작품을 볼 수 있다.

아내와 아들, 친구를 잃은 슬픔을 이겨내고 8미터에 이르는 <수련>을 완성한다. 프랑스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작품을 볼 수 있다.
아내와 아들, 친구를 잃은 슬픔을 이겨내고 8미터에 이르는 <수련>을 완성한다. 프랑스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작품을 볼 수 있다.

이 작품들은 뉴욕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1901년에는 땅을 더 사서 연못을 넓혔고, 1909년 ‘연꽃, 물, 풍경’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으며 대중들에게 알려져 갔다.

시련을 넘어서다

1908년 모네는 양쪽 눈이 백내장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그는 시력 장애를 앓으면서 작품 활동을 계속해 색채를 정확히 알 수 없어서 이전처럼 빛의 효과를 나타낼 수 없었다. 처음에는 낙담했으나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상상력이 깃든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뜬다. 아내와 그의 아들 장, 그리고 오랜 친구 르누아르가 세상을 떠난 뒤 한 동안 시련에 빠져 있던 모네는 다시 수련 장식화 그림으로 작품에 몰두한다. 그는 이때부터 무려 8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그림을 10점 이상 완성했다. 마치 커다란 연못가에 둘러싸여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며 다채로운 색의 효과가 두드러지는 그의 작품은 그가 위대한 화가임을 알려준다.

모네가 하루에 10시간씩 작업해 그린 <일몰의 루앙 대성당 외관>
모네가 하루에 10시간씩 작업해 그린 <일몰의 루앙 대성당 외관>

모네는 끊임없이 사고하고 도전하는 화가였다. 인상주의의 선구자가 되었고, 가난, 아내의 죽음, 백내장과 같은 고난이 있었음에도 시련에 굴복하지 않고 그림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었다. 빛에 의해서 바뀌는 풍경을 재현하려는 화가로서의 소신을 지키려는 굳센 마음이 그의 나이 여든이 되어서까지 경이로운 작품세계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오늘 자신의 꿈을 찾고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인생의 한 부분에서라도 모네처럼 소신을 가지고 발걸음을 내디디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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