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 미하엘 슈바르칭어Michael Schwarzinger

올해로 34년 외교관 생활에 마침표를 찍는 슈바르칭어 대사. 아프리카와 유럽 각국을 무대로 활동하며 유럽연합의 발전과 테러 방지대책 마련을 위해 노력해 왔다.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된 깊은 마음의 세계 때문일까? 국제무대에서 일하기를 꿈꾸는 청춘들을 향한 그의 조언 한마디 한마디에는 힘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 미하엘 슈바르칭어입니다. 2020년이 밝았습니다. 새해를 맞아 여러분 마음에도 이루고 싶은 갖가지 꿈과 희망, 기대가 있을 줄 압니다. 물론 저 역시 ‘새해에는 어떤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기대가 크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움도 큽니다. 만 65세가 되어 공직에서 은퇴할 시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날마다 새롭게 바뀔 만큼 역동적이고 아름다운 나라, 한국에서 외교관 생활을 마무리하는 것을 큰 기쁨이자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에서 독일어와 영어를 전공했고, 이후 영국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다 1986년 외교부 시험에 합격하면서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니 ‘사람 인생은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다’는 생각도 새삼 듭니다. 적지 않은 세월 동안 국제무대에서 일하면서 터득한, 제 나름의 철학과 외교관에게 필요한 마음자세를 여러분께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낯선 것’과 접촉할 때 변화하고 발전한다

제가 외교관의 꿈을 품은 것은 1978년부터 영국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였습니다. 낯선 나라에서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 역사를 배우고 그 나라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삶이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그러면서 자연히 ‘무작정 이 나라에 사는 것보다 이왕이면 이 나라, 이 나라 사람들에게 뭔가 유익한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일을 직업적으로 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외교부 시험에 응시했고, 합격해 문화영사과에서 근무하면서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코트디부아르, 스위스, 루마니아, 벨기에, 리투아니아, 몰도바, 몰타 등의 나라에서 근무했습니다. 제게는 하나같이 잊을 수 없는, 흥미롭고 아름다운 나라들입니다. 한 나라마다 평균 3~4년씩 근무하는 동안 그 나라 문화와 역사를 배우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 나라의 내면까지 살피는 깊은 사고력과 통찰력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것들을 체험하면서 견문도 많이 넓어졌지요.

원래 제 고향은 오스트리아의 ‘펠트키르히’라는 작은 도시입니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인스브루크’라는 비교적 큰 도시에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소도시에서 살던 제게는 대도시에서 보고 듣고 겪는 모든 것이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낯선 것과 만나는 재미, 그 과정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성장하는 즐거움…. 어쩌면 그때부터 제 내면에 숨어 있던 ‘외교관의 꿈’이 싹을 틔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람을 키우는 것은 성공이 아닌 실패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실패, 즉 실망스럽거나 좌절할 만한 일을 겪습니다. 일상생활은 물론 자신의 직업분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실패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했을 때 ‘내가 왜 이렇게 실패했지?’하고 갈등하고 고민하기보다 먼저 ‘이 실패를 어떻게 수습하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위기상황을 빨리 극복할 수 있고 실패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대하는 자세는 여러분의 일하는 태도, 나아가 성품에 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또한 여러분이 여러분의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쉬운 일만 하기보다는 복잡하고 힘든 일을 해봐야 하고, 편한 길만 좇기보다는 가보지 않은 길을 가봐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경험이 쌓이고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입니다. 저는 1992년부터 4년 동안 루마니아의 오스트리아 대사관에서 참사관으로 근무했습니다. 그전까지 일했던 스위스에 비하면 업무량이 많지 않았지만, 생활환경은 여러 모로 열악했습니다. 루마니아는 막 공산국가에서 벗어나 한창 발전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루마니아의 거리는 스위스의 아름답고 잘 정비된 거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고, 저희 가족이 살아야 할 집이나 아이들이 다닐 학교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난해 11월, 안산올림픽기념관에서 열린 세계의상페스티벌에 참석한 슈바르칭어 대사 내외.
지난해 11월, 안산올림픽기념관에서 열린 세계의상페스티벌에 참석한 슈바르칭어 대사 내외.

처음에는 ‘하루빨리 다른 나라로 발령이 났으면…’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살다보니 스위스에 있을 때는 알지 못했던, 소박하고 친절한 루마니아 사람들의 마음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가치관 또한 ‘외교관은 어딜 가든 조국을 위해 일한다. 어려운 나라에서 근무할수록 조국을 위해 일하는 보람도 더 크다’로 바뀌었습니다. ‘외형적으로 부족하고, 물질적으로 가난할 때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그때 알았습니다.

저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신참 외교관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신분은 외교관이었지만, 외교관이 뭘 해야 할지 배워야 하는 견습생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배움에 있어 직접 부딪히는 것 외에 다른 지름길은 없다’고 생각하며 시키지 않는 일도 나서서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쉬움이 남는 실수나 실패도 많았지만, 그래서 그만큼 더 빨리 성장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경을 이기는 건 사람을 향한 사랑이다

영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외교부 시험을 준비할 때도 열심히 공부했지만, 외교관이 된 뒤에도 제 공부는 계속되었습니다. 외교관으로서 조국과 주재국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려면, 주재국의 정치, 경제, 역사, 문화 등 모든 분야에 대한 이해가 필수조건이기 때문입니다. 가능한 한 다양하고 객관적인 자료를 모아 그 나라의 미래나 발전가능성을 예측해봅니다.

지난 34년 간의 외교관 생활 중 가장 잊지 못할 시절이라면 1997~2001년 벨기에에 본부를 둔 유럽연합EU 확장과에서 근무하던 때를 꼽고 싶습니다. 당시는 새로운 유럽 국가들, 특히 과거 공산국가였던 동유럽 국가들이 유럽연합 가입을 희망하는 시기였습니다.

나라와 나라가 합쳐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동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에 재정적인 지원이 절실했습니다. 수십억 유로, 한국 돈으로 수조 원이나 되는 자금이 신규 가입국의 산업과 농업을 살리기 위해 투입되었습니다. 그 돈은 모든 EU 회원국들이 부담한 귀한 돈이었고,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지출되어야 했습니다. 또한 EU 회원국들 사이에는 정부의 간섭과 규제가 최소화되는, 자유무역이 이뤄집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기존 회원국들에 비하면 동유럽 국가들은 오랫동안 공산주의와 계획경제 체제 하에서 살았기 때문에 산업구조가 취약하고 기업들의 경쟁력도 약했습니다.

동유럽 국가들의 경제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하려면 기존 회원국들의 희생과 배려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저와 동료 외교관들은 최선의 해결책을 찾느라 방대한 양의 서류를 검토하고, 관련법규와 예산안을 늘 재정비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힘든 와중에도 보람과 의욕으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단 한 가지, ‘내가 하는 일이 수천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삶을 좌우하고, 나아가 새롭게 EU에 가입할 국가들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새로운 나라들이 성공적으로 EU에 가입하면 유럽이 경제적, 문화적으로 크게 부흥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사람을 향한 사랑과 나라를 향한 애정, 그것이 제가 어려울 때마다 힘을 낼 수있었던 원동력이 아닌가 합니다.

멀리 보고 생각하라, 최악의 상황까지

저는 한때 EU에서 테러에 대처하고 재발방지책을 마련하는 업무를 맡기도 했습니다. 유럽은 여러분의 상상 이상으로 테러가 자주 발생합니다. 특히 EU의 본부가 있어 ‘유럽의 심장’으로 불리는 벨기에나, 다양한 국적과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몰리는 프랑스가 그렇습니다.

나라 간의 우호와 교류를 증진하는 것 못지않게,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 또한 외교관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입니다. 훌륭한 외교관이 되기 위한 요건 중 하나가 ‘생각하는 훈련’이라고 봅니다. 평소에도 ‘내년 이맘 때면 국제사회가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이런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거나 변화가 일어나면 외교관계에는 무슨 새로운 일이 생길까? 항공기 추락 같은 큰 참사가 발생하면 어떻게 대처하지?’ 등등 다양한 상황을 머릿속에 설정하고 이에 대처할 방안을 마련해 두어야 합니다. 멀리,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가급적 멀리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제가 생각하는 외교란, 나라와 나라가 마주 앉아 서로 평화롭게 살도록 협력을 도모하는 일입니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나라는 저마다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기 마련이며, 그러다 보면 다른 나라의 이익과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A와 B 두 나라가, 서로 자국의 이익을 위해 상대국이 수출한 상품에 무역관세를 많이 물리는 등 적대시하면 어떻게 될까요? 단기적으로는 이익이 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무역은 물론 교류가 줄어들어 성장잠재력이 줄어들 것입니다.

하지만 두 나라 간에 무역이 확대되면, 여행이나 문화 및 학술 교류도 확대되고 두 나라간 우호는 자연히 증진될 것입니다. 눈앞의 이익을 놓고 다투는 것보다 더 큰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나라와 나라 사이에 마음을 이어주는 다리를 놓는 사람,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외교관의 역할입니다. 저 역시 그런 외교관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습니다.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면, 여러분에게도 더 많은 기회가 열릴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오스트리아

위치 중앙 유럽 알프스산맥 인근
면적 8만 3,879평방킬로미터(세계 96위)
인구 898만 7,130명(2018년 추정치, 세계 96위)
언어 독일어
수도 비엔나
1인당 국민소득은 5만 1,936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에 속한다. 우리에게는 ‘오스트리아’로 친숙하지만 정식 국가명은 외스터라이히 공화국Republik Österreich으로, 동쪽 지역을 뜻한다. 지리적으로 유럽 한가운데 위치한 오스트리아는 문화적으로도 유럽의 중심이다. 모차르트, 하이든, 리스트, 슈트라우스 1·2세 등 숱한 음악가를 배출했으며, 구스타프 클림트, 칼 몰 등 유명 미술가의 고향이기도 하다. 노벨상 수상자만 20명에 이르는 등 과학과 학술 분야도 크게 발달했으며, 중세 유럽을 지배한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슈바르칭어 대사가 소개하는 오스트리아 관광을 위한 팁

우선은 수도인 비엔나부터! 수도 비엔나는 ’18~19년 2년 연속으로 ‘이코노미스트’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에 뽑힌 바 있다. 과거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헝가리 왕국의 중심도시였으며,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선정될 만큼 각종 유적과 문화유산이 넘쳐난다.

 대규모 음악공연이 자주 열리지만, 열린음악회 형식으로 야외에서 치러지는 공연이나 축제도 많다. 건물 하나하나가 예뻐 1시간 정도 코스를 짜서 걸어다니며 셔터만 눌러도 멋진 화보가 될 정도다.

 
오스트리아의 다소 소박한 면모를 보고 싶다면 잘츠부르크나 인스브루크로 가도 좋다. 잘츠부르크는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의 고향이자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이 된 곳이다. 인스브루크는 아름다운 산과 강, 호수가 자아내는 풍경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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