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김환기

작년 5월, 홍콩에서 열린 미술품 경매에서 한국인 화가의 작품이 한화 85억 3천만 원에 낙찰되었다. 한국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였다. 또 하나 흥미롭고 이례적인 것은, 한국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 1~6위가 모두 이 작가의 작품이란 사실이다. 수화樹話 김환기1913~1974 이야기다. ‘김환기 독주시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최근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를 굳힌 그는, 기존 인기작가인 박수근과 이중섭을 제치고 한국의 아름다움과 고양된 정신세계를 표현한 우수성으로 조명받고 있다.

김환기, 03-II-72 #220, 1972, 코튼에 유채, 254x202cm ⓒWhanki Founadation∙Whanki Museum
김환기, 03-II-72 #220, 1972, 코튼에 유채, 254x202cm ⓒWhanki Founadation∙Whanki Museum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신념을 평생 지켜온 김환기는, 생활고에 짓눌리는 암울한 시기에도 쉬지 않고 예술혼을 불태우며 한국의 정서와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리고자 붓을 들었다. 1963~74년, 그가 뉴욕에서 체류하며 작품활동을 하던 이른바 뉴욕시대에 제작한 ‘전면점화’는 서양의 모던함과 동양적 정서가 드러나 누가 봐도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다.

작은 원들이 질서정연하게 모여 곡선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커다란 캔버스 앞에 멈춰 잠시만 바라봐도 무수한 점들에 이끌려 빠져들 것만 같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또한 자신의 고향 안좌도의 바다색을 표현해서 ‘환기블루’라고 불리는 푸른 색채의 그림은 명랑하면서도 우아한 정취를 자아낸다.

동시대 한국 작가들의 그림과는 상반되는 색채와 마티에르, 간결한 추상 혹은 반추상 형태로 세련된 그의 작품은 시대를 앞서나간 그의 정신과 삶을 반추한다. 20대에 일본 유학길에 올라 그림을 배우고, 40대에 꿈에 그리던 파리 화단에 도전, 쉰이 넘어 뉴욕 화단으로 옮겨가 새로운 작품세계로 도약한 김환기. 그를 평생 이토록 그림에 열정을 쏟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김환기, 항아리, 1957, 캔버스에 유채, 88x143cm ⓒWhanki Founadation∙Whanki Museum
김환기, 항아리, 1957, 캔버스에 유채, 88x143cm ⓒWhanki Founadation∙Whanki Museum

조선 백자에 빠진 화가

1931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김환기는, 1933년 니혼 대학 예술학원 미술부에 입학하며 결코 녹록지 않은 예술가로서의 생애를 시작한다. 대학에서 서양회화의 기초를 배우고 익힌 김환기는 처녀작 ‘종달새 노래할 때’를 시작으로 서양기법을 활용해 한국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그의 누이가 한복을 입고 새알이 든 바구니를 이고 있는 이 그림이 당시 일본의 유명 미술전인 ‘이과전二科展’에서 입선하면서, 그는 신인작가로 인정 받았다. 1938년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해 입선을 받은 ‘론도’는 음악적 리듬을 회화로 옮겨놓은 작품이다. ‘같은 주제가 반복되는 사이에 다른 요소들이 삽입되는 기악곡’을 뜻하는 론도라는 제목처럼, 비슷하게 반복되는 곡선과 기하학적인 색면들로 구성되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는 끊임없이 조선의 정신과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고자 고민했다. 재혼 후 서울로 거처를 옮긴 그는 세 딸과 어머니, 그리고 아내 김향안과 함께 살며 화랑畵廊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모으기 시작한 조선백자를 자신의 그림에 소재로 등장시켰는데,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달항아리’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쓴 글에서도 백자 예찬은 계속된다.

김환기, 론도, 1938, 캔버스에 유채, 61x71.5cm ⓒWhanki Founadation∙Whanki Museum
김환기, 론도, 1938, 캔버스에 유채, 61x71.5cm ⓒWhanki Founadation∙Whanki Museum

“어쩌면 사람이 이러한 백자항아리를 만들었을꼬…. 한 아름 되는 백자항아리를 보고 있으면 촉감이 동한다. 싸늘한 사기로되 따사로운 김이 오른다. 사람이 어떻게 흙에다가 체온을 넣었을까.”(김환기, 1955년 5월에 쓴 글)

1951년부터 시작한 피난살이에서도 그는 조선시대 도공이 백자에 그림을 그리듯 백자 위에 학이나 꽃봉오리, 구름, 새를 그렸다. 피폐해진 전쟁 가운데서도 그림 그리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김환기가 생전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을 엿볼 수 있다.

“생각나면 붓을 드는 그러한 공부 가지고는 네가 꿈꾸는 그러한 예술가는 될 수가 없어. 365일, 아니 죽을 때까지 자고 새면 하루라도 팔레트에 빛깔을 짓이겨 보지 않고는 한 달이고 목욕을 못해 생리가 개운해질 수 없는 것처럼 돼버려야 한다. 날이면 날마다 그림 그리는 것이 생활이 돼버려야 한다.”

김환기, 피난열차, 1951, 캔버스에 유채, 37x53cm ⓒWhanki Founadation∙Whanki Museum
김환기, 피난열차, 1951, 캔버스에 유채, 37x53cm ⓒWhanki Founadation∙Whanki Museum

노래하듯 그림을 그리다

6.25 전쟁이 끝나고 서울에 올라와 홍익대 교수로 재직하며 작품활동을 하던 중에도 그는 안주하지 않았다. 당시 세계 예술의 중심지였던 파리에 가서 자신의 예술의 위치가 어디인지 평가받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1956년, 우여곡절 끝에 파리에 도착했지만 볼거리 천국인 파리에 있으면서도 화실에 파묻혀 조국 산천을 그렸다.

“내 예술은 하나 변하지가 않았소. 여전히 항아리를 그리고 있는데, 이러다간 종생 항아리 귀신이 될 것 같소.”

그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파리의 센 강江 강변의 베네지트 화랑에서 열린 김환기 전시회를 놓고 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는 ‘논리적이면서도 장식적으로 펼쳐진 매화꽃들, 나는 새, 달빛은 간결하면서도 사랑스럽게 구성되었다’고 평했다.

한국 미술의 가능성을 인정받고 자신감을 얻었지만,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기엔 부족했을까? 새처럼 훨훨 날아 고국에 가고 싶었는지 이 무렵부터 그의 작품에는 새가 자주 나온다. 고향 바다가 그리울 때는 푸른 바다와 섬, 그리고 그 위로 날아가는 새가 나오기도 하고, 성벽 위를 날아가는 학도 등장한다.

김환기, 매화와 항아리, 1957, 캔버스에 유채, 53x37cm ⓒWhanki Founadation∙Whanki Museum
김환기, 매화와 항아리, 1957, 캔버스에 유채, 53x37cm ⓒWhanki Founadation∙Whanki Museum

“여기 와서 느낀 것은 시詩 정신이오. 예술에는 노래가 담겨야 할 것 같소. 거장들의 작품에는 모두가 강력한 노래가 있구려. 지금까지 내가 부르던 노래가 무엇이었다는 것을 나는 여기 와서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 같소.”(김환기, 1957년 1월 파리에서)

상황을 정확하게 보려면 그 안에서 나와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고국을 떠나 지내는 동안 객관적인 관점을 갖게 된 김환기는 파리에서 작품에 대한 실험과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마침내 세계인의 주목을 받으며 한층 더 성숙한 작가로 변모해 갔다.

한국의 미를 세계로

쉰 살이 된 1963년, 김환기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서양화 부문 참가 작가로 선정되었다. 비엔날레에서 ‘섬의 달밤’으로 명예상을 수상한 김환기는 뉴욕행 비행기를 탔다. 홍익대 미대 학장, 대한미술협회 회장 등을 역임한 그였기에 한국에 오면 안정된 지위가 보장되어 있음에도, 이를 뒤로하고 뉴욕에서 작가로 활동하는 새로운 모험에 뛰어들었다. 그가 뉴욕에서 쓴 일기에는 숨 돌릴 틈 없이 작업에 매진한 그의 일상이 나타나 있다.

그 결실로 1970년 한국일보 주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대상을 수상했다. 전면추상회화로 도약한 작품을 선보임으로써 국내에 전면추상회화를 알리고 세계 무대에 한국 미술을 알리는 데 공헌한 것이다. 고향의 그리운 사람들을 생각하며 힘차게 점을 찍어낸 이 전면점화는 그가 ‘미술은 질서와 균형’임을 깨달았음을 한눈에 보여준다. 광목천을 캔버스 삼아 테레빈유turpentine oil에 섞어 묽게 만든 유화물감을 둥근 붓으로 찍어 번짐효과를 낸 그의 기법은 동양화를 그리는 과정과도 같다. 그는 임종을 맞이할 때까지 그림을 그리며 ‘영혼에 위안을 주는 리듬’이라는 평을 받은, 그만의 노래로 예술세계를 완성했다.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

서울 부암동 산자락 밑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환기미술관은 김환기의 아내였던 김향안이 1992년 설립했다. 국내에 문화재단이 없던 당시, 개인이 공익재단을 설립하는 전무후무한 사례를 남긴 김향안 여사는 김환기만큼이나 선구적인 인물이었다. 이화여자전문학교를 다니는 등 문학적 지성이 뛰어났던 그녀는 김환기의 파리 진출을 위해 프랑스어를 배워 통역을 하는 등 그의 작품활동에 실질적인 도움을 줬다. 결혼 후에도 문학지에 글을 기고했고, 김환기가 고인이 된 후에는 그와의 결혼생활을 엮은 책 <월하의 마음>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를 내기도 했다. 그녀가 설립한 환기미술관에서는 김환기의 대표 유작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

김환기와 김향안, 1957, 프랑스 파리 콩코드 광장에서 ⓒWhanki Founadation∙Whanki Museum
김환기와 김향안, 1957, 프랑스 파리 콩코드 광장에서 ⓒWhanki Founadation∙Whanki Museum

김환기는 진정 예술가다운 삶을 살아간 작가였다. 어떤 유혹과 시련이 와도 신념에 어긋나는 것과는 타협하지 않는 자세로 작품에 임했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파리와 뉴욕 화단에 건너가 도전을 게을리하지 않은 노력가였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며 척박한 환경에서도 한국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림으로 고국에 대한 사랑의 메시지를 전한 낭만가였다.

오늘날 부와 명예의 안락함과 신념 사이에서 고민하는 젊은이들, 취업과 결혼이 힘든 시대라며 국가와 시기를 원망하는 젊은이들에게 괴로운 삶 속에서도 명랑하고 흐트러짐 없는 그림을 그려낸 김환기의 작품을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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