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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주한 태국대사 씽텅 랍피쎗판“열다섯 살 유학길에서 제 외교관 인생은 시작됐습니다”
고은비 기자 | 승인 2019.09.09 14:54

“사와디크랍(안녕하세요)?” 서울 용산의 주한 태국 대사관에서 만난 씽텅 랍피쎗판 대사의 첫인상은 부드럽고 친근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내 미소와 함께 기자들이 잘 모르는 태국의 문화나 외교 관련 용어들은 설명을 거듭 덧붙이는 배려를 잊지 않았다. 열다섯에 국비장학생으로 유학길에 오르며 외교관 인생이 시작되었다는 그는 어떤 사연을 풀어놓았을까?

씽텅 랍피쎗판
1989년부터 태국 외교부에서 근무해온 30년 경력의 정통 외교관이다. 일본 요코하마 국립대에서 국제경제학 학사·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주LA 총영사관 영사, 주 일본 대사관 공사참사 및 공사, 외교부 동아시아국장을 역임했다. 한국이 대사로서는 첫 근무지다.

“사와디카, 완니 루슥 잉디 막 티 다이미 옷깓 쯔깝 탄풋나카(안녕하세요, 대사님. 오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기자가 태국어로 침착하게 인사를 건네자 랍피쎗판 대사는 “태국어를 할 줄 아느냐?”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6년 전, 기자가 태국에서 1년 동안 해외봉사를 하며 익힌 태국어 실력이 썩 훌륭하진 않았지만, 대사는 무척 반가워했다.

2013년 한 해를 기자가 태국에서 보내며 느꼈던 건, 태국 사람들에게 한국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운 나라라는 사실이다. 당시 태국 학생들은 한국인인 기자도 잘 몰랐던 K-팝 신곡을 흥얼거렸고, 대학에서는 K-팝 댄스 배틀이 열렸다. 한국 드라마를 보며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는 태국 사람들도 자주 만났다. 또 한국 사람들을 얼마나 좋아해 주는지, 늘 사고만 치던 기자를 태국 사람들은 늘 많이 챙겨주었다. 그런 고마운 추억이 있어서일까, 랍피쎗판 대사가 무척 반갑고 가깝게 느껴졌다.

2017년 한 해 한국과 태국의 상호방문객은 220만 명에 달합니다. 태국인들은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한국을 훨씬 더 가깝게 느끼는 듯합니다.

태국의 10대와 20대들 사이에는 한국 드라마와 K팝 등 한류의 영향력이 정말 큽니다. 태국의 고등학교들 중에는 제2외국어로 한국어를 채택한 곳도 많습니다. 저는 지난해 3월에 처음 한국에 왔습니다. 다행히 한국과 생활방식이나 문화적 배경이 비슷한 일본에서 오랫동안 근무도 했고, 동아시아에 대한 공부도 했었기에 적응에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가 흥미롭게 느껴졌습니다. 무엇보다 한국 사람들과 함께 일하면서 어떤 일을 맡겨도 진지하게 임하고 부지런하게 처리하는 모습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이래서 한국이 IT 강국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사실 올해는 양국 관계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시기입니다. 지난해가 양국 수교 60주년이었고요. 올해는 한국이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 국가 연합)과 파트너십을 수립한 지 30주년을 맞아 11월 말 부산에서 ‘2019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가 열립니다. 마침 태국이 아세안 의장국을 맡고 있어 태국 총리께서 한국을 방문하실 예정입니다.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이 더 많은 협력관계를 맺길 바랍니다.

일본 요코하마국립대에서 국제경제학을 공부하고 박사 학위까지 취득하셨는데요.

중학교를 마치고 열다섯 살 때 일본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전국적으로 수백 명이 응시한 국비장학생 선발시험에 합격했지요. 딱 다섯 명한테만 일본으로 유학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운 좋게도 합격했지요. 처음 일본에 갔을 때는 언어실력이 부족해 수업을 잘 따라가지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린 나이다 보니 공부를 하면서 언어 문제는 자연스레 해결되었어요.

일본 고등학교에서 유학하던 시절.

공부보다 더 힘들었던 건 어린 나이에 혼자 살아가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직접 요리해서 끼니를 챙겨 먹고, 빨래도 알아서 하는 등 생활하는 데 필요한 모든 걸 혼자 힘으로 해결해야 했죠. 그래도 함께 유학 간 다섯명이 모두 가까이에 살았기에 힘든 시기를 잘 이겨낼 수 있었지요.

고등학교와 대학교, 대학원까지 꽤 오랜 세월을 일본에서 보내셨는데요. 잊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을 듯합니다.

주 일본대사관 공사참사관 당시, 도쿄에서 '타이 페스티벌'을 열었다.

네, 제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도시락을 싸 갖고 다녀야 했습니다. 일본 학생들은 대개 부모님이 도시락을 준비해 주시지만, 저 같은 외국인 학생들은 부모님이 안 계시니까 학교 밖에 나가 점심을 사 먹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지요. 그런데 같은 반 여학생 하나가 그런 제 사정을 알고 ‘내가 부모님께 말씀 드려서 매일 도시락을 하나 더 싸 갖고 올게’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1년 동안 매일같이 제 도시락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물론 돈은 받지 않았지요.

그 여학생과 부모님이 베풀어주신 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뭉클할 때가 많습니다. 제 학창시절에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이었지요. 도쿄의 주일본 태국대사관에서 공사公使로 근무하던 시절, 그 여학생과 부모님을 다시 만나감사인사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지요.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그리고 외교관 시절까지 합하면 랍피쎗판 대사가 일본에서 지낸 세월은 20여 년을 넘나든다. ‘태국을 빼면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일본은 태국 다음으로 내가 가장 잘 아는 나라’라는 것이 그의 말이다.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외교관은 대개 4년을 재외공관 등 해외에서 근무하고 귀국해, 4년을 외교부에서 근무한 뒤 다시 해외로 나가는 순환근무를 실시한다. 랍피쎗판 대사도 태국 외교부에 근무할 때는 동아시아 지역과의 국제 외교 및 개발 업무를 오랫동안 담당해 왔다. 덕분에 그는 태국 외교부내에서 최고의 동아시아통通으로 손꼽힌다.

외교관 생활을 시작하신 지 올해로 꼭 30년째인데요.

벌써 그렇게 되었네요. 외교관은 국가를 대표하는 외교사절로, 해외에 체류하는 자국민들의 생명과 권익을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개인의 신변을 먼저 생각하거나 감정을 앞세우기보다 국민들의 안전이 1순위죠. 지난 세월을 돌이켜봐도 해외에 나와 있는 태국 국민들을 도왔던 일들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첫 해외근무지가 미국 LA의 태국영사관이었습니다. 태국인들이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되어 공장에 팔려가 갇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경찰과 함께 달려가 모두 무사히 구출한 적이 있어요. 2011년 도쿄에서 서기관으로 근무할 때는 쓰나미가 일본을 강타하는 바람에 일본에 와 있던 태국인들이 안전하게 귀국하도록 돕기도 했습니다. 제가 국가를 위해, 국민을 위해 마음껏 일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 무척 자랑스러웠죠.

‘국민을 위해 맘껏 일할 수 있어 자랑스럽다’는 말씀이 인상 깊습니다.

대사로서 제 임무는 크게 3가지입니다. 첫째, 나라의 대표로서 태국과 한국 간의 이익을 모두 추구하는 방향으로 외교나 무역 관련 협상을 합니다. 둘째, 태국의 문화와 예술, 산업, 지리 등을 한국에 널리 알려야죠. 셋째, 한국 내 태국인들의 생명과 권익을 보호합니다.

사실, 굳이 외교관이 되지 않더라도 누구나 사회를, 그리고 국가를 돕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장사를 열심히 하는 아주머니도 나름의 방법대로 사회와 국가에 도움을 주고 있으니까요. 저도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직업의 특성상 국가와 사회에 도움을 주는 일을 하는 것을 큰 행운으로 생각합니다.

외교부에서 근무하면서 ‘대사란 국왕과 총리를 대신하는 자리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실제로 국민들을 위해 일하다 보니 그 의미를 체감하게 되더군요.

인터뷰 도중 문득 접견실 내부를 둘러보던 중 두 종류의 국기가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우리가 흔히 보는 적색·백색·청색으로 된 태국 국기, 또 하나는 태국 국기 위에 청색 원과 화려한 코끼리가 수놓아진 국기였다. ‘코끼리를 수놓은 이 깃발은 대사를 상징한다’는 것이 랍피쎗판 대사의 설명이었다. 실제로도 그는 이 깃발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인터뷰 내내 ‘대사란 국왕과 총리를 대신하는 자리’라는 표현을 반복하는 그의 모습에서 공직자로서 국익을 먼저 생각하는 자세가 느껴졌다.

’18년 한-태수교 60주년 공식 로고.

외교관이 되기 위해 필요한 자질은 무엇일까요?

기본적으로는 외국어능력이나 국제관계, 국제법에 대해 잘 알아야죠. 하지만 외교관으로 일하다 보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태국의 역대 총리 중에 ‘아난 판야라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선배 외교관이기도 한데, 외교부에 자주 오셔서 강연도 하셨어요. 저희들에게 항상 ‘외교관이라면 흔들리지 않는 정확한 선線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어요. 대사로 일하다 보면 유혹도 자주 찾아오지만,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는 선이 분명하면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씀이었죠. 아직 그런 유혹이 온 적은 없지만, 늘 그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근무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어딜 가든 마음을 열고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세상은 정말 넓습니다. 저는 주로 동아시아에서 오래 공부하고 근무했기 때문에 한국이나 일본 생활은 비교적 익숙했지만, 미국에 갔을 땐 많은 것이 새로웠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것들을 향해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외교관이 되려면 새로운 것들과 변화에 대해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다른 나라에 직접 가보는 것도 좋습니다. 짧은 기간이라도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고 외국 친구를 사귀면서 견문이 넓어지니까요.

판야라춘 전 총리 외에 큰 영향을 준 멘토가 있다면 누구입니까?

부모님이죠. 저희 가족은 지방 소도시에 살았는데, 모두 8남매였습니다. 중국계이셨던 부모님은 ‘어른에 대해 예의를 갖추고, 가난하지만 절대 남에게 피해 주는 일은 하지 말라’고 유교식으로 엄히 가르치셨어요. 형편이 넉넉하지는 않아서 저희 8남매가 어렸을 때부터 청소나 밥짓기 등 집안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부모님은 자식들을 모두 공부시키고 훌륭히 키워주셨지요.

한국전쟁 65주기 ‘태국군 참전기념 추모행사’에서 연설하는 랍피쎗판 대사. 당시 약 1만 명의 군인들이 참전했다.

재임기간이 끝날 때쯤에는 어떤 대사로 기억되길 원하십니까?

한국인 여러분께서 저를 ‘친구 같은 대사’로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외교를 잘하려면 우선 대사관부터 누가 오든 환영해 주고, 누구든 올 수 있고 오고 싶은 곳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사로서 여러 공식행사 때 축사를 하러 가는 경우가 많은데요. 축사를 한 뒤에도 바로 돌아오지 않고 행사장에 남아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하려고 애씁니다.

마지막으로 <투머로우> 독자들에게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모든 분들이 저처럼 외교관의 길을 걸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직업이 삶의 목표가 될 수는 없을 겁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열정적으로 살기 바랍니다. 우리는 늘 우리에게 남은 삶이 길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지만, 언제가 우리의 마지막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 불확실성 속에서 먼 미래를 생각하기 앞서 우선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해 살길 바랍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중요한 질문 하나를 빠트린 것을 알았다. ‘언제 어떤 계기로 외교관이 될 결심을 했습니까?’라는 질문이었다. “국비장학생은 귀국해서 공무원으로 일한다는 규정이 있었어요. 저는 국제경제를 전공하다 보니 외교관이 되고 싶어 지원했죠.” 외롭고 힘든 타국생활, 같이 유학 온 태국 친구들은 생사고락을 함께해 준 고마운 존재들이었다. “그렇게 일찍부터 사람과 관계의 소중함에 눈떴기에, 외교관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답변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람 사이도, 나라 사이도 결국은 서로를 향한 배려에서 시작되는 것 아닌가.

고은비 기자  bsh002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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