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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모이', 말모아 뜻모아 소리모아
김성훈 기자 | 승인 2019.02.11 15:04

사진 앤드크레딧 제공

1월 초 개봉한 영화 ‘말모이’가 개봉 열흘 만에 17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의 배경은 1940년대 경성이다. 일제는 조선을 완벽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학교에서 한국어 교육을 전면금지하고, 한국어 신문과 잡지도 모조리 폐간시키는 등 이른바 ‘민족 말살 통치’에 한창이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한국어를 쓰면 체벌을 당했고,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개명당해 전쟁터로 끌려간다.

목숨과 바꿔도 아깝지 않을 삶의 목표를 얻다

주인공 김판수(유해진 분)는 까막눈에, 감옥소도 여러 번 다녀온 전과자다. 하지만 중학생 아들 덕진과 일곱 살 딸 순희 앞에서만큼은 한없이 다정다감한 가장이다. 덕진이 월사금을 못 내 학교에서 쫓겨날 지경이 되자, 판수는 서울역에서 한 신사의 가방을 훔쳐 달아난다. 그러나 그 가방에 든 건 정체 모를 원고뭉치가 전부였다. 가방의 주인은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이었고, 원고는 그가 국어사전을 만들려고 모은 자료였던 것. 정환은 판수가 흘린 월사금 고지서 봉투에 적힌 주소를 보고 집에 찾아와 가방을 가져간다.

자식들 앞에서 체면이 깎인 판수는 그 길로 맘을 다잡고 어느 서점에 사환으로 취직한다. 알고보니 그 서점은 조선어학회가 일제의 눈을 피해 사전을 편찬하는 비밀본부였다. 하지만 판수는 사전에 아무 관심이 없다.

하루빨리 한 달을 채워 급료를 받아 덕진의 월사금을 내고, 순희에게 호떡을 사 줄 생각뿐이다.

“돈을 모아야지, 말을 모아 어따 쓴다고? 도시락이든 벤또든 배만 부르면 되는 거지.”

사진 앤드크레딧 제공, 디자인 전진영 기자

하지만 회원들에게 한글을 배우면서 간판을 읽고 소설을 읽는 동안, 판수는 차츰 우리말의 아름다움에 눈떠 간다. 말이란 단순히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민족의 정신·사고방식·문화가 담긴 숭고한 재산임을 깨달은 판수는 사전 편찬에 헌신적으로 함께한다. 목숨과 바꿔도 아깝지 않을 삶의 목표를 찾았을 때, 소매치기 잡범이 건실한 일꾼으로 변신한 것이다.

한 사람의 열 걸음 < 열 사람의 한 걸음

사진 앤드크레딧 제공, 디자인 전진영 기자

또 다른 주인공인 류정환(윤계상 분)은 뜻을 같이하는 지인들을 모아 10년째 국어사전 편찬에 몰두하고 있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편찬은 난항에 빠진다. 속도를 내기 위해 사환을 뽑는데, 마침 그 사환이 자기 가방을 훔쳤던 판수다. 더구나 판수는 글도 모르고, 출근은 느지막이 하면서도 퇴근은 칼같이 하는 등 근태도 엉망이다. 그런 판수를 바라보는 정환의 시선이 고울 리 없다. 학회의 맏어른인 조 선생만이 판수를 끝까지 감싼다. “저 사람, 글 모르는 까막눈이라구요.”(정환) “글이야 배우면 되지.”(조 선생) “게다가 전과자입니다.” “우리 중에 전과 없는 사람이 누가 있나?” “그 전과랑 우리 전과랑 같습니까?”

일견 무례하고 거칠지만, 구수한 입담으로 사무실을 웃음바다로 만들어 놓는 판수에게 학회 사람들은 금방 마음을 연다. 하지만 정환만은 끝내 판수에게 의심 섞인 눈초리를 거두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판수가 약을 찾아 서랍장을 뒤지는 것을 본 정환은 판수가 학회 공금을 훔치는 것으로 오해하고 그를 쫓아낸다. 나중에야 잘못을 깨달은 정환은 판수를 찾아가 용서를 빈다. 사람은 저마다 독특한 맛과 매력이 있지만,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는 옳음에 사로잡히면 그 맛과 매력이 보이지 않는다. 자기 기준으로 남을 예단하고 ‘못 믿을 사람’으로 치부한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정환은 깨달은 것이다. 내심 섭섭해 하던 판수도 정환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이후 두 사람은 같은 길을 걸으며 생사를 함께하는 친구가 된다.

소중한 것일수록 잃어버린 뒤에야 가치를 안다

사진 앤드크레딧 제공, 디자인 전진영 기자

민들레는 밟히면 밟힐수록 더 뿌리를 뻗듯,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탄압이 거세질수록 우리 것을 지키려는 열망은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일제에서 해방된 지도 70여 년이 흘렀다. 우리 것을 박해하던 세력은 이 땅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우리 말과 글의 모습은 지금 어떤가? 우리말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데도 ‘뭔가 있어 보인다’는 착각 때문에 굳이 가져다 쓰는 영어, 편리하고 소통이 쉽다는 이유로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줄임말, 국적 불명의 외래어나 입에 담기도 힘든 각종 비속어나 욕설까지…

말과 글은 정신을 담는 그릇과 같다.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그 말과 글을 온전히 우리에게 물려주고자 했던 김판수와 류정환을 보며, 오늘 우리는 우리 말과 글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새삼 돌아보게 된다.

김성훈 기자  kimkija@itomorrow.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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