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더듬던 소년, 마인드 강사를 꿈꾸다

지금은 182센티미터의 훤칠한 키에 누구나 한번쯤 뒤돌아 볼만큼 잘생긴 얼굴이지만 어린 시절의 박규영 씨는 키 작고 새카만 ‘말더듬이’로 늘 혼자였다. 하지만 2016년 군에 입대한 뒤 그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하루에도 몇 번씩 후임들에게 고민상담을 해주고 부대원들 앞에서 마인드강연을 하면서 ‘군대에서 지내는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했다’고 말하는 박규영 씨. 그가 이렇게 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박규영 병장, 중대장님 호출이다!”

제대를 하루 남긴 날, 중대장이 급히 박규영 씨를 불러 당일 오후에 진행될 인성교육 시간에 마인드강연을 하라고 했다. 그가 중대장실에 찾아가 마인드강연의 필요성에 대해 건의한 지 4개월 만의 일이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보다 잘난 것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배운 마음의 세계를 여러분 앞에서 말하고 전역할 수 있게 되어 너무 행복합니다.” 그가 마지막 말을 마치자 150여 명 부대원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그날은 그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일대일 대화도 어렵던 말더듬이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연을 할 수 있다니!

“박규영, 너는 말더듬이야”
“비유… 표… 표현… 하여… 이….”
중학교 1학년 첫 수업이었다. 국어선생님은 규영 씨를 지목해 교과서를 읽게 했고 그는 당황한 기색으로 띄엄띄엄 단어들만 겨우 소리 내어 읽었다. 반 친구들은 얼굴이 빨개진 규영 씨를 ‘말더듬이’라며 놀리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
초등학교 졸업식 날

“급한 성격 탓에 말을 많이 더듬었던 저는 친구들에게 항상 놀림거리였어요. 학교가 싫어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저와 달리 형은 항상 친구도 항상 친구들과 잘 어울렸고 인기도 많았어요. 잘생긴 외모에 성격도 활달한 형을 보며 항상 ‘나는 왜 이럴까?’ 하는 열등감에 빠져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국어선생님이 규영 씨를 따로 불렀다. “규영아, 너 말 더듬는 것도 장애판정 받을 수 있대. 부모님이랑 병원에 한번 가봐.” 그 말을 전해들은 그의 부모님은 놀란 마음에 함께 병원으로 가 검사를 받도록 했다. 다행히 병원에서는 장애판정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말했지만 규영 씨에겐 그날이 마음에 큰 상처로 남았다.

“‘나에게 장애판정검사를 받으라고 할 만큼 내가 말을 못하는구나. 나는 장애인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자 사람들을 대하는 게 더 어려워졌죠. 사람들에게 약점을 보이면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고 결국 상처를 줄 거라는 생각에 누구를 만나든 제 모습을 철저히 숨기려고 애를 썼어요. 또 피해의식 때문에 친구나 가족들이 하는 작은 장난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하루 종일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나?’ 하는 생각에 빠져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는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키가 자라기 시작했고 살도 자연스레 빠졌다. 하지만 외모가 바뀌어도 ‘나는 할 수 없어’라는 생각과 피해의식은 그대로였다.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했고 혼자만의 세계에서 고립되었다. 대학교 1학년을 마칠 때쯤, 그는 답답한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으로 육군, 해군, 공군 등 모두 열 번 넘게 지원했지만 이상하게도 계속 불합격이었다. 그 좌절감에 방황하는 규영 씨를 본 아버지는 그가 밝게 변화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굿뉴스코 해외봉사를 추천했다. 그는 봉사활동이 어쩌면 자신의 마음을 채워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멕시코로 떠났다.

멕시코에서 ‘마음의 문’이 열리다
변화를 위해 떠난 멕시코에서도 규영 씨는 주변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태권무 공연처럼 몸으로 하는 봉사활동이라면 다 했지만,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하는 홍보활동이나 한국어수업 진행은 부담스러워 피했다. 그와 친해지고 싶어 다가오는 현지인들에게도 마음을 쉽게 열지 않았다. 자신의 약점이 드러날까 두려워서였다. 하지만 멕시코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은 오랫동안 고립되었던 박규영 씨마저 변화시켰다.

“하루는 멕시코 현지 친구의 집에 초대되어 갔어요. 친구 어머니께서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식사시간, 어머니는 제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셨어요. ‘가족은 몇 명이니? 한국에서는 어떻게 살았어? 멕시코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말 별거 아닌 질문인데 저는 이 질문을 받자 갑자기 등에는 식은땀이 나고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기 시작했어요. 상기된 표정으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그런 절 보신 어머니께서 제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게 ‘괜찮아, 규영아. 10분이고 20분이고 기다려 줄게. 천천히 말해도 돼’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순간, 제 머릿속에는 한국에서 말을 제대로 못해서 답답했던 심정들. 그리고 많은 이들 앞에서 긴장하고 말을 더듬었을 때 사람들이 무시하고, 욕을 했던 기억들이 스쳐지나갔습니다. 누구든 제 약점을 알게 되면 결국 저를 무시하고 비난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을 더듬는 제 모습을 보고도 웃으며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저는 그날 처음으로 누군가와 대화를 너무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날 이후, 그는 멕시코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고 현지인들과 만나 사소한 것부터 이야기하려 노력했다. 다른 사람과 교류없이 혼자 공부할 때는 좀처럼 늘지 않았던 스페인어 실력이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하면서 크게 늘었고, 4개월 뒤부터는 깊은 마음의 이야기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멕시코에서 그는 800여 명의 중학생들 앞에서 스페인어로 영어캠프를 소개하기도 했고 직접 한국어 수업도 진행했다.

“멕시코에서 부담스러운 일을 하나둘 하면서 지금껏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아볼 수 있었어요. 항상 ‘나는 말 못해’ ‘나는 안 될 거야’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말더듬이 박규영’이라는 한계 안에서만 살아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틀에서 벗어나 도전하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행복을 처음으로 맛볼 수 있었다. 멕시코에서 보낸 1년의 시간은 세상을 향해 굳게 닫혀있던 규영 씨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었고, 그때부터 모든 세상이 새롭게 다가왔다.

저만큼 재미있고 행복한 군생활 한 사람 있을까요?
2016년 3월, 멕시코에서 귀국한 직후 그는 군에 입대했다. 1년 전과 달리, 군대는 더 이상 도피하듯 떠나고 싶은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운 도전을 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처럼 느껴져 기대가 컸다고. 그는 항상 주변 선임, 동기 및 후임들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건넸고 그러던 중 같은 부대였던 하성민 씨를 만났다. 성민 씨는 어릴 적부터 소심한 성격 탓에 학창시절뿐만 아니라 직장에서마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그의 마음에는 ‘나는 안 돼’라는 생각이 꽉 차 있었다. 당시 군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성민 씨를 선임들도 포기하는 분위기였지만 규영 씨는 반드시 그가 변할 수 있고, 아무 문제없이 군생활을 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성민이를 보면 해외봉사를 가기 전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았어요. 성민이가 어두운 삶에서 벗어나 밝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고 싶었죠.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가 제가 해외봉사를 가서 어떻게 변화됐는지 그리고 그곳에서 얻은 사랑, 현지인과 동고동락하며 배운 마음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고맙게도 성민이가 제게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는데 표정이 점점 밝아지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성민이가 ‘나는 안 돼’ 하는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자 다른 사람을 돕고, 오히려 저를 배려해주는 걸 보면서 정말 기뻤습니다. 저와 성민이는 매일 같이 이야기도 나누고 놀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면서 군 생활을 지냈고 함께 무사히 전역할 수 있었습니다.”

규영 씨는 군생활 동안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것들에 하나씩 도전해나갔다. 그는 가장 먼저 발음교정부터 시작했다. 매일 한 시간씩 무슨 책이든 붙잡고 한 단어 한 단어씩 정확한 발음으로 소리 내는 연습을 했고, 이 과정을 통해 발음이 점점 정확해져 갔다.

“저는 원래부터 정상이었는데 ‘난 말더듬이야’라는 생각에 갇힌 나머지 고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고, 계속 말더듬이로 살아온 것이었습니다.”

그의 두 번째 도전목표는 ‘특급전사’였다. 특급전사란 강인한 체력을 가진 장병들에게 주어지는 호칭이다. 특급전사가 되려면 사격 90% 이상 명중, 팔굽혀펴기 2분 내 76개, 윗몸일으키기 2분 내 86개, 3킬로미터 뛰기 12분 30초 이내 완주 등의 조건을 모두 달성해야 한다. 어렸을 적 체력이 약해 운동도 잘 하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 어림도 없을 것 같았지만, 끊임없이 어렵고 부담스러운 일에 뛰어들었던 해외봉사 시절을 생각하며 운동을 시작했다. 매일 선임과 함께 운동장을 뛰며 체련단련을 했던 그는 특급전사를 넘어 부대 전체 1등 기록을 낸 적도 있었다고.

군대에서 함께 지냈던 동기들과 박규영씨(사진 오른쪽에서 두번째)
군대에서 함께 지냈던 동기들과 박규영씨(사진 오른쪽에서 두번째)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보냈어요. 자투리 시간만 나면 다양한 책을 읽고 사고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했습니다. 좀 늦게 시작했지만 제대할 때 약 70권을 읽었습니다. 그중 특히 <투머로우>를 가장 좋아했는데요, <투머로우>를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저는 생활관에 특별한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규영 씨가 분대장이 된 이후에는 매일 밤 생활관에서 작은 토론회가 열렸다. 저녁 9시 30분부터 10시까지 진행되는 점호시간, 인원체크가 끝난 뒤 그 <투머로우>에 실린 절제, 교류 등과 같은 마인드를 주제로 짧게 강연을 했다. 이후 한 명씩 돌아가며

‘행복한 병영생활’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동기 및 후임들이 어색해 하기도 했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점호시간을 손꼽아 기다릴 정도로 좋아했다고. 토론회를 시작한 이후 ‘군 생활에 적응을 잘하는 병사’ 정도로 알려졌던 규영 씨를 사람들이 다르게 보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몇몇 후임들이 그를 찾아와 고민상담을 부탁했다. 규영 씨에게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이 흐를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150여 명 앞에서 마인드강연을 하고 내려온 날, 저녁 점호시간에 제가 생활관을 같이 쓰는 부대원들에게 ‘내가 여기서 일고여덟 명인 너희 앞에서 매일 마인드 강연을 했는데 이제 나는 200명, 천 명, 만 명 앞에서 강연하고, TV에도 나와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될 거야. 그러니까 미리 사인 받아 둬!’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때 비록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그 속에 제 진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사람의 마음을 밝은 곳으로 이끌어주는 목사님인데요, 이전에는 아버지가 왜 그 길을 가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버지의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저도 아버지를 따라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언어는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연결해줄 때 ‘제대로 쓰였다’고 말할 수 있다. 멕시코에서의 1년 그리고 약 2년간의 군 생활을 통해 사람 간에 마음이 흐를 때 얼마나 행복한지 알게 된 박규영 씨. 이제 그는 슬픈 사람들에게 희망과 행복을 알려주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면서 언어를 ‘제대로’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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