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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이 있었기에 지금 나는 더 행복하다"우크라이나 대사 올렉산데르 호린
김성훈 기자 | 승인 2018.04.12 11:30

호린 대사를 볼 때면 단단한 바위가 생각난다. 단순히 넉넉한 풍채 때문만은 결코 아니다. 모진 풍파를 고스란히 맞으면서도 한결같이 우뚝 선 바위마냥, 크고 작은 어려움을 묵묵히 이겨내 온 삶의 이력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인생에 어려움이 닥치는 건 당연한 일 아니냐? 고난이 있어 지금의 내 삶이 더 행복하게 느껴진다’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1986년 4월 26일 새벽…, 벌써 30년도 더 된 일이지만 호린 대사의 기억에는 그날이 마치 어제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구 소비에트 연방(소련)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원자로가 폭발한 것이다. 비상시에 원자로가 멈출 경우 어떻게 대처할지를 실험하던 중 책임자가 부주의로 안전 장치를 해제한 것이 원인이었다.

사고지점에서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까지는 불과 100킬로미터. “방사능 물질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은 키예프 시를 한순간에 뒤흔들어 놓았다. 250만 시민들은 물과 식량, 간단한 옷가지만 허겁지겁 챙겨들고 너도나도 피난길에 올랐다. 당시 만 30세로 키예프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호린 대사 역시 그 아비규환의 현장에 있었다.

“특히 키예프 역은 어떻게든 기차를 타고 탈출하려는 시민들로 한바탕 북새통을 이루었습니다. 표를 못 구한 부모들은 기차에 탄 낯모르는 사람들에게 ‘나는 어떻게 돼도 좋으니 제발 우리 아이만이라도 데려가 달라’며 울부짖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때 홀로코스트(대학살)를 겪은 유대인들의 심정이 이랬겠구나’ 싶더군요.”

그런데 누구도 생각 못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키예프로 날아오던 방사능 물질이 북쪽으로 진로를 돌린 것이다. 덕분에 키예프 시민들은 참사를 피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독립광장에 세워진 명물 미카엘 천사상의모습.

그야말로 하늘이 도왔군요.
운이 좋았지요. 하지만 방사능 물질이 고스란히 벨라루스 쪽으로 날아가는 바람에 우리가 입었어야 할 피해를 그쪽 국민들이 입어야 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원래 체르노빌은 지질학적으로 원전을 세우기에 위험한 곳인데도 소련 공산주의 정부는 그곳에 원전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정작 사고가 터졌을 때는 제대로 조치를 취하지 않아 피해가 더욱 커졌지요.

소련 치하에서 살면서 다른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저희 할아버지는 그리스에서 건너온 이민자셨어요. 소련 해군 잠수함 장교셨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마자 잠수함에서 쫓겨나셨어요. 당시 소련의 독재자였던 스탈린은 소수민족을 잠재적인 배신자로 간주했거든요. 물론 저는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인종차별을 직접 경험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희 아버지 세대는 인종차별은 물론, 그보다 더 무서운 사건을 겪어야 했습니다.

1932~3년 우 크라이나에는 대기근 ‘홀로도모르’로 700만~1천만 명이 사망했다. 당시 소식을 보도한 신문.

더 무서운 사건이라니요?
우크라이나는 토질이 매우 비옥해 유럽에서도 손꼽힐 만큼 농업이 크게 발달한 곡창지대였습니다. 그래서 농산물을 키워 팔아 부유한 삶을 누리는 이른바 부농富農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스탈린이 모든 토지를 공산당의 소유로 삼는 ‘집단농장’ 정책을 편 겁니다. 부농들은 크게 반발하고 나섰지요. 농사가 제대로 될 리 없었고, 결국 소련정부는 부농들의 농장을 습격해 농산물과 가축을 모조리 뺏아갔습니다. 허가된 것보다 많은 농산물을 갖고 있다 발각된 사람은 죽임을 당하거나 시베리아로 추방당했습니다. 자연재해가 아닌, 사람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이 기근으로 700만~1천만 명이 죽은 걸로 추산됩니다. 이 사건을 ‘홀로도모르Holodomor’라고 합니다. 기아飢餓로 인한 살인이라는 뜻이지요. 홀로도모르는 1932~3년에 일어났는데, 저희 아버지가 1932년생이시니 얼마든지 돌아가실 수도 있었습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우리가 그런 시대를 살아야 했을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보면 풍족한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호린 대사가 외교관이 될 목표를 세운 것은 열세 살 때라고 한다. 독서가 취미였던 그는 외교를 주제로 한 책들, 특히 외교관의 전기나 회고록을 정독하며 차근차근 꿈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조국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지배를 받는 상황이었다. 소련은 명목상 연방聯邦이었지만, 실제로는 수도 모스크바가 정치, 경제, 문화, 과학기술 등 모든 것을 독점하고 있었다. 심지어 소련 내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도 반드시 모스크바를 거쳐야만 갈 수 있었다. 당연히 국제무대에서도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눈치만 보느라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수도 키예프의 거리모습. 알록달록한 건물과 푸른 숲이 멋진 조화를 이룬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외교관이 될 꿈을 품었습니까?
그냥 국제공무원이 되고 싶었고, 특히 유엔에 들어가 뉴욕이나 제네바에서 일하고 싶었습니다. 우크라이나도 당시 유엔 회원국이었거든요.

키예프대에 들어가서는 국제관계학과 국제법, 국제경제학 등 세 과목을 전공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1981년부터 1993년까지 모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나라를 위해 일할 외교관이 많이 필요해졌습니다. 저처럼 국제법이나 국제관계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외교관으로 특채되었지요. 50년 넘게 알고 지낸 친구가 둘 있는데, 각각 프랑스 대사와 스웨덴 대사로 근무하고 있어요. 그 친구들도 저도 다들 외교학도로서 소련 붕괴라는 역사적 사건을 직접 목격하고, 독립한 내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었던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원전 사고가 일어난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은 지금도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며 특별관리되고 있다.

학창시절 제1외국어로 러시아어를 배우셨을 텐데 영어가 정말 유창하십니다.
영어는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제가 대학생이던 1970년대는 이른바 데탕트 detente라고 해서 미국과 소련 간의 긴장이 완화되던 시기였습니다. 미국에서도 관광객들이 떼를 지어몰려왔지요. 저희 교수님들은 제자들에게 어떻게든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그 관광객들을 학교로 데려왔습니다. 그들과 영어로 대화하며 공부했지요.

또 저희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서 “괜찮으시다면 우리 우크라이나인의 삶과 문화를 소개하고 싶다”고 간청했어요. 그들을 영어로 가이드해 주면서 실력을 닦았습니다. 물론 보수는 받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영어를 활용하고, 새로운 영어를 배울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외교관이 된 후 지금까지 미국, 캐나다, 싱가포르, 네덜란드 에서 근무한 호린 대사. ‘어느 나라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에 그는 ‘외교관은 모름지기 자신이 부임한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 그래서 어디서 근무하든 늘 행복했다’고 답했다. 최근 한국어 공부에 열심인 그는 ‘우선 한글을 읽을 줄 아는 게 목표다. 한국은 버스노선도가 한글로만 되어 있어 한글을 읽을 수 있어야 길을 잃지 않는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12월 1일 우크라이나 문화의 날을 맞아 한국외대에서 특강을 마치고 학생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첫 외교관 생활은 어땠습니까? 학교에서 배운 외교 이론과 실제 현장은 많이 달랐을 텐데요. 제 첫 직함은 ‘우크라이나 유엔 대표부 제1서기관’이었습니다. 아주 높은 직위였지요. 박사 학위도 있고 외교관이 되기 전에는 우크라이나 최고 명문대의 부교수였습니다. 마침 저희 대통령께서 미국을 방문하셨는데, 저희 대사님은 제게 대통령과 대표단의 짐을 챙겨 호텔방으로 옮기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굉장히 기분이 나빴어요. ‘박사에 교수였고, 지금은 고위외교관인 제게 짐을 나르라니요?’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대사님은 참 현명하신 분이 었습니다. 짐을 챙기는 것부터 미국과 협상을 마무리하는 것까지, 엄청난 양의 업무를 맡기셨습니다.

‘외교에서 중요하지 않은 일은 하나도 없다. 대통령의 짐을 챙기는 일은 회담에서 협정문을 챙기는 것 만큼 중요하다’라는 사실을 제게 가르쳐주길 원하셨던 겁니다. 대사님은 훗날 장관까지 오르셨는데, 지금도 역대 장관들 중 가장 존경받는 분입니다.

올해로 외교관 생활 26년째입니다. 보람된 세월을 보내셨지만 힘든 일도 많으셨을 텐데요.
외교란 굉장히 어려운 감정노동이며,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됩니다. 스트레스도 많죠. 가장 힘든 일이라면 2014년 말레이시아 항공기가 우크라이나 상공에서 친러시아 반군이 쏜 미사일에 맞아 격추된 사건이죠. 항공기는 암스테르담을 떠나 쿠알라룸푸르로 가고 있었는데, 그 사고로 무려 298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 대사였던 저는 사태를 수습해야했지요. 사망자의 사체를 처리하고, 신원을 확인해증명서를 발급하고, 유족들을 진정시키느라 숨돌릴 틈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힘든 건 상관없었습니다. 세상을 다 준대도 바꿀 수 없는 생명들이 사라진 게 가슴 아플 따름이었습니다. 한 생명만 사라져도 크나큰 비극인데, 할아버지부터 손주까지 온 집안이 변을 당한 가족도 있었어요.

우크라이나의 중소도시 리비우에 자리한‘ 리비우 오페라 극장’ 앞 광장의 모습
2014년 7월 추락한 말레이시아 항공기 MH17편의 잔해를 조사하는 요원들.

항공기 격추사건을 이야기하던 호린 대사는 안경을 벗고 두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62년 생애 동안, 그는 그런 눈물을 수없이 흘렸으리라. 공산정권 치하에서 대를 이어가며 겪은 고통과 설움, 외교관의 꿈을 따라 숨가쁘게 달려온 나날들, 그리고 항공기 사고까지. 그럼에도 그는 답변할 때마다 ‘난 운이 좋았다I was lucky’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원전 사고와 홀로도모르 등 큰 재앙을 피했고, 현명한 스승의 가르침 덕에 외교관의 자질을 키웠고, 마침 소련이 붕괴되는 등 시대를 잘 타고난 덕에 외교관이 될 수 있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어려울 때 어떻게 이겨냈냐고요? 세 가지를 떠올립니다. 우선 아내와 아이 등 저를 위해 희생하는 가족을 떠올립니다. 특히 아내는 훌륭한 학자가 될 수 있었는데, 절 내조하느라 꿈을 접어야 했거든요. 그리고 ‘It’s not brain surgery 뇌 수술 하라는 것도 아닌데’라는 숙어를 떠올립니다. 뇌수술이 굉장히 어려운 수술이잖아요. ‘이보다 더 어려운 일도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면 눈앞의 문제가 쉽게 느껴집니다. 셋째, ‘인생에는 뜻처럼 안되는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라는 격언을 떠올립니다. 인생에 어려움이 닥치는 건 당연하잖아요? 어려움이 있기에 지금의 제 삶이 더욱 행복하게 느껴집니다.”

우크라이나 대사 올렉산데르 호린
1956년 우크라이나의 도네츠크에서 출생했다. 키예프국립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주 유엔 대표부 서기관으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해 싱가포르 대사, 외무부 차관, 네덜란드 대사 등을 역임하고, 지난해 6월부터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로 근무하고 있다.

김성훈 기자  kimkija@itomorrow.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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