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국민교수 응우옌 런 중

베트남에서 ‘국민’이라는 말이 붙는 단어는 세 가지이다. 국민교수, 국민예술가, 국민의사. 주석이 지정하는 사람이 이런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 응우옌 런 중 교수는 국민교수다. 베트남 사람들이 그를 스승으로 여겨 따르며 그에게서 삶과 정신을 배운다. 자연과학자로 출발해 생명을 살리기 위한 연구를 하고, 전쟁으로 인해 배움터를 잃어버린 학생들을 가르치고, 미래를 이끌어 나갈 청소년들과 대화하려고 쉬는 날 없이 학교 현장을 찾아다니는 진짜 선생님! 이러한 스승이 있기에 베트남의 앞날은 밝고 소망스럽다.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에 스승과 같은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연로하신데도 열정적으로 일하고 계신 비결은 뭔가요?

첫째로 제게는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과 마음을 열고 대화하려는 자세로 살아왔는데, 사람들과 교류하고 협력하며 일하는 게 즐겁습니다. 둘째로 온 마음을 다해 열심히 일하지만 피곤하면 쉽니다. 짐을 지고 억지로 무언가를 이루려 하다 보면 될 일도 안 되지요. 바쁠수록, 중요한 일일수록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넓고 멀리 보며 가는 게 제가 오래도록 건강하게 일하는 비결입니다.

 

교수님이시지만 방송활동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베트남 TV에서 15년 동안 과학기술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라디오에서도 5년 간 방송했습니다. 그래서 베트남 사람들은 대부분 제 얼굴을 압니다. 저는 또 50권 정도의 책을 출간했고, 10~12차 국회의원을 역임했습니다. 국회에서 대변인으로서 수차례 발언하며 시민들의 목소리 역할을 했지요. 저는 국회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바른말을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제 자랑을 하거나 뭘 나타내려는 건 아닙니다. 어떤 사명을 가지고 지금까지 일해 왔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청소년 교육에 온 마음을 쏟는 응우옌 런 중 교수는 틈만 나면 중·고등학교를 방문해 강연하고 그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갖는다.
청소년 교육에 온 마음을 쏟는 응우옌 런 중 교수는 틈만 나면 중·고등학교를 방문해 강연하고 그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갖는다.

청소년들을 교육하는 일도 많이 하시지요?

현재 국제적인 단체인 아세안 생명과학연합회의 고문을 맡고 있습니다. 베트남 나이로 80살인데, 제 달력을 보면 하루도 빠짐없이 스케줄이 꽉꽉 채워져 있답니다. 조금 피곤하긴 해도 기쁘지요. 그중 가장 바쁜 일이 초·중·고등학교에 가서 학생들에게 강연을 하는 일입니다. 보통 2~3천 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하는데, 국가에서 학생들을 모아주고 지원을 해줍니다. 강연을 한 뒤 질의응답을 하고 학생들과 소통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 시간이 중요하지요. 그들의 고민, 요구사항, 비전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조언해 주는데, 대화하는 그 자체가 무척 즐겁습니다. 학생들이 서로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도 갖게 합니다.

청소년들을 교육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 중에 실패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단순히 도덕적인 차원의 내용과 기준들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그런 식으로 배우는 걸 싫어합니다. 저는 교사라는 위치에서 뭔가 지도하려 하기보다 그냥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러면 학생들이 잘 듣고 공감하고 받아들입니다.

 

가족 사진(뒷줄 맨 왼쪽이 응우옌 런 중 교수). 베트남에서 전설가족으로 불릴 만큼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교육자 집안이다.
가족 사진(뒷줄 맨 왼쪽이 응우옌 런 중 교수). 베트남에서 전설가족으로 불릴 만큼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교육자 집안이다.

어린 시절 전쟁을 겪으셨는데 특별히 힘든 시기를 보내지는 않으셨는지요.

저는 1938년에 태어났고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5년에 가족이 하노이로 이사했는데 1946년 12월에 프랑스와의 전쟁이 또 일어났습니다. 저희 가족은 아버지를 따라 이 도시 저 도시를 옮겨 다녔는데,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였어요. 먹을 것이 없어서 어머니가 산에 올라가 사람들이 다 뽑아가고 남아 있는 고구마를 찾아다니셨지요.

아버지는 우리가 살던 지역 전체의 교육을 담당하는 분이었는데 월급은 못 받고 한 달에 53킬로그램의 쌀만 배급받았지요. 쌀을 받으면 아버지는 그중 30킬로그램을 따로 떼서 학교에 다니며 나눠주셨어요. 아버지는 사회과학을 전공하신 교육자이셨습니다. 교과서와 사전 등을 편찬하셨고 중요한 시험 문제도 출제하셨지요. 엄격하고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셨습니다.

동생과 저는 항상 새벽에 공부했습니다. 낮에는 비행기가 계속 날아다니고 전기도, 석유램프도 없었으니까요. 빈 통에 솜을 넣고 열매에서 짜낸 기름으로 불을 피웠던 기억이 나네요. 포탄 터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는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모두들 최선을 다해 공부했습니다. 공부는 자신을 위해 하는 거니까요. 저는 18살에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베트남에 그런 사람이 두 명인데, 한 명이 저고 다른 한 명이 베트남 과학아카데미의 전 원장인 ‘응우옌 반 히에오’입니다. 젊은 시절 30개국 이상의 나라들을 다니며 많은 걸 배웠습니다. 그곳 사람들과 교류하고 새로운 문물을 경험하는 시간을 가졌지만 그곳에 머물면서 학위를 따거나 자격증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베트남에서 공부하고 모든 걸 했지요. 조국을 지킨다는 마음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베트남의 수도는 하노이다. 열대몬순기후로 열과 습기가 풍부해 생물이 자라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어 야생식물과 동물이 다양하게 분포한다. 세계 3대 쌀 수출국이며, 국민의 74%가 길게 발달한 해안 근처나 평지의 농촌에 살며 농사를 짓는다.밀·감자·옥수수·홍차·커피·고무·목재 등이 베트남의 주요 수출품이다. 베트남의 교육과정은 유아원(3년), 유치원(3년), 초등학교(5년), 중학교(4년), 고등학교(3년), 기술학교, 대학 교육으로 나뉜다. 고등교육은 과학의 실용화와 기술 보급 및 직업 훈련에 중점을 두고 있다.최근 교육개혁을 활발하게 추진 중이다. 행정구역은 하노이, 호찌민, 다낭, 하이퐁, 껀터의 5개 직할시와 58개의 성省으로 이루어져 있다.한국처럼 베트남 젊은이들도 군 복무를 해야 한다. 복무기간은 1년이며 대학교에서도 군사학을 기본적으로 배운다. 학기 중 15일간 군사훈련을 받는데, 나라를 지키고 사랑하는 마음을 배우며 실질적인 훈련을 받는 게 목표다.
베트남의 수도는 하노이다. 열대몬순기후로 열과 습기가 풍부해 생물이 자라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어 야생식물과 동물이 다양하게 분포한다. 세계 3대 쌀 수출국이며, 국민의 74%가 길게 발달한 해안 근처나 평지의 농촌에 살며 농사를 짓는다.밀·감자·옥수수·홍차·커피·고무·목재 등이 베트남의 주요 수출품이다. 베트남의 교육과정은 유아원(3년), 유치원(3년), 초등학교(5년), 중학교(4년), 고등학교(3년), 기술학교, 대학 교육으로 나뉜다. 고등교육은 과학의 실용화와 기술 보급 및 직업 훈련에 중점을 두고 있다.최근 교육개혁을 활발하게 추진 중이다. 행정구역은 하노이, 호찌민, 다낭, 하이퐁, 껀터의 5개 직할시와 58개의 성省으로 이루어져 있다.한국처럼 베트남 젊은이들도 군 복무를 해야 한다. 복무기간은 1년이며 대학교에서도 군사학을 기본적으로 배운다. 학기 중 15일간 군사훈련을 받는데, 나라를 지키고 사랑하는 마음을 배우며 실질적인 훈련을 받는 게 목표다.

아버지 이야기를 하셨는데 좀 더 말씀해 주세요. <투머로우>는 올 한 해 독자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소통하며 가까워지길 바라며 ‘아버지와 가까이’라는 캠페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군요. 아버지는 저의 롤모델이자 가장 존경하는 분입니다. 저희 가족은 딸 하나에 아들 일곱으로 8남매인데 그중 일곱 명이 박사이고 여섯 명이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굉장히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셨어요. 다행히 공부를 잘해서 장학금을 받아 공부를 계속하실 수 있었지요. 그에 반해 어머니는 부잣집 딸이셨어요. 17살 때 아버지와 결혼하셨고 친정을 떠나 아버지를 따라다니셨습니다.

부모님은 저희 8남매 모두에게 롤모델이십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다투시거나 심한 말을 주고받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저희들에게도 큰소리를 치며 대하시지 않고 항상 차근차근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삶이 건전하고 정리돼 있었기 때문에 저희들은 아버지가 하시는 걸 보고 배우며 그대로 따라했습니다.

아버지는 사회과학을 전공하신 교육자셨습니다. 교과서와 사전 등을 편찬하셨고 중요한 시험 문제도 출제하셨지요. 엄격하고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셨습니다. 저희뿐 아니라 많은 베트남 국민들이 아버지를 존경했습니다. 하노이에는 아버지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을 정도입니다. 아버지는 98세 때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암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건강하게 지내셨을 것 같아요. 아침마다 2시간씩 운동을 하고 찬물로 샤워를 하셨죠.

 

교육자이셨던 아버지를 그대로 따르다 보니 교육자가 되셨나 봅니다. 교수님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 계기는 뭔가요?

1954년에 프랑스에서 해방이 되었는데 하노이가 제일 먼저 해방되었습니다. 저는 곧바로 공부를 했지요. 많은 교사들이 하노이에 와서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물론 공책, 연필도 없었고 공부할 여건도 안 좋았어요. 그런데 저는 하던 공부를 빨리 마치고 학생들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1954년에 대학에 입학해서 1956년 졸업했습니다. 3년 할 공부를 2년 만에 마친 거죠. 졸업하고 학생들에게 미생물학을 가르쳐야 했는데, 제가 대학교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과목이었습니다. 1년 동안 준비 기간을 주어 러시아어와 중국어로 된 책을 번역해 읽으면서 자료를 찾았고, 베트남어에 없는 단어는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그때 만든 단어들이 지금까지 쓰이고 있지요. 그때부터 은퇴할 때까지 하노이대학교에서 교수로 있었습니다.

또 대학에서 과학을 가르치다 보니 연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도 해서 연구협회를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협회가 아니라 연구팀이었는데 10명으로 시작해서 이후 50명으로 늘어났고, 현재는 ‘베트남 미생물학 및 생명공학 연구소’가 되었습니다. 제가 정부 측에 천만 달러의 예산을 요청해 연구소에 장비와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연구원들 중에는 외국에서 온 사람들도 많았고, 일본 외의 여러 나라들과 협력하며 연구가 진행됐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주로 새로운 종자를 개발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베트남에는 생산할 기술이 없다는 게 아쉬웠죠. 개발을 해도 대량생산을 할 수 없어서 일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연구원들 중에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분들이 여러 명 있었는데, 미국에 머물면 돈도 많이 받고 대우도 좋습니다. 하지만 베트남으로 돌아와 일하면 월급이 아주 적지요. 베트남에서 일하는 연구원들은 정말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응우옌 런 중 교수는 생물학자로서 새로운 종자를 개발하는 일을 했다. 특히 그가 발견한 효모가 베트남 전쟁 때 병사들을 위한 치료제로 사용되었다. 공장이 없어서 모두 수작업으로 만든 이 치료제는 당시에 사용된 그 어떤 항생제보다 효과가 뛰어나 많은 부상병들의 생명을 구했다.
응우옌 런 중 교수는 생물학자로서 새로운 종자를 개발하는 일을 했다. 특히 그가 발견한 효모가 베트남 전쟁 때 병사들을 위한 치료제로 사용되었다. 공장이 없어서 모두 수작업으로 만든 이 치료제는 당시에 사용된 그 어떤 항생제보다 효과가 뛰어나 많은 부상병들의 생명을 구했다.

베트남 젊은이들이 겪는 문제는 주로 어떤 것들입니까?

다른 나라들과 비슷할 것 같은데요. 가장 큰 문제는 실업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현재 20만 명 정도의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데, 그들이 일할 데가 없는 건 아닙니다. 자신의 전공이나 적성에 맞는 일을 찾으려 하다 보니 그게 어려운 거죠.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육개혁’을 계획해 추진하고 있습니다.

마약 문제도 큽니다. 베트남 법대로 하면 마약을 거래하다 적발되면 총살형을 당하는데도 많은 젊은이들이 라오스에서 베트남으로 마약을 가져와 중국에 팝니다. 매우 위험한 일이지만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범죄를 저지르는 거죠. 또 게임중독에 빠져 밤새도록 게임을 하는 학생들이 허다합니다. 그걸 막기 위해 11시 이후에는 PC방 영업을 못 하게 했는데, 문을 닫아 놓고 안에서 여전히 게임을 합니다. 막을 수가 없어요.

알코올중독, 흡연, 성매매, 에이즈 문제 등으로 삶이 피폐해지는 청소년들 또한 너무 많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써보았지요. 법도 아주 엄격하게 만들었고요.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갈수록 심각해집니다. UN에서 더 이상 베트남에 에이즈 치료제를 공급해 주지 않아요. 베트남이 후진국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약을 돈 주고 사야하는데 정말 만만치가 않습니다. 머리를 싸매고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지만 중요한 건 정부가 어떻게 하냐가 아니지 않습니까. 청소년들의 마음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래서 인성교육, 마인드교육이 절실하다고 봅니다.

베트남은 이혼율이 매우 높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개개인의 의식이 바뀌어야 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초·중·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교까지 의무적으로 정기적인 인성교육을 받게 해야 합니다. 사실 그동안 학생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것과 어른을 공경해야 하는 것을 중심으로 가르쳐 왔습니다. 그런데 더 다양한 부분까지 확대해서 교육할 필요를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고난을 이겨내고 꿈을 이루어가는 데 필수적인, 강한 마인드를 베트남 청소년들에게 심어주는 것이 제가 해야 할 마지막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교육개혁을 추진하고 계신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요?

첫째는 공부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고요. 둘째는 현 사회와 산업에 맞춘 공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셋째는 지식만 말고 인성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인데, 문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스스로 헤쳐 나올 수 있는 마음의 힘을 갖추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학생 시절부터 이런 부분을 강조하여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은 졸업하면 수도나 큰 도시들에 남아 있으려 하지요. 하지만 이들을 시골로 돌아가도록 이끄는 것도 중요합니다. 꼭 농사를 짓지 않더라도 직업학교에 들어가서 다양한 기술을 배우게 하고, 농업 서비스 직종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교육개혁의 내용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베트남 학생들은 누구나 배우는 걸 좋아하고 계속 공부를 하고 싶어 합니다. 그게 굉장한 힘이고 장점이죠. 그래서 직업학교를 대학교 수준의 교육기관으로 끌어올리려 합니다. 졸업한 이후에 석사나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여러 방면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침을 세울 계획입니다.

 

교수님은 평생 학생들과 함께하며 인재를 키우는 일에 일생을 바치셨는데요. 참된 인재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겸손한 자세로 열심히 배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구열을 가진 사람이지요. 공부를 좋아서 하고, 또 즐기면서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인재는 자신만을 위해 공부하지 않습니다. 항상 남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고,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자세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넘어지더라도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는 불굴의 정신 또한 인재가 갖추어야 할 핵심 덕목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한국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갖고 계신가요?

2002년 월드컵이 열렸을 때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베트남 훈련팀 대표로 왔었는데요. 그때 느낀 점이 많습니다. 제가 이전에 한국에 대해 생각했던 것과 한국에 와서 본 것은 정말 달랐습니다. 베트남전쟁 때 한국이 미국을 지원했기 때문에 솔직히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직접 와서 도시와 사람들을 보고 놀랐습니다. 월드컵 대회를 치르는 능력도 훌륭했고 국민들의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무척 친절하기도 했고요. 8개 경기장을 모두 돌며 행사를 진행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감동적이었습니다. 저희 베트남 사람들은 모두 한국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서 돌아갔지요.

지난 10년, 특히 최근 3~4년간 한국과 베트남 사이의 교류가 활발하고 많은 부분에서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전에도 가까웠지만 더욱 가까워진 거죠. 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한류는 베트남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제가 베트남 어느 외국어대학교의 부총장으로 있는데, 그 대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과가 한국어과입니다.

 

2017년 여름 동생과 한국을 방문해 IYF 월드문화캠프에 참가했고, 여러 나라의 청소년 지도자들과 청소년교육 방향에 대해 토론하고 마인드교육의 적용 방법에 대해 논의했다.
2017년 여름 동생과 한국을 방문해 IYF 월드문화캠프에 참가했고, 여러 나라의 청소년 지도자들과 청소년교육 방향에 대해 토론하고 마인드교육의 적용 방법에 대해 논의했다.

교수님께서 한국의 청소년단체인 국제청소년연합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한국과 베트남 청소년 및 대학생 교류활동에 교수님이 다리 역할을 하시면서 양국 관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네. 지난 3월, 초대 주한 베트남 대사인 응우옌 푸 빙의 소개로 국제청소년연합을 알게 되었습니다. 청소년 관련 일을 하는 한국 단체라고만 듣고 막연하게 알았는데, 진행하는 활동들을 보니 놀라웠습니다. 특히 국제청소년연합의 마인드교육을 통해 많은 학생들이 실질적으로 변화한 사례들이 무척 인상 깊었는데요. 이러한 단체와 협력하여 일하면 심각한 베트남 청소년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만남을 가진 그 자리에서 현 베트남 청소년 문화체육을 담당하고 있는 부수상의 비서에게 연락해 부수상과의 면담을 요청했고, 베트남 공영방송국과 국회방송국의 청소년 프로그램 담당자들에게 국제청소년연합을 소개했습니다.

대학생 해외봉사활동 프로그램과 마인드교육을 베트남에 꼭 적용하고 싶습니다. 청소년들에게 새 마음, 새 삶을 심는 일에 제가 작은 역할이라도 할 수 있다면 영광스럽고 기쁘지요. 베트남 간부들과 교사들이 먼저 마인드교육에 대해 알고 배우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베트남 공청단과 문화부, 교육부가 국제청소년연합과 협력하여 일을 진행해 나가야 합니다. 그 일에 기여하고 싶고요. 베트남 부수상께서도 이에 공감하며 지지를 보내고 계십니다.

올해 여름에 한국의 여러 도시를 방문했고, 마인드교육이 적용되는 학교 현장도 살펴보았습니다. 건전한 마인드를 가지고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려는 젊은이들을 보니 한국의 미래가 매우 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베트남의 대학생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국제청소년연합의 프로그램들에 직접 참여해 보길 바랍니다. 저는 베트남 신문과 여러 매체들에 이러한 활동들을 소개하는 기자 역할도 하고 싶습니다. 한국의 마인드교육을 소개하고 학교 현장에서 시행할 수 있다면 베트남 미래 인재들의 마음속에 한국은 확실한 친구의 나라로 자리 잡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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