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비아 장관 클라우디아나 A. 콜

아프리카의 리더들은 ‘우리에겐 두 가지 자원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석유와 천연가스, 광석, 귀금속 등 막대한 지하자원이요, 둘째는 청년이라는 인적자원이다. 인구의 42.56%가 14세 이하라는 통계가 보여주듯, 세계에서 가장 젊고 활기 넘치는 대륙이 아프리카다. 그래서 아프리카의 리더들은 어떻게 청년들을 일꾼으로 길러내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을지 활발히 연구하고 논의한다. 클라우디아나 콜 장관도 그중 하나다.

영토 10,380km2로 대한민국의 1/9 크기인 작은 나라 감비아. 아프리카 서부에 위치해 감비아강을 따라 길쭉한 띠 모양으로 펼쳐진 감비아는 근로자의 75%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1인당 GDP는 약 490달러다. 2017년 기준 감비아의 인구 212만으로, 그중 57%인 120만 명이 16세 이하의 청소년이다.

클라우디아나 콜 장관은 그 120만 청소년의 교육정책을 총괄하는 감비아 교육계의 수장이다. 그녀의 인생행보를 따라가다 보면, 학생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모범생 반장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때는 여학생 대표를 맡았고, 대학에서는 과 대표에 선출되었으며, 영국 뉴캐슬대학교에서 유학할 때도 학생 대표로 교무위원회에 참여했다. 하지만 ‘나는 학창시절 그리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다’는 게 그녀의 말이다.

 

장관님은 학창시절 어떤 학생이었습니까?

집안 형편이 그렇게 부유하지는 않았어요.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고 큰이모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조카 교육에 유난히 관심이 많으셨던 큰이모는 늘 제게 ‘사람은 모름지기 공부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어요. 중등학교 때까지 학비도 모두 이모께서 대주셨습니다.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공부를 게을리한 탓에 그 부를 지키지 못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인생을 경영하고 자신의 것을 지키고 싶다면 공부는 기본이지요. 물론 그때는 그런 이모의 뜻을 헤아리기에 너무 어렸지요. 이모께서 열심히 공부하라고 독려해 주시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것입니다.

 

7월 6일 부산 해운대의 누리마루 APEC 하우스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부장관 포럼에서 다른 장관들과 함께 행사장으로 이동하는 콜 장관.사진 속 맨 왼쪽부터 모잠비크 법무부 차관, 말라위 교육과학기술부차관, 나미비아 고등교육부 부장관.
7월 6일 부산 해운대의 누리마루 APEC 하우스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부장관 포럼에서 다른 장관들과 함께 행사장으로 이동하는 콜 장관.사진 속 맨 왼쪽부터 모잠비크 법무부 차관, 말라위 교육과학기술부차관, 나미비아 고등교육부 부장관.

대학시절은 어땠나요?

이모의 가르침을 따라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놀 때도 열심이었어요. 삶에는 균형이 필요하니까요. 한 가지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사람은 시야가 좁아지고, 그러면 심성이 균형있게 발달할 수 없습니다. 놀 때는 주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놀았어요. 덕분에 사회성을 기를 수 있었고, 저와 성격이 다른 사람들과도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덕분에 뛰어난 학생이 아니었음에도 리더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도서관에서 책만 보는 공부벌레는 절대 다른 사람을 포용할 수 없습니다.

 

교사, 힘들지만 그만큼 가치 있는 직업

내년이면 우리 나이로 환갑을 맞는 콜 장관은 생애 중 절반 이상인 36년을 교사로 보냈다. 아동교육에 유난히 관심이 많은 그녀는 장관이라는 직함보다 교사라는 직함을 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교직은 곧 성직聖職’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교육관은 과연 어떤 것일까?

 

여교사로서 개구쟁이 아이들을 가르치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맞아요. 어떤 학생들은 너무 고집이 세서 지도하기가 어렵습니다. 교사란 부담스런 직업이죠. 수업을 하기 전에 준비도 철저히 해야 하고, 수업이 끝나면 교과서를 걷어서 수업 내용을 잘 이해하고 답은 맞게 썼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밤을 새기도 하죠. 피곤한 일이지만, 그래야 학생들이 제 설명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할 수 있거든요.

주말도 공휴일도 제게는 휴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학생들을 더 재미있게 가르칠까?’ 연구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거든요. 교실에서 하는 일 못지않게 공문 처리나 생활지도 등 교실 밖에서 해야 하는 일도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교사가 되기를 꺼립니다.

 

포럼이 끝난 뒤 열린 리셉션에서 국제청소년연합 대표고문 박옥수 목사로부터 기념패를 수여받았다.
포럼이 끝난 뒤 열린 리셉션에서 국제청소년연합 대표고문 박옥수 목사로부터 기념패를 수여받았다.

그런 힘든 일을 어떻게 40년 가까이 계속할 수 있었습니까?

인재를 키워낸다는 사명감 때문이었죠. 그렇게 열심히 가르친 덕분에 제 제자들은 현재 요직에 진출해 있습니다. 감비아 법무부 장관이 제자였고요, 대법관 중 2명도 제가 가르친 학생이었습니다. 그밖에도 아프리카는 물론 미국, 유럽에서 사는 제자들도 있습니다. 제가 장관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SNS로 축하메시지를 보내온 제자들도 많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생각할 때면 행복합니다. 힘들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지요. 그래서 교직을 성직이라고 하나 봅니다.

 

고생은 세월과 함께 추억이 되고

지난 2000년, 그녀는 영연방 장학금을 받고 영국의 뉴캐슬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마흔둘의 나이에 늦깎이 유학생이 된 것이다. 6년 뒤 교육경영학 석사와 철학 학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기까지, 그녀는 낯설고 물설은 영국 땅에서 호된 고생을 해야 했다. ‘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이야기’ 라며 콜 장관은 옛 추억을 술술 쏟아놓았다.

 

영국 유학을 하며 겪은, 가장 큰 문화적 충격은 무엇입니까?

컴퓨터였지요. 그때 감비아에는 컴퓨터가 막 도입되던 터라 유학 가기 전까지 컴퓨터를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영국에 가서야 처음 컴퓨터를 접했는데, 레포트 등 과제물은 무조건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해서 제출해야 했습니다. 사용법을 전혀 몰라 단기 속성코스에 들어갔는데, 여강사님이 ‘이렇게 해 보세요. 그건 이렇게 하는 겁니다. 여기로 들어가 보세요’ 식으로 얼마나 진도를 빨리 나가는지 따라잡기에 벅찼어요. 별로 배운 것도 없는 것 같아요, 하하.

그렇게 컴퓨터를 배워 레포트를 쓰기 시작했어요. 컴퓨터에 서툴다보니 워드프로세서로 바로 쓰는 게 아니라 손으로 쓴 레포트를 컴퓨터실로 가져가 워드프로세서에 입력하는 식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워드프로세서로 여러 페이지 레포트를 작성한 뒤 방에 가서 잠자리에 들었어요. 다음 날 아침, 못 다 쓴 레포트를 마저 작성하려고 보니 파일이 온데 간데없더군요. 힘이 쫙 빠졌지요. 주위에서 저를 도와주려고 했지만 끝내 파일은 찾을 수 없었고, 처음부터 레포트를 다시 써야 했습니다.

 

7월초 부산의 벡스코에서 열린 리더스컨퍼런스에서 발표를 마친 나이지리아팀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콜 장관의 바로 오른쪽남성은 나이지리아청소년부 장관, 그 뒷줄 남성은 콜 장관의 비서실장이다.
7월초 부산의 벡스코에서 열린 리더스컨퍼런스에서 발표를 마친 나이지리아팀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콜 장관의 바로 오른쪽남성은 나이지리아청소년부 장관, 그 뒷줄 남성은 콜 장관의 비서실장이다.

그 외에 다른 힘든 점은 없었습니까?

제가 살던 곳과 날씨나 학습환경 등이 너무도 달라 고생을 많이 했지요. 처음 갔을 때는 공부 외에 다른 할 일이 없어 과제를 하느라 학교 갈 때 빼고는 집 밖에 나갈 일이 없었어요. 눈을 처음 본 것도 영국에서였습니다. 12월로 기억하는데, 어느 날 일어나보니 온 세상이 하얗게 눈으로 덮여 있더군요. 하지만 어찌나 춥던지, 아프리카와 달리 유럽에서는 하늘에 해가 떠도 얼마든지 날씨가 추울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한번은 창 밖을 보니 해가 떴길래 ‘오늘 춥지는 않겠구나’ 하고 외투도 입지 않은 채 학교로 갔지요. 15km를 갔다가 ‘이대로는 얼어 죽겠다’ 싶어 다시 집으로 돌아와 외투를 챙겨왔지요. 고향이 몹시 그리웠던 적도 많아요. 하지만 어려울 것 같은 공부도 ‘이 먼 나라까지 온 이상 뭐라도 해놓고 가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더니 해낼 수 있었어요. 무슨 일을 하든 목표로 한 결과를 얻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습관도 그때 생겼지요.

 

힘도 지혜도 모일수록 강해진다

유학을 마치고 공직에 복귀한 콜 장관은 이후 탄탄대로를 달렸다. 초등학교 두 곳의 교장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며, 초중등교육부에서 여성교육 진흥 부서의 팀장으로도 활약했다. 하지만 그녀의 공직생활의 절정은 단연 ‘교육 기회의 평등’을 실현시킨 어퍼리버Upper River 지역의 교육감 시절이라고 하겠다.

 

가는 곳마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항상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뭔가 결정할 사안이 생기면 혼자 생각해서 결론을 짓기보다 주변 사람들을 불러놓고 의논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 문제는 저 혼자 결정할 수 없습니다. 다 같이 결정합시다” 하고요. 저는 그저 ‘다 같이 하자’고 이야기한 것밖에 없죠.

 

인터넷에서 장관님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 어퍼리버에서 교육감으로 재직했던 시절의 이야기가 늘 따라나옵니다. 그때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어퍼리버는 감비아의 5개 행정구역 중 하나입니다. 감비아 강 상류에 있어 어퍼리버Upper River라는 이름이 붙었는데요. 수도에서도 가장 먼, 동쪽 끝에 떨어진 시골지역이라 가난한 사람들이 많고, 갓 태어난 아기들 1천 명 중 82명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의료 및 위생시설이 낙후된 곳입니다. 누구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곳이지요.

하지만 저는 어퍼리버에 자원해서 가기로 했습니다. 더 많은 여학생들이 교육을 받을 기회를 누리도록 돕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여학생들이 학교에 가 보지도 못하고 다니더라도 졸업을 하지 못하고 그만두어야 하는 곳, 그곳에 변화를 일으키고 싶었습니다. 여학생들이 10대 때 임신을 하거나 부모의 강요로 일찍 결혼하는 바람에 공부를 그만두는 경우가 가장 많았고요. 교사들의 불성실한 근무태도도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한 홍보활동과 직원들과의 토론을 통해 문제점을 해결해 나갔습니다. 다행히 많은 부모님들께서 일찍 결혼하는 풍습의 잘못된 점을 이해하고 개선에 동참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9년을 근무하는 동안 여학생들의 취학률·진학률이 몰라보게 높아지고 심지어 대학에 들어가는 여학생도 나왔습니다. 가족을 떠나 혼자 그곳에서 근무하면서 일에 많은 시간을 쏟았지요.

 

감비아 교육 3대 과제: 남녀평등, 의무교육, 마인드교육

2016년 12월 1일은 감비아 역사에 길이 남을 날이었다. 1996년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로 대통령에 올라 21년이나 독재를 일삼던 야히아 자메가 대선에서 패배하고, 연합민주당의 아다마 배로Adama Barrow가 새 대통령에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취임식에서 ‘감비아는 새롭게 출발할 것’을 약속한 배로 대통령은 클라우디아나 콜을 초중등교육부 장관에 임명하는 등 개각을 단행했다.

 

새 대통령이 장관님을 초중등교육부 장관에 임명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떠셨습니까?

충격이었죠. ‘왜 나를 장관으로 임명하신 걸까? 나는 정치인도 아니고, 정치에 관심도 없는데….’ 그러다가 대통령의 마음을 더듬어보게 되었습니다. 대통령께서 제가 정치인이 되길 바랐다면, 장관에 임명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대통령께서는 제가 40년 가까이 교직에만 몸담아오며 이룬 성과들을 보고 ‘이 사람이 감비아의 교육을 변화시켰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장관에 임명하셨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로서는 큰 영광이죠. 대통령을 실망시켜 드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장관직을 수락했습니다.

 

장관으로서 일하다 보면 하루하루 스케줄이 무척 빡빡할 것 같습니다.

아침 8시 30분에는 반드시 사무실에 도착합니다. 아침에 외부 약속이 잡혔는데, 약속장소가 집에서 가까우면 사무실에 들르지 않고 바로 약속장소로 갑니다. 다른 외부 일정이 없으면 사무실에서 오후 4시까지 일을 하는데, 회의를 하거나 사람들을 만나지요. 퇴근시간이 되어도 일이 덜 끝나면 퇴근하지 않고 6시, 또는 8시까지 남아서 업무를 마무리합니다. 제 업무처리의 가장 큰 원칙이 바로 ‘그날 일은 그날 끝내자’입니다. 일을 끝내지 못하면 절대 퇴근하지 않습니다. 또 아무 할 일이 없더라도 4시 전에는 절대 퇴근하지 않습니다.

물론 퇴근시간이 지난 뒤에 회의나 모임이 잡힐 때도 많지요. 중요한 건 계획을 꼼꼼히 세우고 잘 지키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다이어리를 갖고 다니면서 일정이나 약속, 그날 할 일 등을 빠짐없이 기록합니다. 자기 전 반드시 다이어리를 펴서 다음 날 일정을 확인하고 잠자리에 듭니다.

 

장관으로서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첫째, 교육기회의 남녀 평등입니다. 지금은 그나마 남녀 평등이 많이 실현된 편이지만, 얼마 전만 해도 초등·중등·대학교 등 각급 학교에 가 보면 남학생 비율이 훨씬 높았습니다. 지금은 초·중등학교 남녀 학생 수가 거의 같습니다. 대학교는 여전히 남학생이 많지만, 초·중등학교 남녀 비율이 비슷하니 앞으로 대학에서도 남녀비율이 비슷해질 겁니다.

둘째, 의무교육입니다. 현재 감비아는 의무교육이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학교를 다니다 그만두는 어린이가 많고, 아예 학교에 가 보지도 못한 어린이도 많습니다. 대부분 집에서 부모님을 도와 소를 키우고 집안일을 하는데, 이는 국가발전에 역행하는 일입니다. 의무교육이야 말로 국가 발전을 위한 우선적 과제입니다.

마지막으로 마인드교육을 도입하려고 합니다. 마음의 세계가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사람은 설령 최고의 교육을 받고 아무리 지식이 많다고 해도 별 소용이 없습니다. 그 지식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인드교육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마인드교육을 받아야 지식도 맘껏 활용할 수 있고, 새로운 목표를 향해 계속 달려나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밝은 사람은 무슨 일이 생겨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일을 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어둡고 부정적인 사람은 부정적이고 비생산적인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어떤 마인드를 갖고 있느냐가 그 사람을 결정짓습니다. 청소년들이 마음의 교육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청소년들이 소통하고 교류하며 밝은 마음을 갖길 바랍니다. 사람은 마음이 꽉 차 있어야 말도 할 수 있고 일도 할 수 있습니다.

‘학생은 가르침의 대상이 아닌, 교육서비스를 받는 고객’이라고 생각한 마음가짐 덕에 콜 장관은 교육가로서 40년 외길을 걸어올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제는 그녀에게 ‘마인드교육’이라는 새 목표가 생겼다. 일선 교사로, 행정가로, 교육감으로 남녀 교육 기회의 평등을 실현해 온 콜 장관이 앞으로는 어떻게 마인드교육을 활용해 조국 발전에 기여할지 기대된다.

 

키워드로 보는 감비아

소설 <뿌리>의 배경
감비아강이 관통하는 감비아는 지리상 내륙진출이 용이해 17세기 후반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쟁탈전이 영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1783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미국의 흑인 작가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의 무대가 바로 감비아다. <뿌리>는 1767년 감비아에서 미국으로 끌려와 노예 생활을 했던 쿤타 킨테와 그 후손들의 고통을 담은 명작소설이다.

정치현황
1965년 영국에서 독립한 감비아는 총리였던 다우다자와라가 1970년 대통령에 올랐다. 부패 논란이 끊이지 않던 자와라 정부는 1994년 육군 중위 야히아 자메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24년 만에 새 정부로 교체된다. 그러나 자메 대통령 역시 민주주의를 탄압한다는 국내외의 강한 비판에 휩싸였고, 지난 12월 열린 대선에서 패배하면서 아다마 바로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현재 감비아는 배로 대통령을 중심으로 국가발전의 원동력을 찾는데 힘쓰고 있다.

주요산업은 농업
농업이 주요산업인 감비아의 최대 수출품목은 직물, 목재, 땅콩 등이 있으며 감비아강에서 잡히는 물고기 등 수산물이 풍부하다. 국토가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해 좁은 탓에 광물자원은 다양하지 않으나 규사, 티타늄, 보크사이트 등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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