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을 발견한 것은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던 오후, 바쁜 걸음으로 공원을 걸어가던 길이었습니다. 뜨거운 햇살을 피해 공원길 한쪽 나무 그늘 의자 아래 모여 있던 사람들 속에 그들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책을 들고 소리 내어 읽고 있었고 또 한 사람은 눈을 멀리 응시한 채 읽어주는 책을 듣고 있었습니다. 제법 긴 세월 동안 ‘책 읽어주는 사람’으로 살아오면서 공원에서 책 읽어주는 사람을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습니다. 어찌나 반갑던지 가던 길의 방향을 틀어 나무 그늘 아래로 가 슬쩍 그들 옆에 앉았습니다.

 

책 읽어주는 사람과 만나다

그늘에 쉬러 온 척 의자에 앉아 그들이 읽고, 듣던 책을 함께 들었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몸을 살짝 앞으로 내밀었더니 조근조근 책 읽어주는 목소리가 귀에 쏙 들어왔습니다.

읽어주는 사이사이 듣는 사람의 리액션이 있고, 읽어주는 사람이 거기에 덧붙여 이야기하고, 다시 책 내용으로 돌아가 계속 읽어나가고, 또 듣는 이의 리액션과 읽어주는 이의 반응...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책 읽어주기는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소설이었습니다. 화자인 ‘나’가 연주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고등학교 윤리 선생이고, 연주는 학생입니다. ‘나’가 말하는 방식을 들어보니 ‘나’는 ‘참 나쁜 사람’입니다.

‘그게 나라고 뭐 달랐겠니.’ 라는 마지막 문장을 서늘하게 남기고 소설은 끝났습니다.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소설 읽기가 끝났을 때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책을 읽어주고 듣는 모습이 너무 반가워 옆에 앉아 듣게 되었노라고, 계속 들어도 되겠느냐고 허락을 구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고가던 애정의 기운이 제게도 전해졌습니다. 소설뒤에 이어진 작가노트와 해설까지 마저 들을 수 있었습니다.

책 읽어주기가 끝난 후 두 분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두 분은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어떻게 책을 읽어주게 되었는지 궁금했습니다. 더군다나 두 분이 읽고 있던 책은 ‘책 좀 읽는다’ 는 사람들이 읽을 만한 책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사연이 더더욱 궁금했습니다.

두 분은 엄마와 딸이었습니다. 1년에 300권 이상 책을 읽을 정도로 책읽기를 너무 좋아했던 엄마는 눈 건강을 위해 더 이상 책을 읽지 말라는 안과 진단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책을 읽을 수 없는 상황이라니, 코끝이 찡했습니다.

책을 못 읽게 되자 책 대신 텔레비전을 보게 되셨지만 텔레비전도 눈 건강에 나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딸은 엄마가 텔레비전을 적게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책을 읽어드리게 되었답니다. 처음에 엄마에게 책을 읽어드리기 시작했을 때는 책을 읽어주는 딸도, 듣는 엄마도 어색했다고 합니다. 특히 책을 눈으로, 마음으로 읽던 엄마는 ‘듣는 책’에 집중하기 어려웠고, 지금도 책 읽어주는 ‘소리’에 집중하려고 노력중이시랍니다. (15살 이전에 듣기 경험을 많이 가진 사람은 언제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듣기에 익숙해지려면 노력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안정적인 호흡, 잔잔한 목소리,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여백. 하루이틀 책을 읽어드린 게 아닌 것 같았습니다. 김훈의 장편 <칼의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드렸다고 합니다. 두 분 다 <칼의 노래>가 참 좋았답니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도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책 읽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좋았다’라는 말 한 마디면 충분합니다.)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도 재미있었다고 하셨고, 아홉살 무렵 읽었던 책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저도 처음 들어보는 책들이었습니다. 서로 아주 오래전부터 알아온 사람들처럼 신나게 책 이야기를 한참동안 나눴습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책 읽어주기

책을 읽을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막막했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책을 읽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자책 리더기로 책을 읽을 수는 있겠지만, 사람이 읽어주는 책과 리더기가 읽어주는 책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책 읽어주기를 경험해보면 책 읽어주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는 우정의 공기가 만들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책을 읽는 사이사이, 읽어주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오고가는 이야기는 공감의 폭을 더 넓혀줍니다.

그러다보니 책 읽어주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는 따뜻한 눈빛이 오고갈 수밖에 없습니다. 공원에서 만났던 책 읽어주는 딸과 듣는 엄마가 그토록 평온한 표정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책에 찔리다

그들이 읽고 있던 책을 사러 동네 서점으로 달려갔습니다. 이야기 중간부터 듣게 된, 연주가 나오는 그 소설을 처음부터 읽고 싶었습니다.

<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의 맨 앞에 실린 작품, 임현의 <고두(叩頭)>에서 연주를 만났습니다. 연주의 이야기는 아팠습니다. 윤리교사의 자기기만이 역겨웠습니다. (여러분의 상상대로 연주와 윤리교사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다.)

‘인간들이란 게 말이다, 원래 다들 이기적이거든. 태생적으로 그래. 처음부터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 거란다. 그게 나라고 뭐 달랐겠니’라고 윤리교사는 자기변명을 합니다. 섬세하고 집요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상력

<키다리아저씨>에 나오는 주인공 주디는 키다리아저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나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상상력은 자신을 타인의 입장에서 보게 해 주지요. 친절과 연민과 이해심을 길러줘요.’

윤리교사에게 부족했던 것은 상상력이었습니다. 자신이 연주가 되어보는 것, 연주의 입장에 서 보았다면 윤리교사는 그렇게 지독하게 이기적이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 보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느끼고 이해하기에 책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책 읽어주기를 시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친구여도 좋고, 부모님이어도 좋습니다. 처음엔 어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서히 익숙해질 것입니다. 읽어주는 책이 소설이면 더 좋겠습니다.

읽어서 써먹을 데 없을 것 같은 소설이 적어도 우리를 괴물로 만들지는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책을 읽고, 책을 읽어줍시다!

 

<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 작품집>
임현 외/문학동네/2017

8,90년대에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읽었다면 앞으로는 젊은작가상 수상 작품집을 읽어도 좋겠다. 2010년에 제1회 젊은작가상 수상 작품집이 나왔고, 올해로 여덟 번째 작품집이 출간됐다.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알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출간된 지 1년 동안은 5,500원에 판매한다.

 

<대한민국 마음 보고서>
하지현/문학동네/2017

언제부터인가 하지현 선생님의 새 책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읽게 되었다. <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과 나란히 두고 읽었다. <고두>도 아팠고, <대한민국 마음 보고서>도 아팠다. 하지만 이 책에선 희망을 보았다. 버티고, 연대하고, 행동하라! 여기서 내가 얻은 세 단어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의 삶이 사회 변화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잘 설명되어 있고, 인간다운 삶을 살기위해 어떻게 노력하고 있는지, 어떻게 노력해나가야 될지에 대한 질문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허남숙
책 읽어주는 사람, 역사학을 전공했으나 역사책보다 문학책 읽는 것을 더 좋아했다. 스무 살 무렵, 레몽 장의 <책 읽어주는 여자>를 읽고 ‘책 읽어주는 여자 사람’이 되기를 꿈꾸었고,TV 교양프로그램, 어린이프로그램 구성작가로 한동안 일했다. 요즘은 도서관과 지역아동센터에서 어린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일을 하고 있으며, 책 읽어주는 친구 엄마, 책 추천하는 이모, 책 읽기를 권하는 동네 언니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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