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타리클럽 3750지구 채희우 총재

“군인, 직장인, 대학교수, 기업 대표 등 많은 일을 해 봤지만, 로타리클럽에서 일하며 나눔을 실천하는 지금이 가장 행복합니다.” 가진 것이 없어 고통했던 밑바닥 삶을 경험했기에 없는 사람의 설움을 잘 이해할 수 있고, 그렇기에 나누고 베푸는 기쁨이 더 크다는 채희우 총재. 그는 오늘도 더 큰 나눔을 위해 쉼없이 달리고 있다.

바이러스를 정복한 최초의 단체, 로타리
1905년 결성된 국제로타리클럽(로타리)은 현재 220여개국에 3만 3천여 개의 지부(클럽)와 120만 명의 회원을 보유한 국제적인 연합 봉사단체다. ‘초아超我의 봉사’라는 모토 아래 각 클럽들은 불우이웃 돕기, 장학금 지원, 바자회 등 지역사회 실정에 맞는 다양한 봉사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로타리가 가장 역점을 두고 진행해 온 사업은 단연 소아마비 퇴치 사업이다. 주로 아동들에게 발병해 ‘소아마비’라는 이름이 붙은 이 병은, 바이러스가 신경계를 침범해 팔다리를 마비시키고 심하면 목숨까지 앗아가는 무서운 질병이다. 1950년대 초 미국에는 매년 수만 명씩 환자가 발생했다. 우리나라도 40여 년 전까지 학교마다 학급에 한두 명은 소아마비로 불구가 된 아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1955년 백신이 개발되며 소아마비 환자 수는 차츰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의 어린이들은 그 혜택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이에 로타리는 1979년 필리핀을 시작으로 세계 각국을 돌며 소아마비 백신 보급에 착수했다. 지금까지 로타리를 통해 백신을 접종받은 아동 수는 122개국 25억 명에 이른다. 소요된 비용은 약 13억 달러(1조 3천억 원), 로타리 회원들이 내거나 후원받은 기부금으로 마련된 액수다. 로타리 회원들의 이같은 노력에 힘입어 소아마비는 마침내 완전퇴치를 눈앞에 두고 있다. 2015년 전세계적으로 발생한 소아마비 환자 수는 51명에 불과하다. 3년 정도 경과를 지켜봐야 하지만, 소아마비와의 싸움은 사실상 끝난 셈이다.
‘이는 한 국가나 단체가 바이러스와 싸워 이긴 최초의 사례’라는 게 채 총재의 말이다.
2015년 8월을 기준으로 국내에는 62,354명의 로타리 회원들이 18개 지구에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다. 채희우 총재는 그 중 수원, 안양, 평택 등 경기도 남부지역을 연고로 하는 3750지구 4천여 명의 회원들을 이끄는 수장이다. ‘로타리 지구 총재가 된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는 말의 의미가 자못 궁금했다. 로타리 회원 중 상당수는 기업가나 전문직 종사자다. 그런 로타리에서 지구 총재로 선출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회원들에게 지역과 로타리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일꾼이라는 신뢰를 얻고 있다는 의미다. 사회적으로도 능력과 성공을 인정받았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능력, 성공, 인정 등의 단어는 그가 말하는 행복의 이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구 총재의 주요업무 중 하나가 회원들의 기부 및 봉사활동 참여를 독려하고, 외부 후원금을 모금하는 일입니다. 거의 매일같이 지구 내 회원들을 만나 모임을 가지며 기부를 독려합니다. 물론 저 역시 여러 기부활동에 꾸준히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모인 돈이 다른 사람을 위해 쓰인다는 것이야말로 더없이 큰 기쁨이고 보람이죠.”

국제로타리클럽Rotary International·RI1905년 미국 시카고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폴 해리스Paul Harris는 평소 사업가나 전문직 등 다양한 직업인들이 모여 어려운 이웃을 돕는 봉사단체를 만들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 구상이 실현되어 결성된 모임이 시카고 로타리클럽으로, 현재 국제로타리클럽의 시초다. ‘로타리Rotary’란 초창기 회원들의 사무실에서 돌아가며 모임을 가진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인종, 정치적 성향, 종교에 관계없이 누구나 가입할 수 있으며, 빈곤과 기아 퇴치, 환경보호, 폭력해소 등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국제로타리클럽Rotary International·RI1905년 미국 시카고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폴 해리스Paul Harris는 평소 사업가나 전문직 등 다양한 직업인들이 모여 어려운 이웃을 돕는 봉사단체를 만들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 구상이 실현되어 결성된 모임이 시카고 로타리클럽으로, 현재 국제로타리클럽의 시초다. ‘로타리Rotary’란 초창기 회원들의 사무실에서 돌아가며 모임을 가진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인종, 정치적 성향, 종교에 관계없이 누구나 가입할 수 있으며, 빈곤과 기아 퇴치, 환경보호, 폭력해소 등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전쟁처럼 치열하게 했던 군생활
기업들의 인수합병M&A이나 경영진단, 정부 자문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경영연구소 소장으로 남부럽잖은 성공을 거둔 채희우 총재. 하지만 그의 삶이 처음부터 승승장구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젊은 시절은 갖은 고생과 굴곡들로 채워져 있다. 서울공고 3년 장학생인 그는 늘 교내 상위 1%에 들 만큼 학업성적이 뛰어났다. 하지만 어느 날, 뜻하지 않은 화재로 집이 온통 불에 타면서 그를 비롯한 7남매는 뿔뿔이 흩어져야 할 형편에 처했다. 그는 홀로 자취를 하면서도 대학 진학을 목표로 공부를 계속했다. 하지만 등록금이 발목을 잡았다.
“일단 첫 학기 등록금만 마련되어 입학하면 그 후로는 장학금을 받아 학비를 해결할 자신이 있었어요. 하지만 집에서는 등록금을 대 줄 형편이 못 되었지요. 고민하다 결국 군 입대를 결심했습니다.”
그가 자대배치를 받은 곳은 바로 특전사 1공수여단이었다. 특전사가 어떤 곳인가. 해병대와 더불어 힘들기로 둘째라면 서러운 부대 아닌가. 특히 그가 복무할 당시 1공수의 분위기는 살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북한에서 보낸 무장공비가 1공수 관할지역을 맘껏 휘젓고 다니다 임진강을 거쳐 돌아간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육군본부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은 여단장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강도 높은 훈련을 실시했다. 덕분에 신참 하사 채희우는 영문도 모른 채 호된 고생을 해야 했다.
“강한 용사를 육성한다는 구호 아래 링을 설치하고 아침마다 중대 대항 권투시합을 했습니다. 중대에서 한 명씩 링에 올라가 일대일로 싸움을 벌여 한 사람이 쓰러지면 다음 사람이 올라가는 식으로 마지막 한 명이 항복할 때까지 계속했습니다. 계급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고, 유혈이 낭자하는 것은 예사였어요. 대대끼리 태권도 시합도 자주 했는데, 자기 대대가 지면 진급에 불이익을 주었기에 대대장들은 목숨을 걸고 임할 수밖에 없었죠.”
구덩이에 열두 명이 들어가 난투극을 벌이는 참호격투, 공 하나를 놓고 100명이 달려드는 전투럭비…. 특히 행군은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40kg 무게의 군장을 메고 엿새 만에 400km를 주파하는 천리행군은 특전사의 트레이드마크다. 영하 20도의 추운겨울, 그는 태백산 칼바람을 몸으로 맞고, 눈녹은 물로 꽁꽁 언 김포평야를 군홧발로 깨며 달려야 했다.
“군화는 방수가 안 되니까 발이 젖지 않게 비닐로 감싸고 걸었지요. 끝도 없이 펼쳐진 벌판에서는 기준점으로 삼을 만한 산이나 봉우리가 없어 지도도 별 소용이 없습니다. 한참 가다가 ‘야, 길 잘못 들었다. 돌아가자’며 애써 왔던 길을 돌아가 다시 걷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중간에 30분씩 취침시간이 주어지면 텐트 치는 시간조차 아까워 부드러운 땅에 텐트를 깔고 그 위에 누워 잠을 청했지요.”

재산은 가져갈 수 있어도 지식은 가져갈 수 없다
수중침투, 고공낙하, 폭발물 설치 등 힘든 특수전 훈련을 소화하면서도 그는 결코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틈 날 때면 독서를 즐겼고, 대학을 졸업하고 입대한 후배한테 저녁마다 영어와 수학을 배웠다. 장기복무를 마치고 제대한 뒤에는 대우중공업에 취직해 자재과에서 근무했다. 나눠주고 베풀기 좋아하는 그의 성품은 여기서 발휘된다.
“어려서부터 저희 집도 가난했지만 불쌍한 사람을 만나면 빵 하나 사먹을 정도의 돈을 꼭 건네곤 했습니다. 대우에서 근무할 때도 장갑 같은 게 남으면 챙겨두었다가 용접공들에게 주었지요. 용접공은 장갑이 금방 해어지기 때문에 자비로 더 구입해 쓰는 사람이 많았거든요. 어쩌면 그때부터 제 안에 로타리 정신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하하하.”
대우에서 일하며 번 돈을 모아 학비를 마련한 그는 마침내 그토록 꿈꾸던 대학에 진학한다. ‘사업을 할까, 공부를 할까?’를 놓고 저울질하던 그가 공부를 선택한 데는 까닭이 있었다.
“내 재산은 가져갈 수 있어도 지식은 가져갈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그때가 80년대 중반이었는데 회사마다 구조조정이 심했습니다. 정리해고된 지인들이 먹고살기 위해 사업을 시작했지만, 제대로 자리 못 잡고 어려워하는 걸 보며 ‘나도 나만의 지식과 기술을 갖춰야 살아남겠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어요.”
몇 살이나 어린 동기생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면 몇 배나 더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생활비를 아끼고 공부에만 집중할 요량으로 그는 고시원 생활을 선택한다. 그렇게 5년을 지내다 동향 친구인 아내(고은경 전 한국여성세무사회 회장)를 만나 결혼도 했다. 날짜도 잊혀지지 않는 1990년 12월 29일, 두 사람은 부천 역곡의 반지하방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보일러가 없어 석유곤로 하나만으로 밥을 짓고 추위를 해결해야 했지만, 참으로 행복한 신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시련이 찾아왔다.
“아내가 그만 유산을 하고 말았어요. 병원비를 내야 하는데, 돈이 한 푼도 없어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그런데 아내가 통장을 내밀더군요. 학교를 다니며 받은 장학금이 든 통장이었어요.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 다시는 가족을 고생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밑바닥생활도 겪어봐야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
그의 다짐은 정말이 되었다. 그날 이후, 그가 하는 사업은 신기하리만치 속속 성공을 거두었다. 무려 13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아파트에 당첨되는가 하면, 그가 설립한 우경경제연구소는 10여 년 만에 7층 사옥을 지어 독립할 정도의 규모로 성장했다. 연로하신 장인 장모에게는 거처할 집을, 누님에게는 가게를 마련해 드릴 만큼 풍족한 삶을 사는 채희우 총재. 하지만 그는 ‘남에게는 후해도 자신에게는 인색해야 한다’는 자신의 좌우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돈을 잘 번다고 해서 함부로 썼다가는 자녀교육을 망치는 법이에요. 저는 아들 둘에 딸 하나가 있는데, 항상 ‘돈 쓸 때는 쓰더라도 아낄 때는 10원이라도 아끼라’고 강조합니다. 다행히 아이들도 그런 제 말을 잘 따라주고요. 특히 막내딸은 사람 없는 데 전등이라도 켜 놓으면 따라다니며 잔소리를 합니다. 간혹 ‘아빠가 좋은 구두나 옷 하나 사 줄테니 나가자’고 하면, ‘아직 학생이라 괜찮아요. 인터넷으로 2,3만 원짜리 사는 게 훨씬 좋아요’라고들 합니다.”
아내인 고은경 세무사 역시 채 총재의 든든한 후원자다. 같은 경영학 박사 출신으로 남편의 사업에 조언을 아끼지 않을 뿐 아니라, 시댁에 경조사가 있을 때면 먼저 시댁 식구들을 챙길 정도로 사려가 깊다. 지난 2월 채 총재의 생일날, 아내는 그에게 생일선물로 통장 하나를 건넸다.
“액수를 보니 3억이나 되더군요. 아내가 그동안 10년 넘게 행정자치부나 국세청 자문위원을 맡으며 받은 보수를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은 돈이었습니다. ‘이 돈을 어떻게 하면 값지게 쓸까?’ 의논하다가 1억은 로타리에, 2억은 로타리 산하 장학문화재단에 기부해 대학생에게 장학금을 주기로 했습니다. 아내도 저도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한 만큼 그동안 받은 것을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지요.”
내년 7월까지인 총재 임기 동안 천 명 이상의 회원을 새로 가입시키는 한편 16억원의 기부금을 모금하겠다는 것이 그의 목표다. 지구 산하 105개 클럽에서 주최하는 단합모임에 참석해 회원들을 격려하는 한편, 기업이나 단체들로부터 기부금을 유치하기 위해 그는 오늘도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다. 체력을 유지하고자 전날 일정이 아무리 늦게 끝나도 다음 날 아침 5시면 일어나 검도 등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한단다. 한때 대학 교수로 강단에 선 적도 있는 그는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독자들을 위해 다음 한 마디를 전해줄 것을 부탁했다.
“학생들이 대학에서 배우는 과목과 실제 취업현장에서 필요한 지식 사이에 괴리가 큰 것을 보면서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세상이 하나가 되면서 변화의 속도도 급격히 빨라졌습니다. 어제 해외에서 만든 제품이 이틀이면 우리나라에 들어올 정도니까요. 이런 시대일수록 도전할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어느 분야든 밑바닥부터 시작할 마음을 갖고 뛰어들면, 그 분야를 꿰뚫는 원리와 문화를 알게 되고 그래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채희우 총재
소설 <큰바위 얼굴>의 주인공 어니스트처럼 마음에 사랑과 지혜가 가득한 사람이 되고 싶어 거암巨岩이란 호를 쓰고 있다. 우경경제연구소 소장으로, 대학 강단에서 회계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지금은 로타리 지구 총재로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 및 대학생 장학사업에도 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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