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진의 in 아프리카, 아프리카人

케냐의 한 방송국에서 PD로 일하고 있는 송태진 씨가 아프리카를 <투머로우>에 소개한다. 이번에는 대한민국의 8월 15일 독립기념일을 맞아 케냐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준비했다. 케냐는 영국으로부터 1963년 12월 12일에 독립했는데, 그 바탕에는 국민들이 아릅답게 기리는 ‘마우마우 봉기’가 있다.

독립운동 - 세계사를 빛나게 하는 위대한 정신
조지 워싱턴, 윌리엄 월리스, 김좌진, 샤를르 드 골…. 민중을 억압하는 권력에 저항한 독립운동가들의 활약과 불굴의 정신은 세계 역사의 한 장을 의미있게 장식한다. 그들은 권력자의 끈적한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싸우지 않았다. 다만 자유로운 세상을 위해 피를 흘렸다. 사람 위에 사람이 없는 세상을 꿈꾸던 그 위대한 정신은 인류의 문명을 성큼 진보시켰다. 그렇기에 세계사 속에서 그들의 이름은 오늘까지 숭고하게 기억된다. 그리고 여기, 아프리카 케냐에도 빛나는 독립운동의 역사가 있다. 어느 대륙보다 오래 수탈을 당했던 아프리카인들이 외친 피맺힌 저항의 함성이다.

얼떨결에 하인으로 전락한 케냐 원주민들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높은 키리냐가 산 인근은 농사가 잘되는 비옥한 지역으로 오랜 옛날부터 키쿠유 부족이 자리 잡아 살고 있었다. 그들은 대대로 농사를 짓고 노인을 공경하며 공동체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피부는 하얗고 희한하게 생긴 사람들이 종이 한 장을 들고 마을에 나타났다. 그들은 부족 장로들에게 종이를 보여주며 ‘법적으로’자신이 땅의 주인이라고 말했다. 키쿠유 사람들은 혼란스러웠다. 그들은 단 한 번도 땅에 주인이 있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해마다 작물을 나게 하고 동물들을 먹이는 축복 받은 대지는 신이 부족 사람들 모두에게 베풀어준 선물이었다. 그런데 그 땅이 사실은 저 속살 하얀 백인의 것이었다니!키쿠유 사람들 눈에 땅을 나누고 소유하는 백인의 행동은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팔던 것처럼 황당한 짓으로 보였다. 뭔가 심각한 착오가 있다고 여긴 키쿠유 장로들은 영문을 알아보려 했지만, 백인들은 그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고 계곡과 들판에 울타리를 두르고 집을 지었다. 그리고 마침내 낯선 이방인들은 말했다. 자신의 농장에서 일한다면 이곳에 계속 살게 해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려면 당장 꺼지라고. 은근슬쩍 집을 차지한 도둑은 주인에게 나가라고 아우성쳤다. 그제야 원주민들은 저항했지만 총을 든 영국 도둑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키쿠유 족은 물론 엠부, 메루 등 케냐의 여러 부족들은 어리둥절 하는 사이에 터전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들은 일명 ‘보호구역’으로 불리는 황량한 땅으로 쫓겨났다. 낯선 보호구역의 땅은 그들의 고향블로그보다 훨씬 척박했고, 각지에서 모인 이주민들로 번잡해 생활이 쉽지 않았다. 살아남으려면 도시에 가서 막노동꾼이 되거나 백인들의 농장에 들어가 헐 삯을 받고 일할 수 밖에 없었다. 골짜기와 구릉마다 조상들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정든 대지는 백인들의 밭과 목장이 되었다. 땅은 여전히 풍요로운 소산물과 우유를 주었지만 이제 그것들은 자칭 ‘주인’의 몫이었다. 하인이 되어버린 케냐 사람들이 ‘주인님’의 물건에 손을 대면 벌을 받거나 죽을 수도 있었다. 세상은 뒤돌아볼 시간도 주지 않고 빠르게 변해 버렸다.

땅과 자유! 이싸카 나 위야띠!
1895년 영국은 케냐 지역을 동아프리카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백인 이주민들은 케냐의 가장 기름진땅을 차지하고 원주민들을 부리며 주인 행세를 했다. 케냐 사람들은 침략자들의 채찍과 총에 무릎을 꿇었지만 언젠가 고토를 되찾을 날을 그리며 이를 갈았다. 시간이 흘러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케냐인들은 영국군 소속으로 전쟁에 참전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자신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섬기던 주인들이 붉은 피를 흘리며 비참히 죽어가는 모습을. 케냐에서는 마치 불사신처럼 보였던 백인들이지만 죽음 앞에서 는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현재 나이로비에서 두 아이의 아버지로 살고 있는 앤드류는 자신의 할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를 나에게 말해 주었다. 앤드류의 할아버지는 전쟁 당시 노역을 했다. 영국인들은 군인 정신과 충성을 케냐인들에게 강조했다. 그런데 정작 전투가 터지자 그들은 뒤에 숨어버렸고 케냐 병사들만 전장에 보내졌다고 한다. 아프리카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열강들의 욕망이 충돌한 전쟁에서 목숨을 걸어야했던 앤드류의 할아버지와 전우들. 그들이 느꼈던 굴욕과 부조리가 세대를 넘어 아직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1945년, 마침내 전쟁이 끝났다. 케냐인들은 영국을 위한 자신들의 희생이 적합한 대우를 받길 기대했다. 하지만 한국처럼 전쟁 후 독립을 얻은 패전국의 식민지와는 달리 케냐는 여전히 영국의 지배하에 남아 있었다. 바뀐 것은 없었다. 백인들은 전리품과 명예를 차지했다. 그러나 주인을 위해 피를 흘린 충직한 하인은 여전히 하인일 뿐이었다. 아무런 보상도 위로도 전해지지 않았다. 케냐인들은 분노했다. 그들은 더 이상 잔인한 주인을 섬길 이유를 찾지 못했다.
 키쿠유 부족을 중심으로 한 케냐인들은 백인들이 본래 도둑이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그들은 마치 최면에서 풀린 듯했다. 그렇다. 영국은 주인이 아니었다. 쫓아내야 할 불청객이었다. 진정한 주인은 자신들이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당연한 진실을 마주한 케냐 사람들은 절규하듯 외쳤다. ‘이싸카 나 위야띠!’ 땅과 자유를 뜻하는 이 키쿠유 방언은 독립을 상징하는 구호가 되어 사람들 사이에 퍼져갔다. 빼앗긴 땅과 자유. 본래 자신들의 것이었던 이싸카 나 위야띠를 되찾기 위해 사람들은 뭉치기 시작했다.

백인을 몰아내려면 모두가 한목소리로 외쳐야 한다
‘마우마우’라고 불리는 괴한들이 백인을 습격했다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들은 낮 동안엔 산의 덤불 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백인의 농장을 공격했다. 30여 명의 백인들이 죽었고 이주민 사회는 뒤숭숭해졌다. 마우마우는 단순히 백인을 공격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한밤중에 백인 농장의 일꾼들과 마을의 주민들을 모아 맹세 의식을 진행했다. 백인을 쫓아내는 데 목숨을 바치겠다는 비밀 맹세였다. 마우마우 단원들은 백인을 몰아내려면 케냐인 모두가 한목소리로 외쳐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다보니 다른 의견을 가진 자들은 가혹한 대접을 받았다. 맹세를 거부하는 건 백인을 돕겠다는 뜻이었고 곧 케냐의 적으로 간주되었다. 마우마우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은 폭행 당하거나 살해되기도 했다.
맹세 의식을 통과한 남자는 백인을 습격할 때 동참해야 했고, 여자들은 음식과 은신처를 제공해야 했다. 맹세를 한 이들은 누가 마우마우인지 발설하지 않고 비밀을 지켰다. 많은 사람들이 맹세를 했지만 평소에는 아무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영국 식민 정부는 경찰과 군인을 동원해 습격에 협력하는 사람들을 색출하려 했지만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잡아뗄 뿐이었다. 백인들 앞에서 마을 전체가 거대한 연극판처럼 움직였다.
화가 난 영국은 다른 어떤 식민지보다 케냐에서 폭력적으로 독립 운동을 진압했다. 식민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통행 금지령을 내렸다. 경찰은 아무 집에나 불쑥 들어가 수색을 한다며 집안을 홀랑 뒤집어 놓았다. 5만 5천 명의 영국군이 케냐로 파병되어 2만 명의 마우마우를 재판도 없이 죽였다. 재판정에서도 1,090명의 남자가 사형 선고를 받았고, 30명의 여자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키쿠유 족의 지도자 조모 케냐타는 마우마우가 아니었는데도 체포되어 7년 간 감옥살이를 했다. 압박에 못 이겨 비밀을 지키지 못한 배신자들이 생겨났고 맹세를 했다가 적발된 사람들은 수용소로 잡혀갔다. 15만 명이 폭력과 고문이 횡행한 반인륜적 수용소에서 고통을 겪었다.
분노한 마우마우 단원들은 비밀을 발설한 배신자들을 찾아 복수했다. 복수를 당한 사람들 역시 영국을 지지하며 마우마우를 대적했다. 백인의 편에 선 자들과 마우마우의 편에 선 자들이 서로 갈4라져 죽고 죽이는 동족 간의 비극이 펼쳐졌다. 그 과정에서 오해와 누명이 겹치며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윽고 마우마우 운동은 영국 정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끝을 맺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억압받지 않는 세상을 꿈꾼 사람들
마우마우에 대한 의견은 여전히 분분하다. 케냐인, 특히 키쿠유 부족은 엄청난 희생을 치렀지만 백인은 고작 30여 명이 죽었을 뿐이었다. 무의미한 짓이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결과가 어떻게 되었든 마우마우는 하인으로 살아가던 아프리카인들이 자신이 주인인 것을 발견한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더 이상 도둑의 하인으로 억압당하며 사는 것을 거부하고 본래 땅의 주인이었던 케냐인이 주인이 된 세상을 바랐던 사건이다. 그들은 무기를 들었고 싸움을 했다. 사실 이것은 불가능한 전투였다. 하지만 그들은 싸웠다. 그리고 하인이 아닌 주인으로 죽었다. 영국인들은 그들을 더 구속할 수 없었다.
마우마우가 봉기한 지 10여 년이 흐르고 1963년 케냐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오늘날 케냐인들은 마우마우를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억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을에서 활동한 마우마우 전사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케냐인들은 ‘이싸카 나 위야티’를 위해 분연히 일어난 그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희생에 큰 경의를 표한다. 마우마우 운동은 자유가 무엇인지,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얼마나 큰 희생이 필요한지를 케냐인들에게 알려준 커다란 사건이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는 분명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기에 얻게 된 것이다. 자유를 얻기 위해 희생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싸우지 않았다. 그들은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자 자신을 거름으로 삼아 자유를 얻어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젊음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도움을 원하는 사람을 위해 사용될 때 아름답다.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내가 자유를 위해 싸워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독립을 위해 희생한 이들에게 받은 자유. 지금 나는 어떻게 사용하고 있나? 마우마우와 광복절을 기억하며 자유가 얼마나 귀중하고 큰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는 8월이 되면 좋을 것 같다.

송태진
2008년 부룬디로 1년간 해외봉사를 다녀온 그는 아프리카를 행복으로 가득 채울 꿈을 품은 맹랑한 공상가다. 지난 12월부터 아프리카 케냐 GBS TV방송국에서 청소년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직접 느낀 경험들을 그의 따뜻한 필치로 소개한다.
http://blog.naver.com/impork3 쏭태의 생생한 아프리카 이야기 블로그

참고 서적
1.<울지 마, 아이야> 응구기 와 티옹오, 은행나무
2.<나는 한번이라도 뜨거웠을까?> 베벌리 나이두, 내 인생의 책
3.<십자가도 없는 무덤> 피터 카레이디. 지식을 만드는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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