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23일 오전 10시 7분, 지하철 6호선 6-2칸, 책 읽는 사람 0명. 언제부터 시작된 버릇인지 모르겠습니다. 지하철을 타면 우선 책 읽는 사람부터 세어봅니다. 책읽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상상하고 싶지도, 상상할 수도 없는 상황은 이 세상에서 책이 사라지는 일이 아닐까요? 그런데 요즘 지하철 풍경을 보면 이러다가 정말 책이 멸종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공지능이 소설을 쓰는 세상?
일본 과학자들이 인공지능을 활용해 쓴 소설이 SF 관련 문학상 1차 예심을 통과했다고 합니다. 아직은 사람이 줄거리를 자세하게 지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음마 단계라고 하지만, 빠르면 2년 이내에 줄거리를 자동으로 생성하도록 성능을 향상해 인간의 개입 없이 소설을 쓸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합니다.

‘인간 고유 영역인 창작 분야까지 인공지능이 진출한다면 그 많은 소설가들은 어떻게 되지? 정말 인공지능이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이런 의문보다는 지금처럼 책을 안 읽는 시대라면 인공지능이 쓴 소설을 읽어줄 독자들이 얼마나 있을지, 그게 더 궁금합니다.

제임스 패터슨의 실험
책을 읽지 않는 삶은 지구촌 보편의 이야기인가 봅니다. 지난 3월 21일자 뉴욕타임즈에는 2015년 최고 인세 수입을 올린 미국 인기 작가 제임스 패터슨James Patterson의 인터뷰가 실렸습니다. 그는 텔레비전이나 게임, 영화, 소셜 미디어 때문에 책읽기를 포기한 사람들을 위해 짧고 박진감 넘치는 소설을 한 달에 2-4편 출간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습니다. 제임스 패터슨은 책 가격을 5달러 미만으로 책정해서 누구나 부담없이 책을 살 수 있도록, 그리고 한 번에 다 읽을 수 있는 150쪽 정도의 짧은 소설을 발표하겠다고 합니다. 작년 한 해 동안 약 8900만 달러(한화 약 1033억 원)의 인세 수입을 올린 제임스 패터슨이 책을 더 많이 팔고 싶어 이런 플랜을 세웠을 리는 없을 터, 책에서 멀어진 사람들 손에 어떻게 해서든 책을 들게 해보겠다는 작가의 야심찬 실험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독자 생존, 문학 생존
삼사 년 전쯤 된 것 같습니다. 어떤 유명한 시인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곧 시의 시대가 올 것이다. 독자들에겐 더 이상 긴 글을 읽을 시간도, 긴 글을 읽어낼 독서 근력도 없기 때문에 다른 장르에 비해 길이가 짧은 시가 문학의 대세가 될 것이다.’

시간은 흘렀고, 아직 시는 문학의 대세가 되지 못하고 있고, 문학이 세계의 대세가 되는 일은 백만 년 후에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문학은 영원히 마이너의 세계에 머물게 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삶에서 책이 사라지는 일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읽습니다. 독자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시인은 시를 쓰고 소설가는 소설을 쓸 테니까요.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인공지능이 소설을 쓰는 세상, 책이 사라지는 세상이 와도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여전히 소설을 쓸미것만 같은 작가가 있습니다. 작가 이름보다 <갈팡질팡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소설 제목으로 더 유명한 작가, 이기호. 그가 올해 2월 긴 소설을 읽을 시간이 없는 이 시대 독자들을 위해 짧은 소설 40편을 묶어냈습니다. 일간지에 인기리에 연재한 짧은 소설 가운에 작가가 애착을 가지고 직접 선별한 40편을 새롭게 다듬었다고 합니다. 이기호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그렇듯 이 작품집에 실린 소설들도 일단 재미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입니다.

‘낮은 곳으로 임하라’ 의 주인공 ‘나’는 대학졸업 후 계속 취업에 낙방하던 중 하루는 강원도 친구 집에 따라갑니다. 혼자 학교 식당에서 2,500원짜리 정식을 먹는 것보다 그래도 거기 가면 최소한 밥은 주겠지 하는 생각으로 따라 나섰다가 저녁밥을 먹으면서 친구가 왜 자기를 데리고 왔는지 알게 되는데, 그 이유가 참 어이없습니다.

소녀시대 태연 때문에 폭행범으로 고소당한 검도 도장 사범, 서른 살이 될 때까지 한 번도 여자 친구를 사귀어보지 못한 남자, SNS에서 멋진 남자로 살아가는 ‘남편의 이중생활’을 바라보는 아내, 학부모 상담 주간에 정말 학부모 상담을 하게 된 선생님 등등, 소설 속 주인공들은 참 다양하고 캐릭터들은 생생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 우리가 크고 작은 어려움에도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듯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도 ‘웬만해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이야기, 웃기지만 웃을 수만은 없는, 웃픈(우습지만 슬픈) 이야기들이 우리를 위로하고 감동시킵니다.

소설을 읽을 때의 마음과 소설을 읽고 난 후의 마음을 달라지게 하는 이야기, 잊히지 않고 계속 마음속에 남아 우리를 좀 더 나은 세계로 이끄는 이야기들을 독자들이 외면할 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기호 소설들을 계속 읽게 됩니다.

책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기에, 독자생존을 위해 앞으로도 계속 책을 사고, 책을 읽어가겠습니다.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이기호/마음산책/2016)

일간지에 인기리에 연재한 짧은 소설 가운데 이기호 작가가 애착을 가지고 직접 선별한 40편을 새롭게 다듬어 묶어낸 소설집이다. ‘평범한 이웃들에게 비록 그들의 삶이 대단하지는 않지만 순간순간들이 모여서 그 삶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위로하고 싶었다’는 그는 평범한 사람들이 현실 속에서 갈팡질팡 우여곡절 폼나지 않지만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모습을 ‘웃프게’ 그려내고 있다.

작가 이기호
1972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1999년 ‘현대문학’ 신인추천공모에 단편 <버니>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김박사는 누구인가?>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최순덕 성령충만기>, 장편소설 <차남들의 세계사> <사과는 잘해요> 등을 펴냈다. 현재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허남숙
책 읽어주는 사람, 역사학을 전공했으나 역사책보다 문학책 읽는 것을 더 좋아했다. 스무 살 무렵, 레몽 장의 <책 읽어주는 여자>를 읽고 ‘책 읽어주는 여자 사람’이 되기를 꿈꾸었고,TV 교양프로그램, 어린이 프로그램 구성작가로 한동안 일했다. 지금은 도서관과 지역아동센터 어린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일을 하고 있으며, 책 읽어주는 친구 엄마, 책 추천하는 이모, 책 읽기를 권하는 동네 언니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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