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면 지고, 미치면 이긴다.’ 박시헌 감독이 틈만 나면 선수들에게 강조하는 말이다. 세계적인 복싱 강국이었지만 서울올림픽 이후 30년 가까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하고 있는 한국. 마지막 올림픽 복싱 금메달리스트인 그가 이제 후배들을 금메달리스트로 길러내기 위해 팔을 걷고 나섰다.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하루를 지워버릴 기회가 생긴다면? 박시헌 감독은 아마도 1988년 10월 2일을 선택할 것 같다. 이날은 그가 서울올림픽 복싱 종목에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건 날이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서서 국가를 열창하는 것은 스포츠 선수라면 누구나 한번쯤 품어 보았음직한 꿈이다. 그런데 왜?

뼈가 으스러진 채 휘두른 주먹

이 질문에 답을 찾으려면 먼저 그가 어떻게 복싱을 시작했는지부터 짚어봐야 한다. 원래 박시헌 감독의 꿈은 은행원이 되는 것이었다. 상고에 진학한 것도 그래서였다. 성격도 타자반 동아리에 가입할 만큼 내성적이었고, 체구도 키 170cm-몸무게 54kg로 호리호리했다.

“복싱선수가 되겠다고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남들보다 몸이 약하다 보니 운동이라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친구와 동네 체육관에서 복싱을 시작했어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복싱인데 점점 재미가 붙더라고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일곱 차례나 대회에 출전했지만 한 게임도 이기지 못했다는 박시헌. 여러 번이나 우승을 하고 오는 동료 선수들을 보며 그는 투지를 불살랐다. 그때부터 동료들의 몇 배로 훈련량을 늘려갔다. 절치부심한 결과는 3학년이 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경남 도 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시작으로 전국대회까지 제패했다. 그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복싱에 매달렸다. 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그의 국제대회 우승 행진은 계속됐다. 1984년 한·일 주니어 복싱대회, 1985년 월드컵 복싱, 1987년 아시아 복싱 선수권, 1988년 아시아 챌린저 등을 연이어 석권했다. ‘딱 한 대회를 빼놓고는 국제대회에 나갈 때마다 우승을 차지했다’는 게 그의 기억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목표는 단 하나, 올림픽이었다. 코칭스태프나 복싱 팬들이 거는 기대도 물론 컸다. 그런데 올림픽 개막을 보름 정도 앞두고 뜻밖의 사건이 터졌다.

“당시 제 라이벌이던 한국 선수와 스파링(머리 보호대를 차고 실전처럼 하는 연습경기)을 했습니다. 어디까지나 연습 삼아 한 스파링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상대선수가 죽기살기로 덤벼들더군요. 결국 오른손에 부상을 입고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더니 오른손의 뼈 하나가 완전히 박살이 났다는 거예요.”

주치의는 ‘이대로는 올림픽에서 뛸 수 없으니 코칭스태프에게 알려 다른 선수를 찾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주치의에게 울며 불며 매달렸다. 올림픽, 그것도 조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출전하는, 평생에 한 번 올까말까 한 기회를 이대로 놓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주치의는 비밀을 지켜 주었지만, 그날부터 보름 동안 그는 고통스런 하루하루를 견뎌내야 했다. 도핑테스트 때문에 진통제를 먹을 수도 마취주사를 맞을 수도 없었다. 행여 부상을 당한 사실이 알려지면 올림픽의 꿈이 물거품이 되기에 누구에게도 아픈 내색을 할 수 없었다. 낮에는 주먹에 테이핑을 한 채 주먹을 휘둘렀고, 밤에는 반 깁스를 한 채 뼈가 아물기를 기다렸다.

김동성이 실격처리되어 올림픽 금메달을 박탈당했을때도, 김연아가 석연찮은 판정으로 은메달에 머물렀을때도 TV에서는 박시헌이 금메달을 따던 순간이 방영됐다. ‘서울올림픽에서 한국이 4위를 확정 짓기 위해 심판을 매수한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지만, 2007년 국제올림픽위원회는 ‘한국이 심판매수를 한 흔적은 없었다’고 공식발표했다.
김동성이 실격처리되어 올림픽 금메달을 박탈당했을때도, 김연아가 석연찮은 판정으로 은메달에 머물렀을때도 TV에서는 박시헌이 금메달을 따던 순간이 방영됐다. ‘서울올림픽에서 한국이 4위를 확정 짓기 위해 심판을 매수한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지만, 2007년 국제올림픽위원회는 ‘한국이 심판매수를 한 흔적은 없었다’고 공식발표했다.

악몽이 된 금메달, 하지만 ‘피하지 말고 이겨내 보자’

그리고 마침내 개막한 서울올림픽. 라이트미들급(몸무게 67~71kg의 선수들이 출전하는 체급)에 출전한 그는 첫 경기인 32강전부터 힘겨운 싸움을 거듭했다. 빠른 발놀림과 정확한 펀치로 부상 핸디캡을 극복하며 수단·동독·이탈리아·캐나다 선수를 차례로 꺾고 결승에서 만난 상대는미국의 로이 존스였다.

훗날 미들급에서 헤비급까지 무려 네 체급에서 세계 챔피언에 오르게 되는 존스는 당시 미국 아마추어 대회에서 여러 번 우승을 차지한, 각광받는 유망주였다. 한 라운드에 3분씩 3라운드까지 치러지는 경기 내내 존스는 경기내용에서 박시헌을 압도했다. 유효펀치 수만 봐도 존스 86 대 박시헌 32로, 금메달은 누가 봐도 존스의 것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예상 못한 일이 벌어졌다. 3라운드까지 승부가 가려지지 않아 진행된 심판판정에서 주심이 돌연 박시헌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어안이 벙벙했지요. 어지간한 접전이 아닌 이상, 복싱 선수들은 심판이 손을 들어주기 전에 누가 이겼는지 알거든요. 졌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제 손을 들어주었으니….”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그날 경기영상에는 심판이 손을 들어주는 순간 당혹스러워하는 박시헌의 표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홈팬인 한국 관중들마저 그를 향해 야유를 퍼부어댔다. 언론들도 ‘텃세판정 논란 일으킨 불행한 경기’ ‘한국 먹칠한 억지 금메달’ 등 원색적인 표현을 써가며 그를 비난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인터넷과 SNS가 발달한 지금이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온라인상에서 한바탕 ‘마녀사냥’이 벌어졌을지 모를 일이다. 그때부터 그는 공공의 적이 되어 온갖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한번은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누가 절 알아보고 ‘저 사람, 박시헌 아니야?’라고 하더군요. 바로 선글라스를 쓰고 그 자리를 떠야 했습니다. 아내는 한국서 살기 힘들것 같으니 이민 가는 게 낫지 않겠냐고도 했습니다. 제가 아내를 설득했어요. ‘여보, 우리 피하지 말고 여기서 한번 이겨내 보자. 지도자가 되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키워내 명예를 회복하자’라고요.”

지난날을 회상하는 ‘경상도 싸나이’ 박시헌 감독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그렇다면 그날의 이해할 수 없는 판정은 어떻게 된 것일까. 이 오심은 88년 당시 국제복싱협회 사무총장 대행이던 동독 출신하인츠 베어가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올림픽 최종순위에서 동독은 금 37, 은 36, 동 30개로 금 36, 은 31, 동 27개의 미국에 근소한 차이로 앞설 만큼 치열한 순위다툼을 펼치고 있었다. 올림픽 마지막날 벌어진 결승전에서 미국의 존스가 금메달을 획득할 경우 동독의 2위 수성에 위협이 되기 때문에 심판을 매수해 박시헌에게 금메달을 주게 한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언론과 대중은 아무 잘못 없는 그를 희생양으로 만든 것이었다.

“지도자가 된다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힘들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형편 탓으로 돌릴 수도 없으니까요. 참으로 어깨가 무거운 자리입니다.” 그의 말투는 투박하고 무뚝뚝하지만 어떤 화려한 수사로 치장된 미사여구보다도 더 가슴에 와 닿았다.
“지도자가 된다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힘들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형편 탓으로 돌릴 수도 없으니까요. 참으로 어깨가 무거운 자리입니다.” 그의 말투는 투박하고 무뚝뚝하지만 어떤 화려한 수사로 치장된 미사여구보다도 더 가슴에 와 닿았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곧 성장할 기회다

금메달은 박시헌에게 그야말로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결국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가슴에 안고 은퇴를 선언한 박시헌은 일선중·고등학교에서 체육교사로 근무했다. 올림픽을 앞두고 당한 오른손 부상의 후유증으로 3년 동안 칠판에 판서를 하지 못했지만, 그는 부임하는 학교마다 복싱팀을 창단해 묵묵히 선수들을 길러냈다. 그러던 중 2001년, 대한복싱협회 회장에 취임한 은사 김성은 감독의 부름을 받는다.

“국가대표팀 코치를 맡아달라고 말씀하셨어요. 당시 우리 복싱은 시드니 올림픽에서 노메달에 그치면서 위기론이 대두되고 있었습니다. ‘좀 도와달라’고 하시는데 서울올림픽 때의 아픈 기억이 생생해수락하기도, 거절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어요.”

긴 고민에 마침표를 찍어준 것은 아내였다. ‘당신이 복싱을 안 했더라면, 그리고 선배들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지금 이 위치까지 올 수 있었을까? 그동안 받은 사랑을 이제는 후배들에게 돌려줄 때다.’ 아내의 말에 힘을 얻은 그는 바로 코치직을 수락했다. 그리고 이듬해 열린 2002 부산아시안게임 복싱에서 금 3, 은 2, 동 5개를 따내는 값진 성과를 올렸다. 이후 국가대표 상비군 감독을 거쳐 2013년 국가대표팀 감독이 된 그에게는 한 가지 꿈이 남아 있다. 바로 올림픽 복싱 금메달리스트를 키워내는 것이다.

“제가 떳떳하지 못한 금메달리스트였으니까요. 이제는 후배들을 정말 최선을 다해 가르쳐서 진정한 금메달리스트로 만드는 게 지도자로서 마지막 꿈입니다.”

박 감독의 서울올림픽 금메달 이후 한국 복싱은 28년째 금맥이 끊어졌다. 복싱경기가 있는 날이면 온 국민이 일찍 귀가해 중계를 보느라 거리가 한산해질 만큼뜨거웠던 복싱 붐도 거의 사라졌다. 복싱인기가 사그라들면서 선수층도 과거에 비해 얇아졌다. 또 아시아권인 필리핀·카자흐스탄·우즈벡 선수들이 세계 정상급 기량을 보유하고 있어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가 쉽지는 않을 전망이다.

“어쨌거나 최선을 다해야죠. 선수들을 훈련시켜 보면 한계를 넘지 못하는 게 늘 아쉽습니다. 힘들어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조금만 더 버티면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데, 그 고비를 잘 넘지 못하거든요. 그것만 이겨내면 더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는데 말이죠. ‘투머로우’ 독자들께도 유혹이 오거나 포기하고픈 순간에 조금만 더 버텨 이겨내 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뼈가 으스러진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세계적인 선수들과 겨뤄 이겨낸 투혼, 그리고 대중의 애꿎은 비난도 묵묵히 참아낸 인내심까지. 논란이 일긴 했지만 그는 그 메달을 받을 자격이 충분해 보였다. 130여일 앞으로 다가온 리우올림픽에서 그의 꿈이 이뤄질 수 있을까? 지구 반대편에서 펼쳐질 우리 선수들의 선전을, 밤을 새워가며 응원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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