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면서 겪는 우연한 일들은 어쩌면 오랜 시간 준비되어온 필연일지도 모릅니다. 작년 여름 우연히 한 출판사 SNS에 링크된 책 소개 신문 기사를 클릭했다가 낯익은 얼굴을 만났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거기에 나온 저자 사진의 주인공이 제가 가끔 마주치는 우리 동네 아저씨였기 때문입니다.

파란 눈의 장애인 철학자, 알렉상드르 졸리앙

알렉상드르 졸리앙. 그 기사를 통해 그분의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유럽에서 꽤 유명한 철학자라는 것도, 여러 권의 책을 낸 작가라는 것도 그때 알았습니다.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만날 때면 언제나 봄 햇살처럼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던 분, 편안한 트레이닝 바지 차림으로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천진난만하게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함께 뛰놀던 그분이 철학자라니, 반갑고 놀라웠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졸리앙이 ‘철학자’라는 사실이 저를 더 놀라게 했습니다.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인이 철학자일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제 편견이 깨져나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알렉상드르 졸리앙, 그는 장애인 철학자입니다. 철학자 앞에 붙어있는 ‘장애인’이라는 말을 떼어내고 싶지만 졸리앙을 소개하자면 그의 장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뇌성마비(athetosis) 장애인입니다.

졸리앙은 탯줄이 목에 감겨 질식사 직전에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그때 생긴 후유증으로 뇌성마비 장애를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3살 때부터 17년간 요양 시설에서 지냈고, 온갖 고통과 어려움이 그를 괴롭혔지만 기숙사 근처, 책에 파묻혀 사는 한 노인을 만나 책을 읽게 되면서 철학의 매혹을, 정신에 관한 것들이 주는 희열을 맛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인간이라는 이 망할 직업’, 이렇게 호기롭게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싶어졌습니다. 졸리앙의 책 <인간이라는 직업>을 읽어내려 갑니다. 120페이지 조금 넘는 얇은 책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책.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자마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한 번 더 읽었습니다. 고통스러웠습니다. 그의 삶을 상상하는 것이 고통스러웠습니다. 경련을 피하고 추락을 피하고 안전하기보다 그저 무탈한 내일을 바랐을 그에게 산다는 것은 ‘인간이라는 직업’을 수행해 내기 위한 전투의 과정이었을 거라 짐작됩니다. 그에게 삶이란 살아내야 하는 과업과도 같은 것입니다.

졸리앙은 말합니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남과 수많은 기회와 내면적 길에 들어서고자 하는 결심 덕분에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라고. ‘인간이라는 직업을 직접 살아낸다는 것은 인생의 우여곡절을 감내할 수 있게 돕는 삶의 기술을 체득하여 좀 더 깊이 기쁨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중증 장애인인 졸리앙은 우리에게 권유합니다.

‘인간이라는 직업에 몸과 마음을 다해 투신하라. 자신의 내면 한복판까지, 맨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라!’

삶에서 최초의 몇 해 전부를 몸을 길들이는 일에, 뻣뻣한 몸으로 일상에 적응하는 일에 심신을 다 바쳐야 했고, 매주 일요일 저녁마다 부모님과 헤어져 시설로 돌아가야 했던 졸리앙의 고통을 우리는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생은 고통과 함께라는 것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그는 쉽게 낙담하지 않았고, 인생의 잔혹한 시련을 받아들이며 ‘어찌하면 좀 낫게 살 것인가?’란 철학적인 명제를 꼭 붙들었습니다.

 

생활 속의 철학자

그의 몸은 경련으로 흔들리지만 그의 영혼은 투명한 생각들을 만들어냅니다.

그의 얼굴에는 언제나 미소가 번집니다.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아이들과 뛰어가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개구쟁이고, 뛰어서 신호등을 건너는 아이들에게 조심하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걸 보면 자식 걱정하는 평범한 아빠입니다.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인간 승리의 아이콘으로 통하는 밀리언셀러 작가이자 무수한 방송과 강연을 넘나들며 ‘행복전도사’로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가 모두가 자신을 알아보는 그곳을 떠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서울에 둥지를 튼 이유는 ‘인간이라는 직업 심화 학습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지하철을 타는 것, 공립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서류 문제를 처리하는 것, 마트에 가는 것, 무거운 짐수레를 끌고 가는 할머니를 만나는 것, 아들과 대중 목욕탕에 가는 것 등등 서울에서의 모든 일상생활이 그에게는 철학 공부입니다.

요양 시설의 차디찬 복도를 비추는 네온 불빛의 비인간적인 폭력 아래서 무수히 던졌던 ‘왜’ 라는 질문. 그러나 이제 그는 왜냐고 묻지 않는 삶을 살아보려 진심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왜냐고 묻지 않는 것은 ‘남들이 뭐라고 할까’라는 부담을 벗는 것이며 훗날이라는 것의 독재에서 풀려나 나 자신을 온전히 현재에 내어주는 것이며, 쓸데없는 목표 같은 것은 줄이고 유보조건 없이 인간이라는 직업에 몰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장애인으로 살아오면서 본능적으로 남의 눈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을 그가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남의 평판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인간이라는 직업을 잘 수행하기를 ‘동업자’로서 응원합니다.

철학이 필요한 이유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체험, 자신의 역사에 비춰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우린 우리가 경험한 것 이상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좀 더 사람을 잘 이해하기 위해, 우리의 삶을 기쁨으로 채우기 위해. 우리에게 철학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졸리앙은 말합니다. ‘뜻만 많이 품어봐야 행동 한 번의 값어치만 못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높이 오를 생각이라면 그대들 자신의 발로 오르도록 하라!’ 여러분도 자신의 내면 한복판까지, 맨 밑바닥까지 내려가 순간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는 3월이 되기를 바랍니다.

 

졸리앙에게 대중목욕탕은 치유의 장소이자 몸을 사랑하고 잘 챙겨주는 법을 배우는 곳이며, 타인과 함께 하는 것을 느끼게 하는 곳이며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대중목욕탕에 간 졸리앙 부자의 이야기를 여기에 그대로 옮깁니다.

<왜냐고 묻지 않는 삶> 64P 인용.

 

오늘 아침 ‘때밀이’는 나를 피하는 눈치다. 아들이 내 손을 붙잡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내가 아빠를 어떻게 씻겨주는지 저 아저씨한테 보여줄게!” 그로부터 2분이 지나자 내 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누거품 천지다. 그 정도 시간이 흐르면서 장애가 전혀 문제되지 않기는 드문 일이다. 오히려 나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 충분히 자신 있다. 그것은 육체의 지혜! 왜냐는 질문 없이 아빠의 몸을 씻어주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아빠를 빛나게 하고 아빠에게 즐거움과 경쾌함을 가져다준 아이의 이 위대한 가르침! 이 아이의 순진무구한 눈동자가 세상 무엇보다 더 깨끗하게 나를 씻겨준다. 어떤 군더더기로도 그것을 흐리지 못한다. 한 아저씨가 다가와 말을 건넨다.

“이 분이 네 아빠니?”

“네” 눈빛 영롱한 아이의 티 하나 없는 대답이 나마저 이 삶에 “네”라고 답하게 만든다.

 

한국에서 살고 있는 사색가

1975년 스위스에서 트럭 운전사 아버지와 가정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탯줄이 목에 감겨 질식사 직전에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이때 생긴 휴유증으로 뇌성마비(athetosis) 장애를 갖게 되었다. 3살 때부터 17년간 요양 시설에서 지내는 가운데 온갖 고통과 어려움이 그를 괴롭혔지만 내면에 잠자고 있던 인식에 대한 강렬한 갈증으로 철학에 빠지게 되었다. 학문의 세계에 입문한 후 스위스 프리부르 문과대학에서 철학을,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고대그리스어를 공부했다. 1999년 첫 책 <약자의 찬가>가 아카데미프랑세즈에서 수여하는 모타르 상과 2000년 몽티용 문학철학상을 수상했다.

그 후 <인간이라는 직업>, <자아의 구성> 등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반영된 독창적인 사색을 주옥같은 글에 담아왔다. 유럽 100만 독자의 마음을 움직인 인기 작가이자 철학자인 그는 보다 절실한 삶의 지혜를 찾아 2013년 한국 땅을 밟았고, 현재 서울 마포에서 아내, 아이 셋과 함께 살고 있다.

인간이라는 직업

알렉상드르 졸리앙/문학동네/2015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남과 수많은 기회와 내면적 길에 들어서고자 하는 결심 덕분에 인간이 되어가는 것을 고통에 대한 숙고로 풀어나가는 졸리앙의 인생론.

 

왜냐고 묻지 않는 삶

알렉상드르 졸리앙/인터하우스/2015

지난 3년간 졸리앙이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느낀 일상에서의 진솔한 체험과 철학적 사색의 결실. 여기에 실린 101편의 이야기는 영혼의 나침반으로 삼아도 좋을 철학 지침서이다.

 

허남숙
책 읽어주는 사람, 역사학을 전공했으나 역사책보다 문학책 읽는 것을 더 좋아했다.스무 살 무렵, 레몽 장의 <책 읽어주는 여자>를 읽고 ‘책 읽어주는 여자 사람’이 되기를 꿈꾸었고,TV 교양프로그램, 어린이 프로그램 구성작가로 한동안 일했다.지금은 도서관과 지역아동센터 어린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일을 하고 있으며, 책 읽어주는 친구 엄마, 책 추천하는 이모, 책 읽기를 권하는 동네 언니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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