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에르토리코의 마나티 시市에서 40년간 최장수 시장으로 시민을 위해 살아온 후안 크루즈 만사노. 국가는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지만 마나티 시를 부유하게 운영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마나티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온 후안 크루즈 만사노의 열정적인 정신력을 전한다.

후안 크루즈 만사노푸에리토리코의 인떼르 아메르까나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청년 정치 회장으로 활동했다. 어릴 적부터 부를 쌓기보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 배우고 마음을 쏟은 그는 40년간 마나티 시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온 긍정적인 마인드의 소유자이다. 그는 신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가족의 역할이 크며, 밝은 가정은 다른 이웃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후안 크루즈 만사노푸에리토리코의 인떼르 아메르까나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청년 정치 회장으로 활동했다. 어릴 적부터 부를 쌓기보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 배우고 마음을 쏟은 그는 40년간 마나티 시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온 긍정적인 마인드의 소유자이다. 그는 신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가족의 역할이 크며, 밝은 가정은 다른 이웃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1976년, 푸에르토리코 마나티 시의 시장 선거에서 한 사람이 단에 올라 외치기 시작했다.
“제가 시장이 되면 받은 돈에서 1달러 외에는 모두 환원하고, 시민들을 위해 온 마음으로 섬기겠습니다. 마나티 시의 경제를 회복시키고 모두가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스물여덟 살의 후안 크루즈 만사노는 시인처럼 간결하고도 강렬하게, 헌신적인 메시지로 호소했다. 그런 호소력에 시민들은 매료되었다. 그 누구도 회생 불가능해 보이는 가난한 섬나라를 후안 크루즈 만사노만큼 바꿀 의지와 통찰력은 없어 보였다. 피폐해진 마나티 시의 중흥을 선언하며 그는 시민들에게 무한한 약속과 신뢰를 주었다. 그리고 국민이 어떤 사회의식을 가져야 하는지 설명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시장직을 연임한 그를, 시민들은 헌신적인 아버지요 열정적인 친구로 존경하며 자발적으로 따르고 있다. 마나티 시민들은 후안 크루즈 만사노 시장을 ‘사회를 올바르게 구현하고자 하는 이상주의 정치가’
‘마나티가 가장 존경하는 시장’으로 평가했다.

어릴 적부터 시장을 꿈꾼 후안 크루즈 만사노
그는 산속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서 가난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을 정도로 가난과 싸워야만 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대변하고 돕는 삶을 살면서, 그는 교육을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만 했다. 14살의 어린 나이의 후안 크루즈 만사노는 푸에르토리코의 발전을 가로막는 사회적, 경제적인 문제를 직시하기 시작했다. 정치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신진보당PNP 설립자인 푸에르토리코 전 주지사인 루이스 페르레 씨Luis A. Ferre의 영향을 받아서였다.

그는 후안 크루즈 만사노가 살던 마을에 정책적인 큰 영향을 주었고, 그 덕분에 후안 크루즈 만사노는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미래를 꿈꿨다. 나라를 위한 애국심이 컸던 주지사를 본받고 싶었던 것이다. 특히 루이스 페르레 씨는 그가 훗날 공공 서비스 분야에 헌신할 수 있도록 신념을 키워준 스승과 같은 분이었다. 후안 크루즈 만사노는 그로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 섬기는 마음의 기본을 배울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꽤 당찼던 그는 일 년에 한 번 공무원이 되어 체험하는 프로그램이 있는 날, 선생님에게 이야기했다.
“선생님, 저는 커서 시장이 되고 싶습니다.”
“그럼, 오늘 네 꿈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루 동안 시장 자리를 맡아보렴.”
그리고 어린 후안 크루즈 만사노는 그날 자리에 앉아있던 시장에게 또렷하게 말했다.
“저는 반드시 시장이 될 겁니다. 그러니 제가 돌아올 때까지 제 자리를 잘 지켜주세요!”
그는 한 번도 자신의 꿈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는 어렸지만 항상 시장이 되어서 시민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심사숙고했다.

 
 
위기를 만날 때 더 강해졌다
시장 선거에 출마하기 전에, 그는 월남전(1960~1975)에 파병됐다. 하지만 그곳에서 풍토병을 얻어 본국으로 돌아온 그는 전쟁이 얼마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지 보았다. 그는 전쟁에서 싸우기보다 협상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그가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인생이란 그가 계획하던 대로 단편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죽음이 늘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시민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시장이 되었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사랑하는 아들을 암으로 떠나보내고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2010년 12월 27일에 암과 싸우기 위해 ‘생명을 위한 릴레이’를 설립하고 암과 싸우는 프로그램을 대대적으로 진행했다.

후안 크루즈 만사노 시장은 성공과 행복을 가족과 나누고 싶었지만, 아무리 충성스럽게 살아도, 돈과 지식이 가족의 생명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지 고민을 거듭하면서 그는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목표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항상 부담스러운 일을 찾아 나서서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는 자기를 위한 삶이 아닌 푸에르토리코 마나티 시민을 위해 살고자 다짐했다.

한 사람의 깊은 사고가 시市를 살리다
후안 크루즈 만사노는 세계에서 현존하는 최장수 시장이 되었다. 그가 40년간 시장직을 연임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이 그를 간절히 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민을 위해 온 마음으로 희생하는 그의 진심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지난 40년간
1달러를 제외하고 봉급 모두를 환원한다고 했던 약속을 지킨 그. 눈앞에 산재한 문제 중에 시의 경제적 회생과 국민의 건강, 일자리 등 시급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뛰어다닌 그는 자신의 유익을 포기하고 난 후 매사에 도전이 되었다.

 
 
“저는 당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병든 국민을 위해 일해왔습니다. 그리고 외국의 제약회사에 직접 찾아가서, 시민들이 보건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발로 뛰었습니다. 젊은이들과 시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서도 투자자들을 끊임없이 유치했습니다. 왜 마나티 시에 제약회사가 필요한지 설명했어요. 그리고 그 회사가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세금을 면제해 주었습니다. 전기와 수도 시설도 개선했고, 투자자들이 공항과 항구로 이동하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고속도로도 개선했습니다. 지금도 페이스북이나 인터넷의 여러 매체를 통해 사람들에게 우리 도시를 소개하면서 초청하고 있습니다. 물론 반대 세력에 부딪힐 때도 전혀 문제 되지 않습니다.”

후안 크루즈 만사노 시장은 직접 시민들의 집을 방문해서 리모델링을 해야 하는지, 물이 잘 나오는지 전기는 잘 들어오는지 직접 살폈다. 장애를 겪는 사람에게는 도우미를 붙여서 돕게 하고, 약이 필요하다면 무료로 약을 제공해주었다. 시에서 시민을 무료로 치료할 수 있는 병원도 지어서 무료진료도 시행하고 있다.

투표하면 선거에서 항상 이기는 이유가 시민들이 시장의 배려와 관심을 마음으로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보건, 교육, 교통 등 다양한 분야에 신경을 쓰고 있다. 시민들이 문화를 접할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무료 음악회도 꾸준히 열고 학생들에게는 무료 음악 수업도 시행하고 있다.

후안 크루즈 만사노 시장의 열정 덕분에 119명이던 시청 직원도 40년이 지나면서 1,400명으로 늘어났다. 제약회사에서 나온 세금덕에 시 예산도 100만 불에서 6,500만 불로 증가했다. 전기가 귀한 섬에 발전기를 세워 전기를 충분하게 했고, 시민들의 음악교육에도 힘써 오케스트라도 만들었다. 후안 크루즈 만사노 시장은 음악가를 키우고 문화를 교류하며 시민들의 삶의 질도 한층 높이려고 애썼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자가 밤 10시가 넘는 늦은 시각에 전화를 걸었을 때도 여전히 집무실에서 전화를 받았다. 기자도 열정적인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그가 달려온 발자취가 느껴져 숙연해졌다. 여러 차례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4시면 퇴근하는 시 공무원들과 달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 그의 희생적인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 번 더 강조한 자녀 교육의 소중함
후안 크루즈 만사노 시장은 무엇보다 가족의 소중함을 중요시했다. 그는 가족이란 없어서는 안 될 아름다운 관계라고 말한다.
“컴퓨터가 귀한 시절, 부모님이 책 한 권 사주시면 정말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부모님은 늘 제가 선택하는 것에 큰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셨고, 그런 사랑이 저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자리를 해주었는데,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감격스러운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

그래서인지 부모가 된 그는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늘 자녀에게 관심을 가졌다. 일에 바쁘고 신경 쓰지 못하더라도 하루에 세 번 이상 통화하면서 마음을 나누었고, 금요일이 되면 모두 한자리에 모여 꼭 함께 식사하며 대화를 나눈다고.

“식사를 할 때는 무엇보다 휴대폰 사용을 금지합니다. 물론 아이들이 동의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못다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무엇보다 겸손한 마음을 잃지 않도록 당부합니다. 딸에게도 사회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도록 이야기해요.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도 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열정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항상 내가 충분하지 않다는 굶주림도 느낄 수 있도록 하죠. 저는 무엇보다 사회를 위해 헌신할 줄 아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렇듯 그의 밥상머리 교육에서 아버지의 사랑과 마음을 자녀에게 자연스럽게 전하기에 충분했다.

 
 
그의 눈부신 행보에 1981년 상공회의소는 뛰어난 청년상을 수여했다. 1987년에는 망노 아괴이바나 금상을 수상했고, 1992년에 그는 시민들에게 문화 혜택을 준 업적이 인정되어 파올리 상을 받았다.

스물여덟의 청년에서 일흔의 노장이 되도록 달려온 후안 크루즈 만사노 시장은 마나티 시를 푸에르토리코에서 가장 부유한 시, 행복한 시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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