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영난으로 문을 닫았던 고려대의 명물 영철버거가 얼마 전 재학생과 졸업생, 단골들의 도움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학생들을 가족으로 여기며 장사를 해 왔다는 영철 아저씨의 가게에는 오늘도 ‘아저씨 보고 싶어 왔다’는 손님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10년 만에 다시 영철버거를 찾았다.

 
 
천 원으로 해결하는 든든한 한 끼, 영철버거
천 원짜리 핫도그는 늘 두툼했다. 돼지고기 등심에 아삭거리는 양배추, 그리고 매콤함을 더해주는 청양고추를 볶아 채운 핫도그 맛은 속이 꽉 찬 왕만두를 방불케 했다. 맛보다 더 놀라운 건 천 원이란 가격이었다.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는 건 거짓말이라지만, 이곳 주인이 그렇게 말했다면 누구라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올해 개업 16년째인 고려대 정경대 후문쪽 ‘영철버거’ 이야기다.
십수 년 전, 시골서 올라온 유학생이었던 나는 영철버거를 자주 찾았다. 하숙비 외에 집에서 보내주는 한 달치 용돈 30만 원은 그때까지 한 번에 쓴 적이 없는 큰돈이었지만, 새학기 교재비로 20만 원 이상을 하루 만에 써버리고 말았다. ‘어떻게든 아껴야 한다!’ 그때부터 천 원으로 점심을 때우기로 했다. 하지만 천 원으로 사먹을 수 있는 거라곤 우유 하나에 빵 하나, 아니면 학생식당의 국수나 라면이 고작이었다. 110kg 거구의 위장이 채워질 리 만무했다. 그런 내게 누군가 소개해준 영철버거는 정말 근사한 한 끼 식사였다.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사장인 이영철 아저씨의 성실함과 푸근한 인심에 반했다.
영철아저씨는 매일 아침 어김없이 가게 앞을 깨끗이 물청소한 후, 새벽에 경동시장까지 가서 떼어온 야채와 돼지고기를 철판에 볶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정성껏 만든 재료를 꽉꽉 다져넣은 버거는 하나만 먹어도 어찌나 속이 든든한지 저녁시간 될 때까지 허기가 지지 않았다. 거기에 5백 원만 더 내면 탄산음료까지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었다. 날이 더워 콜라가 당기는 날이면 나는 영철버거로 향했다. 7백 원짜리 캔콜라를 마시는 것보다 영철버거에서 1,500원에 음료를 맘껏 마시고, 버거는 가져와 다음날 점심으로 먹는 게 경제적이었으니까. 내가 일주일에 몇 번씩 출근도장을 찍는 단골임을 안 아저씨는 언제부턴가 음료값을 받지 않았다. 운동부 학생들에게는 간혹 버거 반 개를 더 얹어줄 때도 많았다.

천 원이던 영철버거는 2,500원으로 가격이 올랐고, 신메뉴 치즈버거도 등장했다. 하지만 내용물을 꽉꽉 채워주는 아저씨의 인심과 즐거워하는 손님들의 표정은 변함없다.
천 원이던 영철버거는 2,500원으로 가격이 올랐고, 신메뉴 치즈버거도 등장했다. 하지만 내용물을 꽉꽉 채워주는 아저씨의 인심과 즐거워하는 손님들의 표정은 변함없다.
‘어, 이게 누구야! 영철아저씨 아니야?’
여러 모로 신세를 진 영철버거를, 졸업한 뒤 꽤 오랫동안 잊고 지냈다. 그러던 지난 1월, 신문을 넘기던 중 낯익은 얼굴이 눈에 확 들어왔다. 영철아저씨였다. 버거가 담긴 쟁반을 손에 든 채 환한 미소를 짓는 사진 속 아저씨는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였다. 반가움에 얼른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고대 본점의 인기 덕에 영철버거는 한때 80개 넘는 가맹점을 거느릴 만큼 성업을 이뤘지만, 경영난에 부딪히며 하나둘 문을 닫고 지난해 7월 본점까지 폐점했다고 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그간 한 번도 아저씨를 찾아갈 생각을 못했던 게 후회스러웠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면서도 늘 미소를 잃지 않는 아저씨였지만 이때만큼은 비통함에 눈물을 감추지 못했으리라. 그런 영철버거가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6개월 만에 다시 문을 열었다는 소식이었다.
기뻤다. 기사를 본 다음날 바로 영철버거를 찾아갔다. 10년 만에 다시 만난 아저씨가 얼마나 반갑던지! “아저씨, 축하 드려요!” 하고 인사를 건넸지만, 정작 아저씨는 몰려드는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답인사를 할 틈도 없이 분주했다. 아쉬웠지만 활기차게 돌아가는 가게 모습을 보니 흐뭇했다. 한 달 후 계절학기가 끝나고 손님이 뜸해진 뒤에야 비로소 아저씨와 오붓이 커피를 마시며 지난 시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익보다 손님이 늘 먼저였던 스타 사장님
일찍 아버지를 여읜 영철아저씨가 학업을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온 건 열한 살 때였다. 몸뚱이 하나가 전 재산인 아저씨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3D 업종뿐이었다. 가구공장, 목걸이공장, 중식당, 레스토랑 등… 열아홉 살 때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한 뒤로는 막노동일을 했다.
“그러다 친척한테 빌린 돈으로 포장마차를 시작했어. 언젠가 어머니께서 ‘돈을 벌려면 장사를 하라’고 하신 게 떠올랐거든. 하고 많은 장사 중에 음식 장사를 하기로 한 건 우선 나부터가 배곯는 설움 속에서 자랐으니까. 마침 식당에서 일했던 경험도 있었고.”
두 달의 연구 끝에 개발한 영철버거를 안암역 사거리에서 팔기 시작한 건 2000년 9월의 일이었다. 아저씨는 ‘학생들을 상대로 돈벌이를 하겠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어디까지나 학생들에게 싸고 맛좋고 믿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 팔겠다는 각오로 시작한 장사인 만큼 아저씨의 원칙은 확고했다. 첫째는 청결이었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재료를 볶는 철판을 닦고 바닥을 물청소했다. 둘째는 ‘먹는 걸로 장난치지 말자’였다. 볶아놓은 고기와 야채가 눅눅해질 즈음 손님이 찾아오면 제대로 된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새로 재료를 볶았다.
“돼지고기도 처음에는 상대적으로 싼 엉덩이살을 사용했어. 엉덩이살은 볶으면 특유의 잡내가 나는데, 흐린 날은 그 냄새가 더 심해. 몇백 원 비싸더라도 좋은 것을 손님들께 드리자는 생각에 등심으로 바꿨어. 또 봄철에 황사가 불면 절대 장사를 하지 않았지. 암만 노점이라지만 학생들을 먼지 나는 데서까지 먹이고 싶지는 않았거든. 지금도 영철버거에 들어가는 재료는 대한민국 어딜 내놔도 빠지지 않는 질 좋은 것만 골라서 쓰고 있고.”
페이스북도 블로그도 없던 시절, 입소문은 가장 빠르고 위력적인 매체였다. 신선한 재료에 가격까지 착한 영철버거가 금방 고대생 사이에 화제가 되면서, 인근 주민은 물론 언덕 너머 초·중·고교에서 단체주문이 쏟아졌다. 그때부터 영철버거는 탄탄대로를 달렸다. 하루에 3천 개씩 팔릴 때도 많았다. 기부에도 열심인 아저씨는 사학 라이벌인 연세대와의 정기전 때면 버거 천 개를 학생들에게 무료로 나눠주었다. 신입생 OT나 졸업식이 열리면 영철 아저씨와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학생들이 줄을 설 정도였다. 그동안 고대에 기탁한 장학금 액수만도 1억이 넘는다. 이런 미담들이 널리 알려지면서 경제부총리가 주는 국민포장도 받았고, 프랜차이즈 가맹점을 열고 싶다는 요청이 쇄도했다.
“영철버거를 하는 동안 매출에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어. 단돈 천 원짜리 먹거리지만 어떻게 하면 이걸로 학생들을 돕고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를 생각했지. 내가 이만큼 성공하고 유명해진 것도 순전히 학생들 덕분이잖아? 그래서 학생들의 가장 큰 고민인 등록금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어 장학금을 기부한 거야.”

 
 
실패로 좌절한 영철버거, 보람과 사랑으로 재기하다
하지만 영철버거의 전성시대는 오래 가지 않았다. 학생들의 소비수준이 높아지면서 주변상권에도 변화가 일어나 파스타, 퓨전 음식, 디저트 등 트렌디한 먹거리들이 학생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80개나 되는 가맹점을 관리하며 품질을 유지하는 것도, 하루가 다르게 뛰는 물가에도 학생들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적자를 감수하며 가격을 고수하는 것도 벅찬 일이었다. 결국
4~7천 원대 고급 수제버거를 주력상품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뇌리에 박힌 ‘영철버거=천 원’이란 이미지를 바꾸기란 쉽지 않았고, 결국 적자가 누적되며 영철버거는 문을 닫았다.
하지만 고대 재학생과 졸업생, 단골들은 영철버거의 폐업을 결코 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동안 영철아저씨로부터 받은 사랑을 갚아야겠다는 생각에 자발적으로 영철버거 살리기 캠페인을 펼쳤다. 한 달 반 동안 2,765명이 참여해 모인 총 금액은 6,811만원. 경영학, 통계학을 전공한 졸업생들은 ‘영철버거’의 브랜드 이미지와 마케팅 전략을 짜주기도 했다. 그런 주변의 도움으로 1월 6일, 아저씨는 옛 영철버거 옆 건물 2층에 새로 가게 문을 열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아저씨는 요즘 새 가게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며 가슴이 뭉클할 때가 많단다.
“사업이 망하면서 ‘극단적인’ 생각도 여러 번 했어. 누가 영철버거 브랜드를 4억에 사고 싶다고 제안해 왔어. 나한테 40억보다 더 큰 돈이었지만 거절했지. 우리 학생들이 만들어준 거나 다름없는 영철버거가 자칫 상업주의에 휘둘리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거든. 새로 개업하고 고대 졸업생들이 수도 없이 다녀갔어. 얼마 전에는 최승돈, 허일후 아나운서도 왔고. 교수, 의사, 검사 된 친구도 많아. 영철버거가 아니었다면 초등학교 4학년 중퇴자인 내가 어떻게 이런 엘리트들과 마음으로 사귈 수 있었겠어? 이거야말로 몇 억을 준대도 바꿀 수 없는, 값진 보람이지.”
아저씨는 실패를 ‘인생의 터닝포인트’라고 표현한다. ‘가족과 지인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잘 망했다’고도 했다. 실패를 계기로 자신이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 깨달아서다. 아직 갚아야 할 빚도 많지만, 다행히 장사가 잘되고 있어 가까운 시일 내에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아저씨와 이야기를 마치고 가게 문을 나선 내 두 손에는 직장동료들에게 돌릴 영철버거 스무 개가 들려 있었다. 학창시절 즐겨 먹던 맛을, 그리고 아저씨의 따스한 정을 모두와 나누고 싶었다. ‘영철버거를 먹고 공부한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서 잘된다면 그보다 보람된 일은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영철아저씨. 서른여섯 해를 사는 동안 지금까지 나를 위해 밥을 차려준 분들의 심정이 다 그랬을 게다.
사랑으로 낳아주신 어머니, 직장생활로 바쁜 어머니 대신 날 키워주신 외할머니, 퇴근하고 나면 맛있는 저녁을 차려놓고 기다리는 아내, 그리고 매일 우리 직원들의 점심을 챙겨주시는 구내식당 아주머니들 (그 중 한 분은 얼마 전 하늘나라로 가셨다. 이 자리를 빌려 못했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까지…. 평소 잊고 지내던 분들의 손길손길을 되새길 눈을 뜨게 해 준 아저
씨가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집이 고대와 가까워 매주 서너 번은 차로 영철버거 앞을 지난다. 이제는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가게에 장사는 잘되는지, 손님은 많은지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영업이 끝난 밤 10시가 한참 지난 뒤에도 아저씨는 청소와 뒷정리를 하느라 가게를 바쁘게 뛰어다니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어김없이 카톡을 보낸다. ‘아저씨, 오늘 하루 수고 많으셨지요? 어서 마무리 짓고 들어가세요.’ ‘고마워. 언제든 들러서 커피 한 잔 하고 가.’ 어느덧 아저씨와 나는 마음으로 연결된 사이가 되어 있었다.

사진 | 홍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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