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 K팝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아이돌 스타들의 무대를 보노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철저한 자기관리의 결과물인 날씬한 몸매와 수만 명 관객들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자신의 춤과 노래를 선보이는 담력. 무엇보다 서너 명, 많게는 열 명 가까운 멤버들이 팔다리 각도까지 똑같게 한 몸처럼 움직이는 군무群舞야말로 아이돌 매력의 정점頂點이다. 때로는 발목이 접질리더라도 진통제까지 맞아가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연습에 매달리는 아이돌들이지만, 그 칼군무는 단순히 연습을 많이 한다고 나오는 건 아니다. 기자이자 영화감독인 이학준 씨가 실제 걸그룹 매니저로 1년간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 <대한민국에서 걸그룹으로 산다는 것은>에 실린 이야기를 살짝 엿보자.

 
 
연예기획사 스타제국의 신주학 사장은 2009년 무렵 새로운 걸그룹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제는 노래만 잘하는 가수가 아니라 외모와 춤 실력까지 갖춘, 이른바 ‘비주얼visual’을 겸비해야 뜨는 시대임을 간파하고 슈퍼모델 선발대회 상위권에 입상한 미소녀들을 연습생으로 영입했다. 그런데 거기서 갈등이 시작됐다. 소속사로부터 상대적으로 더 많은 기대를 받는 모델 출신 연습생 4명과 비모델 출신 연습생 5명이 조금씩 반목하다 결국 두 파로 나뉘게된 것이다. 비모델파들이 낀 반지가 그 증거였다. 그들은 리더(역시 비모델파)가 사준, 똑같은 디자인의 플라스틱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리고 5명이서 그 반지를 낀 손을 보란 듯이 앞으로 쭉 내밀고 찍은 사진이 연습실 공용 컴퓨터의 바탕화면으로 깔려 있었다.

모델파는 모델파대로 연습 무단이탈로 응수하며 대립각을 세워 나갔다. 스타제국 본부장과 매니저들은 그런 소녀들을 호되게 다그치고, 좋은 말로 타일렀다. 하지만 몇몇은 여전히 연습 때면 흐느적대는 춤과 건성건성 부르는 노래로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모래알처럼 하나하나는 반짝이지만 결코 진흙처럼 뭉치지는 못하는 이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뜻밖에 반전의 계기가 찾아왔다. 그들에게 드림콘서트에 출연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매년 5월 무렵 열리는 드림콘서트는 10대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톱가수들만이 설 수 있다. 장소는 수용인원 6만 명의 상암 월드컵경기장. 국내 팬들만 아니라 세계의 K팝팬들이 달려오는, 말 그대로 꿈의 무대다. 자기네 가수들을 출연시키려는 기획사들의 경쟁이 하도 치열해, 주최측은 기획사마다 두 팀에만 출전권을 주었다. 그 중 하나가 아직 정식 데뷔도 하지 않은 그들에게 배당된 것이다.

 
 
마침내 공연 당일, 리허설을 하던 그들은 치명적인 문제를 발견했다. 여러 개의 철제구조물을 연결해서 큰 무대를 만들다 보니, 이음쇠 부분에 높이 2cm 정도의 턱이 생겼다. 무대경험이 많은 아이돌들은 그 턱을 노련하게 피해가며 춤추고 노래했지만, 신인들은 객석 대신 바닥만 쳐다보며 장애물을 넘기에 바빴다. 춤과 노래가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라면 첫 무대가 고별무대가 될지도 몰라!’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의논했다. ‘무대 중간 턱에 걸려 넘어질 수 있으니 앞줄은 평소보다 훨씬 앞으로, 뒷줄은 아예 뒤로 가 버리자.’ ‘그러려면 스피커를 기준으로 대열을 맞춰보자.’ 한 명에게만 수박을 사주면 나머지 멤버들이 섭섭해하기에 머릿수에 맞춰 아홉 통을 사야 했던 그들이 하나가 된 것이다.

“나뮤, 나뮤! 파이팅!”
구호를 외치며 본 무대에 오른 나인뮤지스의 공연은 그 어느 때보다 완벽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시큰둥하던 관객들도 어느 새 열띤 응원과 박수를 보냈으니까. 아니, 완벽을 넘어 아름다웠다. 행여 동료들이 턱에 걸려 넘어질까봐 사인을 주고받는 배려심을 보였다. 자기 파트가 끝나면 다음멤버가 카메라에 잘 나오도록 몸을 살짝 굽히며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동안 마음에 쌓아왔던 벽을 허물고 나니 어느새 눈빛 하나만 봐도 척척 통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화려한 의상과 현란한 춤 솜씨보다, ‘One for All, All for One’, 하나가 된 그 마음이 아홉 명의 아가씨들을 한껏 빛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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