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꿈을 드디어 이루다

아프리카를 사랑하는 사람 심주환. 그는 케냐의 선교사다. 인생의 기쁨을 얻으려고 콜롬비아, 페루, 필리핀 등 세계 곳곳으로 방황했던 그가 마침내 찾은 행복은 아프리카 아이들의 맑은 눈 속에 있었다.

어떻게 하면 후회 없이 살 수 있을까?
나는 평범한 집에서 태어났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됐을 때 부모님은 이혼하셨다. 중고등학생 때엔 아버지와 살았고 대학생이 된 뒤로 나는 어머니와 살게 되었다. 부모님이 헤어지신 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때 나는 인생에 대해서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다. 그리고 어차피 사라지는 인생이라면 후회 없이 살고 싶었다. 정말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내 인생의 목표였다.

광고를 만들면 재미있지 않을까?
어린 시절 집에서 혼자 TV를 보는 시간이 많았다. 나는 이상하게도 만화영화보다 광고가 재미있었다. 10초~15초 사이에 사람들의 시선을 확 끄는 TV 광고를 보고 있으면 ‘어떻게 저렇게 기발한 생각을 했을까?’하고 신기해했다. 자연스럽게 ‘광고감독’이라는 꿈을 갖게 되었고 광고홍보과에 진학했다.
광고하는 사람들은 신선하고 색다른 아이디어를 고안해내기 위해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 나도 남들이 하지 못한 경험들을 하고 싶었다. 여행도 다니고 술도 마시고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기발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매일 새로운 생각들을 구상하기 위해 골몰했다.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내가 원하던 광고 프로덕션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기회가 생겼다. 노력과 함께 행운이 찾아왔다. 이제 내가 바라던 행복에 한걸음 가까이 온 것이다. 그 광고 프로덕션은 우리나라에서 매우 유명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어떤 광고감독을 유심히 관찰했다. 능력 있는 그는 돈도 많이 벌고 아내는 유명 연예인으로 얼굴도 예뻤다. ‘이 사람은 어떻게 살까? 진짜 행복할까?’ 내 상상과 달리 그분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얼굴에는 항상 피곤과 스트레스가 뒤범벅되어 있었다. 광고 감독만 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내 예상과 달랐다. 광고감독이라는 꿈에 회의가 들었다. ‘광고는 아니다. 다른 것을 해야겠다.’ 그리고 다른 길을 찾기 시작했다.

 
 

새로운 꿈, 음악
나는 오로지 ‘무엇을 하면 행복할까?’를 생각하면서 살았다. 부모님 모두 개인 사업을 각각 하셨기 때문에 내 호주머니에 돈이 떨어지는 적은 없었다. 하지만 헤어지신 부모님의 빈자리는 돈으로 결코 채울 수 없었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다. 명동처럼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현기증을 느꼈다. ‘나는 누구지? 도대체 나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광고감독을 포기한 후 음악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음악을 하면 행복할 것 같았다. 나처럼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밴드를 구성했다. 보컬, 베이스, 그리고 기타. 손이 짧은 친구가 베이스를 잡고 내가 드럼을 맡았다. 우리는 전부 수염을 길렀는데 밴드 이름은 ‘언임플로이드(Unemployed)’였다. 번역하면 말 그대로 ‘백수’.우리는 회사에 얽매여 살기 싫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지금은 다들 직장에 다니고 있다.) 어차피 한 번 죽는 인생,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마음도 몸도 지치다
시력이 좋지 않아서 신체검사에서 4급을 받고 군복무를 방위산업체에서 했다. 구로공단에 있는 공장에서 3년 가까이 일했다. 내 생활신조가 ‘후회하지 말자’였기 때문에 그동안 다른건 몰라도 돈이라도 많이 모으기로 마음 먹었다. 거의 한 푼도 안 쓰고 3천만 원을 모았다. 그리고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음악연습실을 구했다. 거기엔 방음시설까지 갖춰놓았기 때문에 원 없이 공연 연습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방위산업체에서 3년 동안 기계처럼 혹독하게 일하면서 몸이 지쳤고 마음엔 상처가 남았다. 사람들도 만나기 싫고 우울증까지 생기자 음악이 지겨워졌다. 홍대에서 공연도 했지만 내 마음에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이 있었다.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며 떠난 첫 번째 여행지, 콜롬비아
친했던 선배형이 필리핀 어학 연수 후 돌아왔다. 피부는 건강하게 그을렸고 근육도 있고. 뭐랄까? 마치 자연과 더불어 살다 온 느낌이었다. 형이 필리핀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해외에서 한국과 전혀 새로운 삶을 살고 온 형이 정말 멋있었다. 평소에 한국 사람들은 고정관념도 많고 사고가 경직되어 있다고 느껴왔다. 하지만 떠나고 싶다는 생각은 못했었는데, 그 형 이야기를 들으니까 나도 당장 해외로 나가고 싶어졌다. 한국을 벗어나면 음악을 다시 사랑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렵게 구했던 연습실을 팔아버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여권이 라는 것을 만들었다. 자유로운 영혼이 가득한 남미의 콜롬비아로 떠났다. 사실 난 아무것도 몰랐다. 콜롬비아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는데, 스페인어 사전만 달랑 들고 갔다.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에 도착했다. 나는 그곳에서 음악을 하면서 인생을 정말 재미있게 즐길줄 아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남미는 치안이 좋지 않지만 겁내지 않았다. 실컷 돌아다니다가 밤에 호텔로 돌아왔는데 이미 문이 잠겨 있었다. 경비원에게 사정을 말하고 싶었지만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았다. 다행히 경비원은 내가 잘 곳이 없다는 것을 눈치로 알아채고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그 친구에게는 어머니와 남동생이 있었다. 나를 가족처럼 따뜻하게 대해줬는데, 그런 행복한 가정이 부러웠다.

아마존에서 페루까지 계속된 여행
콜롬비아에서 꽤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지만 내가 원하는 행복은 아니었다. 나는 더 극적인 경험을 원했다. 정글 중의 정글, 아마존. 그곳은 생명력 넘치는 원주민들로 가득하니까, 나도 정말 자유로워질 것 같았다. 내가 그곳에 간다니까 주변 사람들이 말렸다. 특히 며칠을 같이 보냈던 호텔 경비원의 가족이 끝까지 걱정스런 눈으로 날 만류했다. 하지만 나는 죽어도 좋으니까 아마존으로 가고 싶었다.
 

 
 

내가 진짜 행복하기 위해서는 끝까지 가야 했다. 아마존에서 호텔 아닌 곳에 묵고 싶었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나무로 된 허름한 어느 집에 들어가 여기서 재워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 사람들은 흔쾌히 받아줬다. 나는 정말 그들의 삶에 동화되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은 날 친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뜯어내려고 했다. 이미 문명의 맛을 본 것이다. 배를 타고 더 깊숙한 아마존으로도 들어가봤지만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원주민들은 관광객이 와야 전통 복장으로 갈아입고 평소에는 우리처럼 나이키 티셔츠 차림으로 살았다. TV에서 본 아마존이 아니었다.
배를 타고 페루까지 넘어왔다. 잉카문명의 고대도시 마추픽추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3개월 동안 남미를 여행하면서 어느새 스페인어도 조금 늘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남미의 음악도 경험해봤다. 그러나 나는 점점 외로웠다. 먼 이곳까지 왔지만 정말 마음 깊숙한 곳에서 허전함이 새어 나왔다.

필리핀 작은 마을에서 느낀 ‘감사하는 마음’
남미에서 돈은 다 떨어졌고 그때 그 선배형이 있는 필리핀에 가고 싶어졌다. 한국에 돌아와 아르바이트로 돈을 좀 모아서 다시 필리핀으로 갔다. 그 형과 연락할 길이 없었는데 전에 ‘사가다’라는 곳에 있다고 했던 말이 기억나서 무턱대고 그곳을 찾아갔다. 깊은 산 속에 있는 사가다 마을의 자연은 정말 경관이었다. 산을 깎아서 계단식으로 만든 농경지는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웠다.

물어 물어 형이 살았던 집을 찾아냈지만, 이런! 형은 내가 도착하기 하루 전에 한국으로 돌아갔다. 다행이 형을 잘 아는 어떤 현지인 가족을 만나서 그 집에서 지낼 수 있었다. 그 집 부부에게는 아이가 세 명 있었다. 그런데 첫째 아이는 뇌성마비여서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엄마가 밥을 먹여줘야 했고 심지어 혼자 앉아있을 수도 없었다. 앉으면 바로 꼬꾸라지기 때문에 엄마가 항상 몸을 밧줄로 묶어서 고정시켜 줘야 앉을 수 있었다.

심심한 시골 마을에서 별다른 할 일이 없던 나는 하루 종일 그 아이를 관찰했다. 손과 발은 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아이. 이 아이는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울까? 그리고 얼마 뒤 이 아이를 향한 시선이 나에게로 옮겨졌다. 이 아이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부족함 없이 살았지만, 자유롭게 이리저리 돌아다녔지만, 마음은 늘 불행했으니까.

그리고 처음으로 감사했다. 내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손과 발이 있다는 것이. 나는 이제껏 ‘조금 더 조금 더’ 행복한 것을 찾았지만 내가 가진 것에 대해 감사했던 적이 없었다. 나에게는 행복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행복을 담을 수 있는 마음의 그릇이 없었던 것이다.

내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했는데 부모님 두 분 모두 건강하게 살아계시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내가 걸을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이전에는 없던 감사와 행복에 솟구쳤다.
뇌성마비 아이의 엄마에게 짧은 영어로 말했다. 감사하다고. 정말 감사하다고. 그분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이 끼고 있던 십자가 목걸이를 내게 주셨다. “나 한국으로 돌아갈 거에요. 다시 새롭게 살고 싶어요.”

사진 속 빛나는 밝은 미소들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학교 도서관에 앉아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우연히 한 잡지를 집어 들었는데 굿뉴스코 해외봉사 단원들의 사진이 있었다. 그 밝은 미소란! 여러 나라 사람들과 함께 웃고 있는 사진을 본 순간 온 몸에 전율을 느꼈다. “내가 찾던 게 이거였어!” 굿뉴스코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었다. 마침 ‘컬쳐’라는 세계문화체험박람회에서 자원봉사자를 모집하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지원했고 남미 댄스 ‘불레리아’팀에 소속되어 공연을 준비했다. 굿뉴스코 단원들은 그들이 해외에서 겪은 삶과 그때 알게 된 감사와 행복을 나에게 자주 들려줬다. 뮤지컬 팀에서 준비한 ‘빌리의 꿈’ 그리고 ‘링컨’ 등 굿뉴스코 단원들이 직접 준비한 공연을 보면서 참 많이 울었다. 내가 생각했던 행복은 눈에 보이고 즐겁고 재미있는 것들이었는데 마음으로 만나는 행복이 존재했다.

2008년 아프리카의 말라위에서 해외봉사단 단원으로 활동하던 시절, 현지 학생들과.
2008년 아프리카의 말라위에서 해외봉사단 단원으로 활동하던 시절, 현지 학생들과.

말라위에서의 행복한 1년
마침내 나도 7기 굿뉴스코 단원으로서 말라위에 갔다. 1년 동안 이곳 사람들을 위해 이 한 몸 불태워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정작 현실 속의 나는 먹는 것만 좋아하고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겨도 좌절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사소한 일로도 마음이 상하는 속 좁고 유치한 나를 한결같이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말라위 지부장님 부부와 말라위 현지 사람들. 어릴 적부터 외롭게 살아온 내가 경험하지 못한 따뜻함. 그 속에서 나는 점차 달라졌다. 마음 중심에서 평안함을 느꼈고 자유로웠다.

케냐의 시골마을 키수무에서 아내와 함께. 당시 아내는 첫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케냐의 시골마을 키수무에서 아내와 함께. 당시 아내는 첫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케냐 월드캠프를 마치고 참석자들과, 딸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케냐 월드캠프를 마치고 참석자들과, 딸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진짜 꿈을 찾다
방황했던 시절 해외로 나가려고 처음 만들었던 여권의 유효기간이 이제 1년이 남았다. 여권 속 사진을 보면 내 모습이 참 우스꽝스럽다. 히피족을 추구하며 기른 내 수염과 험상궂은 표정. 행복과 꿈을 좇아서 이리저리 갈피를 잡지 못했던 시간들이 이제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느껴질 만큼 낯설다.
현재 나는 케냐의 선교사가 되었다. 아프리카에는 방황하는 아이들이 참 많다. 부모들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도. 이제 그들에게 진정한 평안과 꿈을 찾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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