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려서부터 무척 똘똘했다.
욕심도 많아 학교에 들어가서도 공부는 물론, 미술, 체육 등 다양한 대회를 나가서 입상도 많이 했다. 지금 생각하면 성공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잘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눌려 살았다.

6년전 부산대학교를 다니던 중 우연히 굿뉴스코 해외봉사를 알게 된 오지영은 어느덧 스물일곱 살 아가씨가 되었다. 그녀는 지금도 ‘중국’이라는 말만 들으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6년전 부산대학교를 다니던 중 우연히 굿뉴스코 해외봉사를 알게 된 오지영은 어느덧 스물일곱 살 아가씨가 되었다. 그녀는 지금도 ‘중국’이라는 말만 들으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욕망의 끝에 서다
나에게는 다른 친구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어머니가 결혼 직후 아버지의 외도와 도박으로 이혼하셨던 것. 당시 나는 어머니의 배 속에 있었기에 태어났을 때부터 아버지에 대한 상실감은커녕 존재감도 느끼지 못하고 자랐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어머니가 열심히 일하시며 지극정성으로 나를 뒷바라지해주셨다.
내가 공부에 독이 오른 건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였다. 어느 날 가장 친했던 친구가 ‘국제중학교’에 입학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내게 국제중학교는 그때까지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낯선 곳이었는데, 절친인 나에게조차 숨겨가며 열심히 준비했던 친구에게 배신감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열심히 공부해서 꼭 좋은 대학교에 진학해야지!’라고 결심했다.   
그때부터 나는 성적향상에 매달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랬는지! 중학교 입학 전 3개월 간 하루 10시간 이상 책상에 앉아서 초등학교 고학년 내용을 죄다 복습했다. 학급편성고사에서 우리 반1등을 하니 앞으로도 좋은 성적을 받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중학교 3년 내내 반장을 했는데, 나는 늘 중간고사를 마친 날이면 기말고사 계획을 세울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좋은 이미지를 갖고 싶어서 항상 밝은 모습을 유지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교과 수준이 높아져서 그런지, 성적이 원하는 만큼 잘 오르지 않았다. 나는 특히 수학과목을 어려워했는데, 수학 시간에 ‘다른 친구들은 선생님 말씀을 모두 이해하는데, 나는 왜 이럴까!’ 하며 남몰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수능성적표를 받았을 때는 정말 허무했다. ‘내가 이런 성적을 받으려고 6년간 그렇게 고생을 했나?’ 싶었다. 가슴이 텅 빈 듯 공허했다.

누가 대학생활을 낭만적이라고 했던가
원치 않았던 학교의 대학생이 되면서 나는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처럼 다시 잘하고 싶은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더군다나 내가 입학한 중어중문과는 절반 이상이 외국어고등학교를 졸업했거나 중국 거주 경험이 있는 친구들이었다. 중국어를 처음으로 접하는 나로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좀처럼 친구들과 실력차를 좁힐 수 없었다. 2학년이 되었을 땐 이런 식으로 살다가는 내가 앞으로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들었다. 
그 무렵 친하게 지낸 학과 선배가 내게 ‘굿뉴스코 해외봉사’를 소개했다. 솔직히 그때만 해도 나는 봉사에 관심조차 없었기에, ‘해외’에서 1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1년 정도만 중국에서 살다 오면, 중국어를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굿뉴스코 워크숍에 참석하며 여러 지역을 탐색했다. 나는 안중근 의사가 의거를 벌인 곳으로 유명한 중국 하얼빈을 지망했다.

하얼빈에서 진정한 미소를 찾다
처음 하얼빈에 도착했을 땐 매서운 칼바람에 깜짝 놀랐다. 1년 중 약 9개월이 겨울이어서 사방이 얼음으로 꽁꽁 얼어붙은 곳. 지리적으로도 러시아와 가까워서 러시아풍의 건축물을 흔히 볼 수 있다. 나와 다른 단원들은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영하 30도 이하의 강추위에 옷깃을 여미었다. 쌩쌩 부는 칼바람에 눈물을 흘리면,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와 볼에 얼어붙었다. 또 음료수 병을 손에 쥐고 가면 얼마 되지 않아 얼음이 되어 있었다. 덕분에(?) 우리 일행은 이후에도 하얼빈에서 두 눈만 빼고 모든 곳을 옷으로 꽁꽁 싸매고 다녀야 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추운 날씨 속에서 꽤나 많은 사람들이 아이스크림을 사먹는다는 점이다. 실외 온도가 냉장고보다 더 낮기 때문에 아이스크림을 길가에 내놓고 판매한다. 나도 가끔 길에서 다른 단원들과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는데, 그 맛이 꽤 독특하면서도 달콤해서 지금도 종종 생각난다.
하얼빈 IYF지부에는 중국 사람들이 많아서 나를 포함한 5명의 단원을 따듯하게 맞아주셨다. 중국 사람들은 대륙의 국민답게 마음이 넓은 편이다. 한 턱을 내는 ‘칭커’라는 문화가 있어 손님을 대접하는 걸 좋아한다. 특히 자신의 국가를 방문한 또 하나의 손님으로 여기기 때문에 외국인들에게는 무한한 친절을 베푼다. 나는 처음 먹는 음식, 처음 만나는 사람들로 중국에서 접하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새로 사귄 친구들과 정을 나눌 수 있어서 마음이 점점 따뜻해졌다.
하루는 친하게 지내는 현지 대학생 한 명이 우리를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 초대해 교내식당에서 대접했다. 팔꿈치에 구멍이 날 정도로 해진 옷을 입고 다녔지만, 그는 오히려 우리에게 “대접할 기회를 줘서 고맙다”며 기뻐했다. 우리는 가난한 그의 모습을 보며 미안했지만, 그는 계산하면서도 “학교까지 찾아와줘서 고맙다”고 연신 인사했다.
손짓 발짓으로 사람들과 대화하며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중국어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한국에서는 2년 동안 그렇게 공부를 해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했는데….’ 숙소를 같이 사용했던 한 살 어린 동생은 “언니, 뭐가 그렇게 행복한지 자면서도 웃더라”고 말해줬다.

모범생 콤플렉스를 벗어던지다
함께 합숙하는 단원들은 가족같이 지내며 마음을 나누었다. 잠들 무렵엔 동기들끼리 힘든 일, 속상한 일들을 모두 꺼내어놓고 수다도 떨었다. 나도 매일 그 날 있었던 이야기를 조잘거리는 시간이 즐거웠다. 그래서 똑같이 마음을 나누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늘 강한 척, 밝은 척 살아와서인지, 정작 힘들 때는 주변 사람에게 털어놓고 말하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센터에서 함께 지내는 단원들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힘든 일, 속상한 일이 있는 날이면 언니에게 다 털어놓는데, 언니는 나에게 왜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아? 나만 이야기를 하니까 거리감이 느껴져.”
어느날 동료 단원이 해 준 말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때부터 자연스레 지금껏 내가 살아왔던 날들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실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속상해하실 일을 저지를까봐 미리 알아서 주의하며 살아왔다. 어렸을 때도 몸이 약해서 밤새 코피를 쏟아도 행여 어머니가 잠에서 깨실까 혼자서 해결하곤 했다. 밖에서도 항상 잘하고 좋은 모습을 보이려 노력할 뿐, 공부하며 마음이 힘들어도 늘 나홀로 고민하며 해결하려 했다. 더 이상은 혼자서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이후로 나는 무엇이든 주변 사람들과 마음을 터놓고 지내려고 노력했다. 나의 이런 변화는 중국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행복하게 했다.
팅팅도 그 중 한 명으로, 4월의 IYF 중고등학생 캠프에서 만났다. 중국은 산아제한 정책으로 대부분 가정에서 한 명씩만 자녀를 낳는데, 외동으로 제멋대로 키워진 아이들은 자신을 절제하지 못해 청소년기에 쉽게 음주와 흡연에 빠진다. 팅팅은 처음엔 남자처럼 스포츠머리를 하고, 조금만 말을 걸어도 바로 달려들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캠프 내내 뚱한 표정으로 있는 그 친구에게 우연히 내 이야기를 조금 털어놓았다. 외롭고 힘들게 지냈던 이야기, 중국에 와서 얼마나 행복한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매서운 눈빛을 하고 있던 팅팅은 그날 나에게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는 체육중학교를 다니며 친한 친구들과 나쁜 짓을 많이 하고 다녔다고 했다. 음주와 흡연은 물론, 다른 학생들과 패싸움을 즐기고 무고한 사람도 많이 때렸다고. ‘그렇게 사는 게 너무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며 눈물 흘렸다. 나는 마음이 아팠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기뻤다. 이렇게 솔직하게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팅팅은 이날 자신의 슬픔을 털어놓고 마음이 굉장히 밝아졌다. 나와도 무척 친해져서 수시로 왕래하며 친자매처럼 지냈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나와 몇몇 단원들은 그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그의 학교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때 예쁜 치마 교복을 입고 수줍게 웃는 팅팅은 어찌나 예쁘던지! 그는 이듬해에 나처럼 굿뉴스코 단원이 되어 태국으로 해외봉사를 갔다.

도전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
하얼빈에서 3개월을 보낸 후, 우리는 심양이란 지방으로 이사했다. 나는 처음에는 가기가 너무 싫었다. ‘이제야 하얼빈 대학생들과 친해졌는데!’ 서운한 마음에 심양행 기차 안에서 눈물을 흘렸다. 더욱이 우리가 가는 곳은 IYF지부가 새로 생기는 곳이라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활동해야 하는지조차 참 막막했다.
다행히 지부장님은 “새로운 곳에서 뭐든지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해보라”며 “너희를 도와주겠다”고 하셨다. 단원들은 우선 지도를 한 장 사서 심양에 있는 대학들을 조사했다. 그리고 동북대학, 심양대학, 요녕사범대학 세 곳에서 한글반을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솔직히 나는 너무 막막하기만 했다. 교실을 빌려야 하므로 일단 대학교에서 우리를 도울 친구를 만나야 하는데, 그게 당최 말처럼 쉬워 보이지 않았다. 내가 중국인이더라도 낯선 외국인이 다가와 “우리 친구 하자. 나 좀 도와줘”라고 한다면 이상해할 것 같았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중국 학생들은 무척 호의적이었다. 중국어로 말을 걸자 몇몇 학생들은 한글반을 할 수 있도록 직접 교실도 알아봐 주었다. 게다가 우리가 만든 한글반 홍보 포스터를 직접 복사해서 게시판에 붙여주기도 했다.
한글반은 정말 성공적이었다. TV 드라마와 가요, 영화 등으로 한류 문화를 접한 많은 학생이 한국어에 관심을 두고 꾸준히 참석했다. ‘이게 과연 될까?’ 부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의구심을 가졌던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중국 학생들의 친절에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는 한국에서 내 일만 걱정할 뿐,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그날 지금껏 내가 많은 사람에게 마음을 닫고 살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후로 우리는 IYF 행사차 자주 다른 지방으로 기차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광활한 중국 땅을 다른 단원들과 2박 3일간 기차로 횡단할 땐, 잠자리와 씻는 게 좀 불편했지만 꽤 재미있었다. 좌식기차로 장시간 이동할 때면 의자 밑에 들어가 바닥에 누워서 잠을 자는 중국인들이 있다. 한국에서는 상상조차 못 할 일이어서 처음에는 놀랐지만, 24시간 이상 앉아서 가다 보면 나중엔 나도 ‘에라, 모르겠다!’하고 지저분한 바닥에 누워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졌다.
귀국할 때쯤에 나는 성격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깍듯한 모범생이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오히려 웃음이 늘어나고 표정이 다양해졌다. 또 어떤 일이든 ‘까짓거, 해보자’하는 두둑한 배짱이 생겼다. 덕분에 이후 학교생활과 취업 문제를 예전보다 수월하게 감당했다.

내가 예전보다 가족들과 허물없이 지내며 집안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또 동생도 나처럼 굿뉴스코 단원이 되어 지난해에 인도로 해외봉사를 다녀와서 더욱 사이가 돈독한 남매가 되었다
내가 예전보다 가족들과 허물없이 지내며 집안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또 동생도 나처럼 굿뉴스코 단원이 되어 지난해에 인도로 해외봉사를 다녀와서 더욱 사이가 돈독한 남매가 되었다
대륙을 품은 인재人才가 되다
중국에서 지낸 1년간 나는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행복했다. 하루는 그 이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지금껏 성공해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살고 싶었는데, 중국에서는 이와 반대로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지’에 대해서 고민해야 했다. 신기하게도 이런 마음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나면 마음이 편하고 따듯해졌다. 그러면서 조금씩 깨달았다. 무언가가 잘돼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야 내가 진정으로 행복해진다는 것을 말이다.
해외봉사를 마친 후 우리 집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가 재혼하셨는데, 새아버지가 생기면서 나에게는 한 살 어린 남동생이 생겼다. 내가 예전보다 가족들과 허물없이 지내게 되며 집안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또 동생도 나처럼 굿뉴스코 단원이 되어 지난해에 인도로 해외봉사를 다녀와서 더욱 사이가 돈독한 남매가 되었다.
나에게는 새로운 꿈이 생겼다. ㈜드림팩토리의 김수영 대표처럼 다른 사람의 꿈을 찾아주고, 여기에 영감을 북돋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졸업 후 2년간 H사 어학연구소에서 중국어 수험서를 제작했지만, 최근 나의 진짜 꿈을 이루기 위해 퇴사하고 마인드교재를 만들고 있다. 하얼빈에서 배웠던 봉사와 도전정신으로 방황하는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싶다.

※심양瀋陽
중국 요녕성 중앙에 위치한 도시. 중국 요녕성의 성도省都이자 동북 3성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이다. 시내 곳곳에는 청나라 시대에 지어진 북릉공원과 고궁 등 유적이 있으며, 한인타운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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