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의 야구사랑이 하도 뜨거워 ‘구도球都’라고까지 불리는 부산에서 마해영을 만났다. 한국 프로야구를 평정한 강타자로 현재 스포츠채널 야구 해설위원, 대학교수, 타격코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지만 ‘선수라고 불릴 때가 가장 기쁘고 편하다’는 마해영. 그가 독자에게 전하는 프로의 세계가 자못 흥미로우면서도 심오하다.

프로의 조건 1 오로지 실력으로 말하라

마해영이 처음 야구방망이를 잡은 사연을 듣자면 피식 웃음이 나 온다. 1970년 8월, 부산 대연동의 산동네에서 태어난 소년 마해영 은 바나나를 좋아했다. 지금이야 동네 슈퍼만 가도 쉽게 바나나를 살 수 있지만, 그때는 특별한 날에만 먹는 비싼 과일이었다. ‘언젠가는 한번쯤 사 주시겠지’ 하는 심정으로 여러 번 어머니께 투정을 부렸지만 소용없었다.
마해영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학교 운동장으로 달려갔다. 구석에 앉아 돌멩이로 바닥에 ‘바나나, 바나나…’를 적다 문득 눈을 들어보니 초등학생들이 야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뇌리에 온통 바나나 생각으로만 가득하던 그의 눈에는 야구장갑이 꼭 바나나 뭉치처럼 보였다. 얼마 후 학교 야구부에서 신입부원을 뽑는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바나나처럼 생긴 야구장갑을 떠올 린 그는 곧바로 달려가 지원했다.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이다.
만화 같은 사건으로 시작한 야구였지만, 그는 곧장 두각을 나타냈고 6학년 무렵에는 팀내 최고 타자로 성장해 있었다. 야구명 문인 부산중과 부산고를 거쳐 1989년 고려대에 입학했다. 당시 고 려대는 박동희, 이상훈, 임수혁 등의 호화멤버를 자랑하는 대학야구 최강자였다. 그런 선수들 사이에서 마해영의 실력은 그다지 돋보이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래 서였을까, 어느 날 연습을 마치 고 숙소로 향하던 그에게 어느 코치가 한마디를 던졌다.
‘네가 프로 가서 성공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그야말로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이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한편으로는 오기가 솟았다.
‘보란 듯이 프로에 가서 성공 해 보이겠습니다. 그래서 코치 님 앞에 나타나 어서 장을 지지시라고 큰소리를 치겠습니다. 두고 보세요!’
그날부터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 말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할 방법은 실력뿐이었으니까. ‘남들 잘 때 방망이 한 번 더 휘두르고, 남들 쉴 때 1분이라 도 더 달린다’는 각오로 연습에 매달렸다. 졸업 후 롯데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고 입단한 마해영은 1995년 타율 0.275, 18홈런, 87타점의 준수한 활약 을 펼쳤다. 시즌이 끝나고 그 코치를 찾아갔지만, 뜻밖에도 그 는 자신이 한 말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허탈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혹평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 생각하니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게 그의 기억이다.

 
 

프로의 조건 2 결국은 실전이다

웬만한 자동차보다 훨씬 빠른 시속 150km로 날아오는 7cm 짜리 공을 쳐내기란 일반인의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 다. 특히 야구는 다른 종목에 비해 단시간에 기량을 끌어올리기가 어렵다. 훌륭한 포수요 원 하나를 키우는 데만도 4년 이상 공을 들여야 할 정도다. 그래도 지름길은 있지 않을까? 마해영은 ‘실력을 키우는 데 실 전에 부딪히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선수들이 타격훈련을 할 때 흔히 피칭머신을 사용합니다. 코스와 속도를 설정해두면 그대로 공을 던져주는 기계지요. 하지만 실전에서는 어떤 투수도 피칭머신처럼 틀에 박힌 공을 던져주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안타를 맞지 않으려고 집요하게 타자의 약점을 파고들지요.”

선수 시절, 마해영은 뛰어난 영어실력을 갖춘 것으로도 유명했다. 롯데에서는 용병인 호세나 외국인 감독 로이스터의 통역을 맡기도 했다. 중고교 때 거의 영어공부를 하지 않았고, 대학에 들어 간 뒤에야 영어를 시작해 단기간에 마스터할 수 있었던 것도 문법에 맞든 안 맞든 끊임없이 외국인과 대화를 시도하며 실전훈련 을 한 덕분이었다고 한다.
다시 야구 이야기로 돌아오자. 2002년은 마해영의 야구인생에 서 최고의 해였다. 172개의 안타를 때려 최다 안타 1위에 올랐고, 포지션별로 최고의 선수에게 주어지는 골든글러브(지명타자)까지 수상했다. 하지만 언제나 후배들에게 ‘야구는 팀플레이다’라고 강조 하는 마해영에게 가장 큰 기쁨은 한국시리즈 MVP가 아니었을까.
2002년 그때로 거슬러 가보자. 2000년 시즌이 끝난 뒤 마해영 은 삼성으로 트레이드되었다. 팀은 바뀌었지만 실력은 그대로여 서 154안타(4위), 30홈런(4위)을 때리며 이승엽과 함께 삼성의 정규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하지만 한국시리즈에서는 막강 타선의 두산에게 무릎을 꿇고 만다.
이듬해인 2002년 김응용 감독은 팀을 재정비하며 우승을 향 한 열망을 내비쳤고, 삼성은 정규리그 1위에 오르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상대는 리그 3위 현대와 2위 기아를 차례로 꺾고 올라온 저력의 팀 LG였다. 더구나 LG 감독은 ‘야구의 신’이 라는 김성근이 아닌가. 2002년 11월 10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6차전, 삼성은 한 경기만 이기면 대망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4,5차전에서 양팀 모두 한 점 차 승패를 주고받았기에, 삼성도 LG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삼성의 마지막 공격기회인 9회말 스코어는 9-6, 시리즈는 그렇게 7차전을 맞이하는 듯했다. 그런데 이승엽의 3점 홈런이 터지고, 다 음 타자인 마해영 역시 한국시리즈 역사상 최초의 끝내기 홈런을 날리며 팽팽한 승부에 마침표를 찍었다. 6차전까지 홈런 3개를 포 함해 11안타 10타점을 쓸어담은 마해영은 기자단 투표에서 만장일치로 MVP에 올랐다.
“큰 무대에서 멋진 활약을 펼칠 수 있었던 원동력을 물으신다면, 역시 실전에 많이 서 본 경험일 겁니다. 고등학교나 대학교 때 도 여러 번 우승을 해 봤고, 국가대표로도 출전한 적이 있으니까 요. 그러다 보니 부담과 압박이 큰 프로무대에서도 잘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2002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9-6으로 패색이 짙던 9회말, 팀 동료 이승엽과 함께 극적인 랑데부 홈런으로 팀에 우승을 선사한 마해영. 그러나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기 전 그의 가슴을 훑고 지나간 것은 투병 중인 선배 임수혁 선수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이었다. (사진 삼성라이온즈 제공)
2002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9-6으로 패색이 짙던 9회말, 팀 동료 이승엽과 함께 극적인 랑데부 홈런으로 팀에 우승을 선사한 마해영. 그러나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기 전 그의 가슴을 훑고 지나간 것은 투병 중인 선배 임수혁 선수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이었다. (사진 삼성라이온즈 제공)
 
 

프로의 조건 3 몸·마음·사생활 엄격 관리

프로야구 전력분석요원들끼리 쓰는 용어 중에 ‘쿠세’라는 게 있다. 쿠세란 버릇을 뜻하는 일본어로, 선수가 경기를 할 때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습관을 말한다.
가령 투수라면 직구를 던질 때면 온몸의 힘을 모으느라 이 를 악물게 되고, 변화구를 던 질 때면 힘보다는 콘트롤을 발휘해야 하기 때문에 입술을 앞으로 쑥 내밀게 된다. 이런 습관을 간파당한 투수는 자신이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른 채 계속 안타를 얻어맞는다. 설령 알았다 하더라도 자신의 습관 을 고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지만 ‘프로라면 모름지기 부단한 연습으로 자신의 약점 을 고쳐야 하고, 그 싸움에서 이겨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마해영의 지론이다. 마해영이 프로무대에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린 건 1999년 0.372의 타율로 수위타자를 차지하면서다. 그 전까지 한 번 도 3할 이상을 기록한 적이 없던 그의 타율이 급상승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흔히 타자들이 가장 치기 어려워하는 코스는 몸쪽 공이다. 마해영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 의 약점을 간파한 일본인 타격 코치는 그에게 몸통의 회전을 이용해 공을 치는 새로운 타법 을 전수해 주었다. 실내골프장 에서 골프채를 휘두르는 등 독특한 훈련을 하며 석 달 간 꾸 준히 연습한 끝에 새 타격폼을 익힌 마해영은 금방 타 팀 투수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그 해 프로야구 최고의 타자에 오를 수 있었다.
마해영이 부산을 연고로 하는 롯데에서 뛰는 동안 감수해야 할 핸디캡이 있었다. 프로야구 선수들은 연간 70경기를 원정으로 치르는데, 롯데의 경우 서울-부산, 인천-부산, 서울-부 산으로 이어지는 경기일정을 소화하다 보면 체력이 금방 고갈되곤 했다. 하지만 그는 프로로서 당연히 극복해야 할 과정 의 하나로 여기고 체력관리에 더욱 마음을 쏟았다. 그가 롯데와 삼성에서 뛴 9년간 결장 한 횟수는 단 두 번에 불과하다. 핵심은 절제다. 잘 먹고 잘 쉬고 늘 정해진 시간에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스타가 되어 많은 연봉을 받고 인기도 얻다 보니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놀다 가 다음날 경기에 지장을 받는 선수를 많이 봤습니다. 그러다 급기야 부상을 당하기도 하고요.”
프로 입문 후 특별히 큰 부상을 당한 적 없는 마해영은 자기관리의 모범사례로 불릴 만하다. 자신의 에세이집 <마해영의 야구 본능>에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자기관리란 몸 관리, 마음 관리, 사생활 관리, 주변 관리, 특히 가정 관리 등이 대표 적이다. 이런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한 제아무리 뛰어 난 소질과 천부적 능력을 타고 났다고 하더라도 부귀와 명예도 결국에는 ‘말짱 도루묵’이다.”

프로의 조건 4 스포트라이트도 한순간… 퇴장 후를 준비하라

지난 2008년 친정팀 롯데로 복귀한 뒤 유니폼을 벗었지만, 야구 에 대한 애착은 야구를 갓 시작한 초등학교 때나 지금이나 변함 이 없다. 야구 해설위원, 독립야구단 연천 미라클 자문위원, <일간 스포츠> 웹진 칼럼니스트, 호서대 야구대학원 겸임교수 등 야구 관련 직함은 오히려 더 늘어났다. 틈틈이 집 근처의 고등학교 야구부원들에게 타격기술도 전수하고 있는 그는 후배들에 대한 애 정이 큰 만큼 쓴소리도 감추지 않는다.
“많은 고교생들이 프로가 되고 싶다면서도 그에 걸맞은 노력은 하지 않는 것을 볼 때면 안타까워요. ‘지금 너는 몇 퍼센트나 최선을 다하고 있니?’라고 물으면 우물쭈물 대답을 못하더군요. 경기 중 실수를 해도 친구나 감독님께 미안한 마음을 갖기보다 되 레 자기가 화를 냅니다. 팀스포츠인 야구에서 실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배려와 협동심 아닐까요?”
한때 언론과 팬들의 스포트라이트를 한껏 받은 마해영은 톱의 위치에서도 내려갈 때를 생각하는 현명함을 발휘했다. 아내의 권유로 선수 때부터 대학원을 다녔고, 지난 겨울에는 스포츠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으며 지도자와 교수의 길을 준비했다. 대학 때 시 작한 영어공부는 지금도 계속하고 있으며, 야구전문 기자가 되겠다는 꿈도 생겼다. 풍부한 인맥과 경험이 강점인 그의 인터뷰와 칼럼은 네티즌과 야구팬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야구를 통해 많은 것을 얻었지만, 돌아보면 아쉽고 얼굴이 화끈 거리는 일도 많다고 그는 말한다. 프로에 데뷔하면서 ‘절대 자만 하거나 나태하지 말자. 교만하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스타 반열에
오르면서 자신도 모르게 팬들 의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고 남 이 해주는 입바른 소리를 흘려 버리곤 했다. 30대가 되어서야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팬의 소중함을 깨달았다는 마 해영. 이후 팬들이 사인을 요청 할 때면 기꺼이 응하며 일일이 ‘고맙습니다’ 하는 인사를 빼놓 지 않았다고 한다.

마해영을 아는 야구인들 그 리고 팬들은 지금도 그에 대해 ‘2% 아쉽다’는 평가를 내린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지만 그 시절이 너무 짧았기 때문 이다. 그러나 취재하며 알게 된 마해영의 선수시절 미담은 그 아쉬움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 도였다. 열심히 훈련하지만 제대로 된 장비를 갖추지 못한 후 배들에게 그는 자신의 장비를 기꺼이 선물하곤 했다. 반면 실력만 믿고 빈둥대는 후배들에 게는 버럭 호통을 치곤했다. 한국시리즈에서 극적인 끝내기 홈런을 쳤을 때도 기뻐하기보다는 식물인간 상태로 투병 중인 옛 동료 임수혁을 먼저 떠올렸다는 마해영. 그가 독자들에게 전해준 프로의 조건도 결국 ‘야구에 대한 사랑’, 한 단어로 요약 되지 않을까 싶다.

 
 

사진 | 배효지 기자 디자인 | 김진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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