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뉴스밴드 보컬 허준석

아버지의 폭력, 가족들이 끌어다 쓴 사채, 알콜중독…. 스무 살 나이로 감당하기 힘든 삶의 무게에 짓눌려 살다 떠난 일본 해외봉사. 그곳에서 허준석은 자신보다 훨씬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을 보았다. 욕망의 도구였던 음악이 희망을 전하는 도구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삶이 너무도 고통스러워 한때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는 허준석. 하지만 대학생을 위한 캠프와 마인드 강연에서 공연하는 지금, 그는 너무도 행복하다고 말한다.도망치듯 떠난 일본에서 그가 만났다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어떤 것이었을까?
삶이 너무도 고통스러워 한때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는 허준석. 하지만 대학생을 위한 캠프와 마인드 강연에서 공연하는 지금, 그는 너무도 행복하다고 말한다.도망치듯 떠난 일본에서 그가 만났다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어떤 것이었을까?
잘못 꿰어진 첫단추
해외봉사단원들로 구성된 노래공연팀 ‘굿뉴스밴드’에서 보컬을 맡고 있는 허준석.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 둘과 함께 살던 어린 시절 그의 집은 행복한 여느 가정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단독주택을 소유하며 1층은 세를 줄 만큼 집안 형편도 넉넉했다. 그러던 중 40평짜리 넓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서 집안에는 차츰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마치 딴사람이 된 것처럼 주사를 부리며 가족들에게 손찌검을 하기시작했고 어머니는 견디다 집을 나가 버렸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어린 준석도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 가방을 매고 학교에 가던 그를 아버지가 불러 세웠다.
“너, 이 녀석! 지금 어디 가려는 거야?”
“네? 학교에 가는데요.”
“학교는 무슨 학교? 너 지금 네 엄마한테 가려는 거잖아!”
아버지는 화장실에서 호스를 가져다 물을 틀고는 준석과 방에 대고 뿌려대기 시작했다. 바닥을 적신 물은 어느 새 준석의 발목까지 차올랐다. 다른 친구들은 부모님의 축하를 받으며 생애 첫 등교를 하는 입학식이었지만, 준석은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느라 그날부터 일주일 간 학교에 가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팔이 부러지는 사고까지 당하면서 준석은 초등학교 1학년을 거의 고스란히 빼먹었다. 진급이 힘들 정도였지만 선생님들은 고민 끝에 준석을 2학년으로 올려보냈다. 그때부터 준석은 학교 수업을 따라가지 못했다. 유치원도 못 다녀 기초학력이 여러모로 부족했고, 한글은 가까스로 읽을 수 있었지만 수학 등의 과목은 도무지 이해할 수없었다. 그렇게 첫단추가 잘못 꿰어지면서 준석의 학교생활은 걷잡을 수 없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가정파탄, 사채, 그리고 알콜중독까지…
중학교를 졸업할 때쯤, 준석은 누구도 못 말리는 문제아가 되어 있었다. 소위 ‘질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던 그에게 학교는 더 이상 공부하는 곳이 아닌, 놀러가는 곳에 불과했다. 누나들도 집을 떠나 생활한 지 오래였다. 집으로 돌아온 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어머니는 준석에게 교회에서 운영하는 대안학교에 다닐 것을 권했다. 아들이 신앙을 힘입어 마음을 다잡았으면 하는 어머니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준석은 대안학교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고 급기야 가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갈등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그렇게 부모님은 헤어지셨어요. 대안학교에서는 기숙사 생활을 하며 한 달에 한 번씩 집으로 외박을 나오는데, 어느 외박날 아버지께서 ‘이제 나랑 살자’고 연락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사시는 집에 갔더니 웬 낯선 아주머니와 함께 살고 계셨어요.”
아주머니는 준석에게 밥을 차려 주었다. 밥 한 술과 함께 김치 한 조각을 삼켰는데 속에서 강한 거부감이 올라왔다. ‘어머니가 해 주시던 김치 맛이 아니다.’ 성격이 모난 준석은 그대로 식탁을 엎고 컴퓨터와 TV를 던지며 소리를 질러댔다. 일주일 뒤, 아버지는 그에게 저녁을 사주며 한 마디를 건넸다. “너 가고 싶은 대로 가라. 그리고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어느덧 대안학교를 졸업한 준석은 스무 살의 청년이 되었다. 어머니와 두 누나와 함께 살았지만, 가족은 그에게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생활능력이 없어 주위에서 돈을 빌려 쓴 어머니와 누나들은 돈을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되어 빚쟁이들에게 쫓겨다니고 있었던 것.
한번은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모아 최신 휴대폰을 사러 통신사 대리점으로 갔다. 그러나 그에게 대리점 직원은 이미 휴대전화가 세 대나 가입되어 있어 더 이상 개통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알고 보니 어머니와 누나들이 그의 명의를 빌려 개통한 것들이었다. 믿었던 가족들에게 배신을 당했다 생각하니 준석은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가난의 고리를 끊고 싶었어요. 배운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없어서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하수구 청소, 환풍기 수리, 막노동, 페인트칠, 편의점, 당구장, 노래방까지…. 하루 두 군데씩 아르바이트를 하며 죽어라 일했지만, 그런다고 돈이 모이는 건 아니더라고요.”
동생이 돈을 번다는 사실을 안 누나들은 그에게 돈을 요구했다. 그걸로도 모자라 그의 명의로 대출을 받고 보증까지 서 달라고 했다. 원래 가족끼리는 보증을 서 줄 수 없는 것이 원칙이지만, 사채는 달랐다. ‘설마 누나인데 무슨 일이야 있겠어?’ 하는 준석의 바람과는 달리, 그를 보증인으로 세워 놓고 돈을 빌린 누나는 종적을 감춰 버렸다. 사채는 빌린 돈보다 이자가 더 무서운 돈이다. 500만 원을 빌렸다면 이자에 이자가 붙어 어느 새 1,200만 원을 갚아야 하는 식이었다. ‘어떻게든 열심히 살면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버텨오던 그의 기대는 허망하게 무너졌다.
“결국 하루하루를 술만 마시며 살다 보니 21살의 어린 나이에 알콜 중독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심장이 두근대고 떨려 밖에 나가지 못할 정도였어요. 지하철 타고 한두 정거장만 가도 식은땀이 흘렀어요.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는 건 아닌가?’ 하고 괜히 불안했어요. ‘이렇게 살다 죽으면 얼마나 비참할까?’ 싶었죠.”

홍대에서 록 밴드 보컬로 활동하던 시절
홍대에서 록 밴드 보컬로 활동하던 시절
‘알고보니 난 참 행복한 사람이었구나!’
그렇게 흔들리던 그를 붙잡아준 것은 음악이었다. 홍대 주변의 음악학원을 다니며 가수 데뷔를 꿈꾸는 연습생들과도 안면을 터가며 어깨 너머로 노래를 배워나갔다.
“어느 선배 가수로부터 ‘록음악을 해 보라’는 권유를 받고 밴드를 결성해 음악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서른이 되기 전에 해보고 싶은 건 모두 해 보자’는 생각에 생계에 대한 고민도 접고 음악에만 매달렸습니다. 하다 보니 조금씩 인지도가 쌓여갔고, 포털에 팬 카페가 생길 정도로 인기를 얻었어요. 하지만 얼마 후 해체되고 다른 멤버들과 함께 다시 밴드를 결성했습니다.”
밴드의 상징은 당나귀였다. 고집 센 당나귀처럼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만의 음악을 고수하겠다는 의미에서였다. 그는 열심히 활동했고, 어느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출연요청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방송국 녹화당일,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촬영에 임한 준석의 기대는 무너지고 말았다. 가정불화 등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음악을 해 온 준석의 인생스토리를 좋은 방송소재로 생각한 제작진이 그에게만 질문공세를 퍼붓자, 기분이 상한 다른 멤버들이 반발한 것이었다. 결국 출연이 취소되었고 준석은 다른 멤버들과 술을 잔뜩 마신 뒤 밴드에 작별을 고하고 돌아섰다. 그렇게 만취한 상태로 집에 돌아오던 그에게 뜻밖의 사건이 터졌다.

“취객을 때려 기절시킨 뒤 금품을 빼앗는 소위 ‘퍽치기’ 강도를 당하고 말았어요. 어찌나 심하게 맞았는지 이틀 동안을 꼼짝도 못한 채 자리에 누워 지내야했어요. ‘서른 살 되기 전까지 하고 싶은 건 다 해보고 죽자’는 생각이었는데, 막상 죽을 위기가 닥치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제게 어머니가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에 다녀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가 해외봉사를 가기로 한 나라는 일본이었다. 거리가 가까워 비행기삯도 적게 드는 데다 지내기 힘들면 바로 귀국할 심산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일본생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살던 그가 빡빡하고도 규칙적인 봉사단원으로서 생활하기까지 그는 굿뉴스코 지부장님들과 지루한 싸움을 계속해야 했다.
“처음 일본에 갔을 때 제 머리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장발이었습니다. 도쿄 지부장님이 ‘머리 깎아야지?’ 하시면 ‘그럼 저 한국 돌아가겠습니다’라고 대들곤 했지요. 중국이나 필리핀 등 다른 나라에서 온 봉사단원들이 보는 앞에서 지부장님께 언성을 높인 적도많았어요.”

어머니와 함께. 아들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가수가 되는 것이 어머니의 꿈이다.
어머니와 함께. 아들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가수가 되는 것이 어머니의 꿈이다.
굿뉴스코 지부장님들은 그런 그를 따끔하게 꾸짖는가 하면 때로는 차근차근 타이르면서 함께 봉사활동을 해 나갔다. 그런 관심과 사랑 속에서 그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그를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계기는 일본 내 위안부 할머니들 앞에서의 공연이었다.
“일본에는 일제강점기 때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해방이 된 뒤에도 돌아오지 못한 할머니들이 아직도 많이 계세요. 한국어도 일본어도 못하시고, ‘으아’ ‘억’ 하는 소리만으로 겨우 의사소통을 하십니다. 단지 나라를 잃었다는 이유만으로 평생을 고통스럽게 사시는 분들을 보며 ‘난 참 행복한 사람이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았죠.”
자신이 부르는 <아리랑> 한 소절만 듣고도 엉엉 울음을 터뜨리는 할머니들을 보며 그는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꼈다. ‘내 삶은 가족들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하면서도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며 살아온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욕망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노래하기 시작했다. 도쿄 외에도 오사카, 사이타마, 야마가타, 시즈오카 등 일본의 크고 작은 도시를 돌며 청소년들을 위한 공연을 펼쳤다.

함께 굿뉴스밴드에서 활동하는 김동현은 이제는 눈빛만 봐도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되었다.
함께 굿뉴스밴드에서 활동하는 김동현은 이제는 눈빛만 봐도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되었다.
틀을 벗어나는 곳에 해답이 있다
지난 1월 귀국한 뒤에도 그는 여전히 바쁘지만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대학생 마인드 강연 모임인 심청연과 IYF 월드캠프 등 120회 이상의 크고 작은 무대에서 공연하며, 직접 마인드 강사로 강연을 하기도 한다. 지난 6월에는 자신이 졸업한 대안학교에서 후배들에게도 강연을 했단다. 그동안 진 빚도 어느 새 거의 다 갚았고, 작은누나도 아프리카로 해외봉사를 다녀온 뒤 지금은 결혼해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살고 있다. 지난 7월 초에는 8월 20일부터 방영되는 <슈퍼스타 K> 시즌7 오디션에도 참여했다. 결과에 대해서는 이미 마음을 비운 상태다. 그에게는 <슈스케> 못지않게 소중한 IYF 학생캠프와 일본 도쿄 월드캠프에서의 공연이 그를 기다리고 있어서다.
“<바람의 화원>이라는 소설을 보니 김홍도가 ‘틀 속에 갇혀 있는 순간 해답은 없다. 틀을 벗어나는 곳에 해답이 있다’는 말을 했더군요. 제 삶이 꼭 그랬어요. 해외봉사를 가기 전까지 저는 늘 ‘나는 불행하다’는 생각의 틀 속에 갇혀 살았어요. 그런데 일본에 가서 삶 속에 숨은 작은 감사를 찾는 법을 배웠습니다. 삶 속에서 행복과 변화를 맛보고 싶으시다면 저처럼 해외봉사를 다녀오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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