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morrow’s Book Club

장롱 깊은 곳에 넣어둔 오래된 편지 묶음을 꺼내 볼 이유는 참 많습니다. 꽃잎이 다 떨어져서, 나무의 초록이 너무 푸르러서, 봄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우연히 듣게된 노래의 노랫말이 마음에 와 닿아서...아버지의 편지를 꺼내 읽은 것은 양희은의 노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말>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편지
집집마다 전화가 없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대학교 진학을 위해 도시로 떠나온 딸은 고향에 계신 아버지께 편지를 썼습니다. 아버지는 딸에게 답장을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객지에 두고, 온 신경을 서울에 두고’ 살아가시는 아버지의 염려와 그리움이 편지에 묻어납니다. 이제야 아버지의 마음을 느낍니다. 그땐 왜 아버지의 사랑을 몰랐던 것인지, 좀 더 많이 표현할 걸 후회가 밀려옵니다. 아버지는 이 세상에 안 계시고, 울음만 제 곁에 남습니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시절을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사람의 인생은 단 한번만 진행되는, 그래서 일생一生이기에 아버지가 그리울 때면 다시 편지를 꺼내 읽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글’을 읽으며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아버지의 마음을 느끼고, 아버지의 삶을 생각합니다.

읽는다는 것은 글쓴이의 목소리를 듣는 일
누군가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그의 목소리(음성)를 듣는 일입니다. 뭔가를 읽고 있을 때를 가만히 떠올려 보세요.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생각해 봐도 좋겠네요. 우리의 눈이 글자를 따라가며 읽을 때 마음속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나요? 목소리가 들리나요? 우리가 소리를 내어 글을 읽든 그러지 않든 우리의 눈이 글자를 따라갈 때 우리 마음속에서는 자동으로 소리들이 만들어집니다. 꼭 문자 자동인식 스피커처럼 말이죠. 지금 누구의 목소리가 들리나요? 제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을 테니 아마도 여러분의 목소리가 들릴 거예요. 책을 읽을 때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경험 해본 적 없으신가요? TV 프로그램이나 북 콘서트 같은 데서 작가를 만나 그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면 책을 읽을 때 작가의 목소리가 자동 지원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계속 읽다보면 작가의 목소리와 내 목소리가 한데 섞이는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어떨땐 작가의 목소리가 들렸다가 또 어떨 땐 내 목소리가 들리는 희한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죠. 꼭 내가 작가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작가가 내 생각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만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대화문이 많은 소설을 읽을 땐 또 어떤가요? 나도 모르게 등장인물의 캐릭터에 맞는 목소리와 톤으로 책을 읽고 있지 않나요?

읽는다는 것은 글자와 소리 이상의 것을 상상하는 일
이렇게 바꿔야겠습니다. 읽는다는 것은 눈으로 글자를 따라가며 소리를 듣는 일이고, 소리를 듣는 일은 작가의 목소리와 내 목소리를 듣는 일이며, 작가의 목소리와 내 목소리가 겹쳐 들린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공감한다는 것이고, 누군가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나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보는 일이라고요.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는 C.S.루이스(<나니아 연대기> 저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혼자 책을 읽지만 책을 통해 만나는 세계는 우리의 세계이고, 내 마음에 파장을 크게 일으킨 작품은 떠나보낼 수 없으며, 그 작품을 쓴 작가와 우리는 연결되어 있는 듯한 느낌마저 가지게 되니까요.

작가와 연결되기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이렇게 시작하는 책이 있습니다. 소설가 김연수가 자신보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의 책을 읽고 밑줄 그은 문장들에 대한 생각을 묶은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입니다.
2004년 초판이 나온 이 책은 베스트셀러 목록이나 추천 도서 목록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10년 이상 꾸준히 독자들에게 읽히고 있는 스테디셀러입니다. 저는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도 하고, 사서 읽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바람에 또 사기도 했습니다. 물론 여러 번 읽었습니다. 이번 봄에도 한 번 더 읽었네요.
이 책을 읽을 때 저는 즐겁습니다. 김연수 작가가 밑줄 그은 고전의 문장들을 낮은 소리로 읊조려 보아도 좋고, 그가 들려주는 유년 시절, 문학청년 시절 이야기들에 절로 웃음이 터질 때도 있습니다. 어떤 부분은 혼자만 읽기가 아까워 옆에 있는 사람에게 읽어주기도 하고, 작가의 사투리(경상북도 김천)을 상상하며 책을 읽기도 합니다. 왜 이렇게 이 책을 좋아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니 부드럽게 술술 써내려간 그의 문장이 저의 옛 기억을 불러오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그런데 이 말은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린 말입니다.
스무살 무렵 읽었던 책, 스무살 무렵 만났던 사람, 스무살 무렵 많이 했던 생각들이 그 후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건 사실이지만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 버리는 것은 아닌 것 같거든요. 글을 쓸 당시 35살이었던 작가는 자신이 너무 늙었다고 생각했다지만 지금도 계속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는 영원히 청춘을 졸업할 수 없어 보입니다.

너무 흔하게 쓰여 소중함을 모르는, 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우리 생애 가장 아름다운 말, 청춘
서른 살 이후의 삶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스무 살 무렵 좀 다르게 살았을 거라는 김연수 작가는 오늘의 청춘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더 많이 기뻐하고 더 많이 슬퍼하고 더 많이 갈망하시길. 자신의 인생에 더 많은 꿈들을 요구하시길. 이뤄지든 안 이뤄지든 더 많은 꿈들을 요구했던 그 시절의 기억이 당신들을 살아가게 만든다는 걸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알게 될 테니. 그러니 지금 스무 살이라면, 꿈들! 언제나 꿈들을! 더 많은 꿈들을!’ 꾸라고, ‘삶이란 정답표가 뜯겨나간 문제집과 비슷해서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게 정말 맞는 것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말이죠.
작가의 말대로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을 테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더 많이 기뻐하고 더 많이 슬퍼하고 더 많이 갈망하고, 더 많은 꿈들을 스스로에게 요구한다면 어떤 모르는 것이 와도 그것을 맞아들일 준비를 조금 더 잘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작가의 말에 덧붙이고 싶습니다.
청춘들이여~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 말할 수 있고, 좋아하는 것을 타인과 함께 나누며, 좀 더 나은 나를 꿈꾸기를, 많이 느끼고, 충분히 좋아하기를, 그리고 기꺼이 영향받기를 바랍니다.
오늘 오후엔 봄바람 속에 날리는 꽃잎들처럼 아버지의 편지와 김연수의 문장들이 반짝거리며 스쳐갑니다.

 
 
<청춘의 문장들>
‘작가의 젊은 날을 사로잡은 한 문장을 찾아서’란 부제가 붙은 소설가 김연수의 산문집. 작가가 스무살 무렵 자신보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의 책을 읽고 밑줄을 그은 문장들에 대한 생각을 묶은 책. 2004년 초판이 나온 이 책은 베스트셀러 목록이나 추천 도서 목록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10년 이상 꾸준히 독자들에게 읽히고 있는 스테디셀러이다. 
(마음산책 2004초판, 2015년 5월 현재 30쇄)




 
 
<청춘의 문장들+> (마음산책 2014)
<청춘의 문장들>의 후속편. <청춘의 문장들>에서 작가가 이야기했던 유년 시절, 문학청년 시절, 직장인 시절의 삶과 <청춘의 문장들>이 나온 이후 10년의 시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인터넷 서점 MD였던 서평가 금정연과의 대담도 10꼭지 실려 있다.





허남숙

책 읽어주는 사람, 역사학을 전공했으나 역사책보다 문학책 읽는 것을 더 좋아했다.
스무 살 무렵, 레몽 장의 <책 읽어주는 여자>를 읽고 ‘책 읽어주는 여자 사람’이 되기를 꿈꾸었고, TV 교양프로그램, 어린이프로그램 구성작가로 한동안 일했다. 지금은 도서관과 지역아동센터 어린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일을 하고 있으며, 책 읽어주는 친구 엄마, 책 추천하는 이모, 책 읽기를 권하는 동네 언니로 살고 있다.

디자인 | 김진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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