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근로장학사업 우수사례 수기공모전 최우수상

“장애인이네…. 아, 불쾌해.”
이처럼 사람들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 또한 처음엔 남들처럼 그러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나에게 2014년 6월, 한국장학재단에서 국가근로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는 통보가 왔습니다. 설레는 마음에 선발된 기관을 확인해 보았는데 대구 보건학교라는 곳이었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다 검색을 해보았는데 그곳은 장애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였습니다. 그 순간,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장애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수는 있는 걸까?’ 하는 생각에 두려웠습니다. 예전에 지하철에서 지적 장애인이 불쾌한 냄새를 풍기며 시끄럽게 난동을 부리고 내 옆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던 기억이 떠오르며 막막함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시작하는 당일까지도 망설이고 고민하고 걱정하며 첫 출근을 하였습니다.

휠체어가 가장 많은 학교
대구 보건학교에서 근로를 하기 전 오리엔테이션을 한다는 연락을 받고 갔습니다. 저는 학교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놀람을 금치 못했습니다. 전동 휠체어와 수동 휠체어 수백 대가 일자로 쭉 세워져 있었고, 휠체어에 알록달록 스티커와 낙서들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동 휠체어를 본 것도 처음이지만 이렇게 많은 휠체어가 줄 서있는 걸 본 것은 더욱 처음이었습니다. 그 신기함을 안고 오리엔테이션 장소로 향했습니다. 오리엔테이션을 하면서 보건학교 교감선생님께서 여기서 일을 하면 정말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다며 돈을 주고도 사지 못할 경험을 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전 그 말을 듣고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무슨 경험을 더 한다는 걸까? 여기서 내가 고생했으면 했지 도대체 무엇을 배우고 얻어간다는 걸까?’
그리고 출근하는 날, 처음으로 학생들을 만났습니다. 저는 음악수업 보조를 맡게 되었고, 수업을 참관하면서 아이들을 도와주는 일을 맡았습니다. 역시나 처음엔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쉽게 도움의 손이 가질 않았고, 매 순간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고 닦고를 반복하면서 내 몸 챙기기에 바빴습니다.

선생님, 우리도 노래하고 싶어요!
며칠 동안 일을 했지만 적응하기가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남은 기간만 열심히 채우자는 생각으로 근로에 임했고 맡은 과목이 음악이니만큼 음악만 열심히 가르치자 다짐했습니다. 성악을 전공하고 있는 저는 도대체 장애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막막했지만 담당 음악선생님이 2주간 교생실습을 한다고 생각하고 학생들을 지도해 보라 간곡히 부탁하셔서 선생님을 꿈꾸는 저로서 나름 최선을 다해 집에서 프린트 자료도 만들고 교과서도 연구해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쳐보고자 하였습니다. 첫 시간에는 중3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중학교 학생들은 A반과 B반이 따로 되어있는데 A반은 수업을 어느 정도 따라가는 학생들이고, B반은 수업을 거의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들로 구성이 되어있었습니다. 다행히 첫 수업은 A반 학생들이 들어와 제가 연구한 프린트 자료를 가지고 수업할 수 있었습니다. 뮤지컬과 오페라에 대해서 설명하고 시대별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학생들은 쉽게 따라오지 못했고 딴짓을 많이 하고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우리나라 시대별 음악에 대해 가르치기 위해 70년대 가요인 가수 나미의 <빙글빙글>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휠체어가 흔들거릴 정도로 춤을 추며 따라 불렀습니다. 그 모습에 저는 아이들이 음악에 이렇게 집중할 수 있고, 순수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음 반인 B반 아이들도 A반에 비해서 수업 참여도나 집중력은 좋지 않았지만 음악실에 노래방 기계가 있어 같이 트로트와 동요를 부르며 수업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준비한 이론 수업은 생각처럼 진행되지 않았고 ‘역시 내가 생각했던 대로구나’라고 아이들을 단정하고 평가해 버렸습니다. 그날 오후 3시부터는 종일반 아이들 한 명씩을 맡아 진학지도를 했습니다. 제가 맡은 아이는 우진이었습니다. 담당 선생님은 우진이는 공부하는 것을 싫어해서 책을 읽어 주거나 노는 걸 좋아한다고 특별히 신경을 써달라고 하였습니다. 우진이는 제가 책을 읽어줘도 집중하지 않고,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려라” 해도 전혀 따라 오지 않고, 펜을 쥐어주어도 집어 던지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전 무엇을 억지로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그냥 같이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루는 빈 교실에서 우진이와 초콜릿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진이는 뭐하고 싶어?”라고 묻자, 우진이가 “놀아요”라고 말했습니다. 딱히 얘기할 주제가 없어 그냥 오페라 하나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우진이가 “선생님, 나 이 노래 알아요. 이거 비제 카르멘 하바네라!”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저는 다른 걸 들려줘 보았습니다. 바흐 <G선상 아리아>, 쇼팽 <폴로네이즈 제1번 군대>, 브람스<헝가리 무곡> 등 어떤 음악을 들려줘도 우진이는 다 맞혔습니다. “우진아, 너 음악 좋아하니? 어떻게 다 알아?”라고 물어보자 우진이는 “엄마가 집에서 많이 들려줬어요. 엄마랑 같이 뮤지컬도 보러 가고 음악회에도 가봤어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한번 보지 못한 공연들을 봤다고 하니 신기하기도 하면서 요즘 학생들도 잘 모르는 클래식 음악을 기억하고 맞힌다는 게 너무 신기해서 욕심이 생겼습니다. 퇴근하면서도 우진이에게 음악에 대해서 더 가르쳐 주고 싶고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쏟아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매일 2시간씩 우진이에게 음악에 대해 가르쳐 주었는데 다른 수업을 하면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던 우진이가 유독 음악시간에 관심을 가지고 잘 따라와 줘서 이전까지 제가 학생들을 향해 가지고 있던 모든 편견이 다 사라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음악선생님을 통해 우진이의 병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우진이는 근위축증이라는 병을 가지고 있는데, 근위축증은 운동세포가 서서히 파괴되어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으며 아직까지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불치병입니다. 그래서 길어야 5년 이내 사망하는 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면서 그렇게 음악을 좋아하고 천재적인 아이의 상황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우진이를 지도할 수 있는 남은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지도하기로 마음먹고, 우진이에게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들려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렇게 우진이를 가르치면서 점점 학생들과의 생활이 편해지고 익숙해졌습니다.

졸업 연주회 무대에서 아리아와 한국가곡을 불렀다.
졸업 연주회 무대에서 아리아와 한국가곡을 불렀다.
뛰고 싶고 날고 싶은 슈퍼맨을 꿈꾸는 아이들
한 달 동안 음악수업과 진학지도를 하면서 이미 저는 음악을 배우는 데 있어 몸이 불편한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너무나 열정적이고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제가 앞으로 추구해야 하는 교육의 방향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여름방학이 시작되었고 저에게 체육 수업을 담당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왜 저에게 체육 수업을 담당하라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 음악을 전공하고 있고 음악을 계속 가르쳤고, 체구도 작아 체육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방학 첫날 학교를 가보니 선생님께서 저에게 장애인 스포츠인 보치아 훈련에서 보조 업무를 주셨습니다. 강당에서 보치아를 희망한 학생들이 모여 운동을 하면, 저는 경기를 도와주거나 공을 주워주는 일을 했습니다. 힘들지만 아이들과 정말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하루는 같이 보치아를 하다가 제가 한 아이에게 “나중에 뭐가 되고 싶어?”라고 물었습니다. 그 학생이 순수하게 웃으면서 “슈퍼맨이 되고 싶어요. 슈퍼맨은 어디든 갈 수 있잖아요. 날 수도 있고 뛸 수도 있으니까요. 저도 슈퍼맨처럼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 또 다른 여자아이는 “저는 아이돌이 될 거예요. 유이 언니처럼 예쁘게 무대에서 춤도 추고 노래할 거예요. 저 요즘 걷는 연습도 하고 있어요. 전 아이돌 언니들처럼 예쁘니까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웃음이 났습니다. ‘슈퍼맨? 아이돌? 그게 꿈이 될 수 있어? 가능은 해?’ 그런데 그 생각은 정말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꿈? 그것은 이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루고 싶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자기의 꿈을 말하라고 하면 꿈이라기보단 현실에 초점을 맞춰 공무원이나 평범한 일을 말하기 일쑤이고 혹은 없다고 대답하는 학생들이 대다수입니다. ‘어차피 이루지도, 하지도 못할 건데 뭐 하러 꿈을 가져’라는 생각을 하는 학생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느새 세상에는 더 이상 꿈을 꾸기보단 세상을 원망하고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남기 위해 자신만을 생각하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 학생들은 현실적인 꿈이 아닌 정말 자기 자신의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걸 꿈꾸고 남의 생각을 배려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쉬운 일이지만 지금 우리에겐 너무나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 순박하고 아름다운 꿈! 그것을 가슴 속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니 주위 환경에 끌려가는 나를 반성하게 되었고 나를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근로가 끝나는 날 아이들은 제게 다가와 “선생님, 안 가시면 안돼요? 난 선생님이 너무 좋단 말이에요”라고 말을 건네주었습니다. 잘해주지도 챙겨주지도 못했는데 떠나야 하는 아쉬움이 너무나 저를 슬프게 했습니다. 그곳에서 아이들과 너무 정이 들었나 봅니다.

돈보다 소중한 깨달음
40일 간의 근로를 마치고 전 너무 많은 것을 깨달았고 변했습니다. 나만 생각했던 이기적인 내 모습을 다시 되돌아보게 되었고 돈보다 더 소중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교장선생님이 말씀하셨던 ‘이곳에서 돈보다 소중한 것을 많이 배울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정말 수백 번 수천 번 가슴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와 같이 뭐든 하고자 노력하며 꿈을 키우는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이 아직까지도 제 기억 속에 남아있습니다. 더 많이 알려주고 도와주지 못한 것이 아쉽고 미안합니다. 이번 국가근로는 단순히 돈을 번 것이 아니라 세상을 마주하고, 다양하고 특별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이 기회는 앞으로 내 인생과 미래에 도움을 줄 것이고 이를 통해 전보다 더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슈퍼맨으로! 누군가는 아이돌로! 나는 그런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그곳에서 꿈꾸고 있을 아이들을 언제나 응원할 것이고 나는 전진할 것입니다. 저를 이렇게 바꿔준 대구 보건학교, 그곳의 아이들, 또한 한국장학재단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 모든 사람들이 저를 발전시켰고 지금의 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항상 노력하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담당 | 김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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