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처럼 포기하지 않기

좋은 직장, 좋은 집, 좋은 배우자…. 사람은 무언가를 얻고 싶어 한다. 역주행일까,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주려는 이들이 있다.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 행복해지길 바라는 이들. 그들은 왜 그 길을 걸을까? 자신을 위해준 누군가를 만난 적이 있으며, 그 만남이 가슴에 아주 따뜻한 기억으로 늘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리나 씨의 작은 사랑 이야기를 소개한다.

▲ 나리나_굿뉴스코 베냉 9기. 그녀는 특수 교육이 필요한 삶의 현장에서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며 용기를 북돋는 일을 한다. 그녀와 만난 사람들은 그녀의 비타민 같은 밝은 마음에 물들게 된다.
▲ 나리나_굿뉴스코 베냉 9기. 그녀는 특수 교육이 필요한 삶의 현장에서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며 용기를 북돋는 일을 한다. 그녀와 만난 사람들은 그녀의 비타민 같은 밝은 마음에 물들게 된다.

고등학교 교사인 나리나 씨. 그녀는 일반 교사와 달리 울산에서 지적 장애를 가진 학생들이 있는 학교마다 찾아가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특수 교사다. 그녀가 가르치는 학생들 가운데에는 자신의 이름을 잘 쓰지 못하는 학생도 있고, 연필의 부드러운 촉감이 싫어서 강한 혐오감을 행동으로 표출하는 학생도 있다. 돌발 행동에 대응하느라 학생들을 가르치는 시간이 늘 모자라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아주 쉬운 일들도 지적 장애 학생들에게는 넘기 힘든 장애물들이에요. 몇 번을 연습해도 안 되기에 학생들은 그 일 배우는 것을 포기하고 싶어하지요. 예를 들면, 전동드릴은 나사못을 박을 때와 빼낼 때 스위치 위치를 반대로 옮겨주어야 하죠. 그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도 한 번만 배우면 금방 알게 되는데, 지적 장애 학생들은 그것을 숙지하는 데 일주일이 걸려요.”
나리나 씨는 왜 이렇게 힘든 길을 걷고자 했을까? 고등학교 3학년 때 그녀의 반에는 소아마비를 앓아 늘 발뒷꿈치를 들고 다녀야 하는 친구가 있었다. 장애로 인해 힘겨워하는 친구를 도우며 그녀는 장애 학생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관심은 대학 전공과목의 선택으로 연결되었다. 하지만 대학에서 특수교육학을 배우며 그녀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지적 장애를 가진 학생들을 직접 보니 밥도 잘 못 먹고, 시계 하나를 차는데도 일주일이 걸릴 만큼 학습이 더뎠어요. ‘내가 마음 변하지 않고 이 길을 갈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어요.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공부는 하지만 점점 힘들었어요. 아침에 좋은 기분으로 시작해 보지만 저녁이 될수록 우울해졌어요. 어느 날 저를 보니, 지적 장애 학생들보다 더 큰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면 당황하는 자폐성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감정이 다시 제자리를 찾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기에 변화가 있는 공간에서는 생활 패턴을 유지하기 어렵다. 나리나 씨는 무엇이든지 제 계획에서 벗어나면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는 자신을 보며, 자폐성 장애 증상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나리나의 자기 혁명, 해외봉사
현재 걷고 있는 불확실한 길,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것 같은 자신, 불투명한 미래…. 늪처럼 삶을 끌어당기는 어두운 그곳을 박차고 나가고 싶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다가온 한 줄기 빛, 우연히 친척의 권유로 알게 된 해외봉사. 그녀는 아프리카로 가기로 했다. 봉사를 다녀온 선배 단원들이 쏟아내는 자신이 다녀온 나라에서 얻은 행복한 추억들, 맑은 미소와 밝은 마음에 이끌려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아프리카로, 그것도 1년 동안 봉사를 다녀오기로 한 것이다.
“제가 부모님의 이야기를 잘 들었지만 유약했어요. 그런 저의 틀에서 벗어나 성장하고 싶어서 해외봉사는 평생 가보지 못할 나라를 가보자고 결심했어요. 그 나라가 베냉이었어요.
기대, 설렘, 염려, 약간의 두려움…을 가지고 밟은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베냉. 2010년 2월, 그녀는 해외봉사에 관심을 가지기 전에는 지도에서도 본 적이 없었던 베냉 땅을 밟았다. 그리고 그녀의 삶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이 그곳에서 하나하나 쌓여 간다.
“베냉에 도착한 지 일주일 정도 되어 로코사라는 곳에 봉사하러 갔어요. 로코사는 베냉에서도 햇볕이 가장 뜨거운 곳이에요. 베냉에서 만난 현지인 친구들과 함께 갔는데, 제 몸이 강한 햇볕을 견디지 못해 온 몸에 두드러기가 돋아났어요. 많이 고생했어요. 현지 친구들이 저를 걱정해 주고, 두드러기가 가라앉지 않자 하루는 먹는 생수를 많이 사서 큰 물통에 가득 채우더니 ‘너는 이 물로 샤워해’ 해요. 그 친구들은 하루종일 일해서 수천 원을 벌기에, 그건 그냥 물이 아니었어요. 고맙고,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베푸는 마음 담긴 배려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처음 경험한 나리나 씨. 잘해야만 한다는 세상에서 살던 그녀에게 전혀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 같았다. 불어를 사용하는 베냉에서 불어를 전혀 몰랐던 그녀가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주위 사람들의 배려 덕분이었다.
“까라비라는 곳에 갔을 때, 거기엔 한국 사람이 저밖에 없었어요. 그냥 밥 먹고, 동행한 현지 친구와 함께 곧 있을 월드캠프 홍보하러 가서 미소만 짓다가 왔어요. 정말 한국말이 듣고 싶었어요. 하루는 동행한 친구가 ‘네 마음이 어때?’ 하고 물었어요. 겨우 알아듣고 ‘어려워’ 하고 한 단어로 답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내 마음을 이해하는 거예요. ‘아, 한 단어로도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구나!’ 엉터리 같은 말이어도 입을 떼서 말하면 상대가 내 마음을 이해하고, 나도 그들의 마음을 가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그 후로는 되든 안 되든 말을 많이 했어요. 불어를 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의사소통은 잘했어요.”
그 후로도 그녀는 자주 그런 배려를 접했고, 그 맛에 점점 빠져들었다. 몸은 열악한 환경의 아프리카에서 살고, 마음은 향기 가득한 꽃밭에서 사는 듯했다.
아프리카는 그녀를 강하게도 만들었다.
“한번은 말라리아에 걸려, 발가락 마디도 아프고 척추뼈도 마디마디가 다 아프고 온 뼈마디가 아팠어요.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고 울면서 ‘내 인생이 베냉에서 이렇게 마치는구나…’ 생각했어요. 그때 봉사단원을 지도하는 선생님이 오셔서 ‘네가 일어날 수 있다고 마음먹으면 일어나. 하지만 너무 아프다고만 생각하면 못 일어나’ 하고 말씀해 주셨어요. 앉아 있는 것도 너무 고통스럽고, 걷는 것은 더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앉고 걸었어요. 일부러 계속 움직였어요. 그랬더니 반나절 지나자 진짜 멀쩡해지는 거예요.”

 
 

사진 첩 속의 눈부신 행복들
늘 환경에 지배당하며 살았지만 마음에서부터 이기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나리나 씨. 이후로는 배탈이 날 것 같거나 머리가 어지러워 말라리아에 걸릴 것 같은 느낌이 들면 더 부지런히 움직였다고. 그리고 ‘말라리아, 네가 이기냐? 내가 이기지!’ 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그 후로는 말라리아에 한 번도 걸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국에서 살 때보다 더 건강하게 지냈다고 한다. 아프리카의 열악한 환경은 유약했던 그녀의 마음을 건강하게 바꿔 주었으며, 덤으로 한국에서 자주 병원을 찾았던 몸도 건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외에도 나리나 씨의 기억 공간 한 편에 곱게 보관되어 있는 베냉의 사진첩 속에는 작은 행복들이 한 장, 한 장 꽂혀 있다.
“한번은 정말 참새만한 바퀴벌레가 방에 들어왔어요. 함께 지내던 현지인 친구는 아무리 깨워도 상관 않고 쿨쿨 자요. 울면서 제가 바퀴벌레를 잡았어요.
한국애서는 먹는 것에서 즐거움도 없고 음식 욕심도 없었는데, 베냉에서는 배가 터지도록 먹었어요. 한국에서는 소화기관이 약해 배탈이 자주 났는데, 그곳에서는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파 한국에서 먹던 음식의 세 배씩 먹었어요. 위가 터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야 안심이 되었어요.^^
가끔 봉사단원들이 숙소 옥상에서 서로의 긴 머리를 잘라주던 일도 즐거웠어요.”
어느덧 1년이 흘러 나리나 씨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던 학교로 돌아갔다. 같은 교정, 같은 공부, 같은 지적 장애 학생들…. 그런데 나리나 씨는 달라져 있었다. 더 이상 그 길을 가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이제 지적 장애 학생들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도, 힘도 형성되어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
“베냉에서 초등학생들과 풍선을 불며 놀고, 대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함께 봉사했던 단원들과 의견을 조율하고, 새로운 일들에 도전하고, 때로는 듣기 싫은 소리를 들으며 나 자신을 돌아보고…. 제가 베냉에서 그렇게 보낸 시간들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그 당시에는 몰랐어요. 그런데 나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마음을 기울이는 동안 제 옷차림, 말투, 눈빛, 웃음, 행동 등 모든 게 변해 있었어요. 누구와 만나도 밝게 대하며 자연스럽게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게 되었어요. 옛날의 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필요한 것들을 당시 다 배웠다고 할 정도예요.”
조용하고 차분한 그녀는 취재 내내, 촬영 중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장애 학생의 기발한 반응
올 3월 나리나 씨는 특수 교사가 되었다. 지금까지 힘들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단다. 오히려 지적 장애 학생들이 그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즐거워진다고. 집에서 부모님께 혼난 이야기, 다른 친구를 좋아하게 된 사연 등 또래 사춘기 아이들이 겪는 일들도 상담해 준다.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 초등학생처럼 말하기 때문에 대학은 가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직업을 가지고 사람들과 더불어 살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줍니다.”
장애 학생을 가르치는 것은 일반 학생에게 들이는 정성의 몇 배가 필요하다. 그런 수고 끝에, 수 개월 동안 말 한마디 않던 학생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면 기적을 보는 것 같단다. 그런 보람과 즐거움은 그녀가 이 길을 걷는 데 활력소들이다.
“말이 어눌한 학생들의 이야기를 그냥 들으면 무슨 말인지 잘 모르지만 귀를 다 기울이면 이야기가 들려요. 표현은 서툴지만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과 같아요. 아이들과 이야기하면 즐거워요. 궁금할 때 손을 번쩍 들고 큰소리로 묻거나 학생들이 생기발랄하게 반응할 때 저는 행복해요. 나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를 돕는다는 기쁨, 그건 제가 아프리카에서 받았던 친구들의 배려와 같은 것이겠지요.”
이전에 주위 사람들과 소통 없이 지내며 소심했던 그녀가 요즘은 가끔 동료들의 고민도 들어주는 상담 역할도 한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부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긍정적으로 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꿈이요?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일을 하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어울려 함께 살아가는 거요. 대부분 그렇게 되기 어렵다고 하고, 아이들도 자신들은 안될 거라고 생각해요. 아니에요. 할 수 있는데 더딜 뿐이에요. 아이들이 포기하지 않고, 주위에서 조금만 더 기다려 주면 아이들이 큰 행복을 누리며 살 거예요.”
스무 살까지 온실 속 화초처럼 살았던 나리나 씨. 지금은 들판에 피어난 멋진 들꽃이 되어 아직 꽃봉오리를 피우지 않은 들꽃들에게 그의 향기를 기꺼이 다 쏟아붓고 있다.

 사진 | 홍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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