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다르지만 마음은 하나! SOUTH ASIA!

처음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해외봉사를 간다면 인생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금전적으로 여유도 없었고, 뭔가 절실하다고 할 만큼 해외봉사가 필요한 이유도 없어 지원하기가 망설여졌다.

그러던 중 대학교 2학년이 되면서 나는 조금씩 몸과 마음이 지쳐가는 것을 느꼈다. 보건의료관리학을 전공했지만 공부로 이루고 싶은 꿈도, 목표도 없었다. 학교나 가정이나 어디를 가도 마음에서 쉴 수 없었고 삶이 너무도 힘들었다. 너무 스트레스를 받은 나머지 과호흡증후군이라는 병까지 생겼다. 조금이라도 신체적, 정신적으로 무리가 가는 일을 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쓰러졌다. 홀로 힘들어하고 고통하는 동안 내 마음은 점점 고립되어 갔고, 급기야 환청까지 들릴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졌다. 굿뉴스코 선배단원들 중에는 나처럼 고통스런 형편에 있다가 해외봉사를 다녀오면서 마음의 세계에 대해 배우고 인생의 새로운 꿈을 찾은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그들처럼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고, 그래서 굿뉴스코에 지원하게 되었다. 

 
 
외계어 같은 캄보디아어, 그러나 그것은 충격의 시작에 불과했다
처음 캄보디아 공항에 도착하던 날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캄보디아 특유의 냄새와 뜨거운 공기….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입국심사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이었다. 특이하게도 캄보디아 비자는 주한 캄보디아 대사관은 물론, 공항에서도 받을 수 있고 심지어 육로로 들어갈 경우 국경에서도 받을 수 있다. 비자를 받으려면 여권과 발급수수료를 내야 했는데, 우리는 영어도 서툴렀고 캄보디아어는 더더욱 알지 못했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다. 직원이 계속 뭐라고 하는데, 우리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알아듣지 못하고 “What? What?”만을 반복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우리가 한국 사람인 걸 알아차리고 한국어로 “여권! 여권!”을 계속 말씀하고 계셨던 것이다. 우리는 그게 캄보디아어인 줄 알고 엄청 당황해 했었는데…. 정말 친절하게 “여권! 여권!”을 외쳐주는 캄보디아인 직원 아저씨에게 폭풍감동과 웃음을 선물로 받았다. 한편으로는 이제부터 내가 사용해야 하는 외계어 같은 캄보디아어가 준 충격이 신선했다.

캄보디아 하면 ‘킬링필드’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1975~79년 집권한 공산주의 지도자 폴 포트는 무장단체 크메르 루즈를 앞세워 산업시설을 파괴하고 기업인·유학생·부유층 등을 반동으로 몰아 학살했는데 이것이 바로 킬링필드다. 킬링필드로 박힌 이미지 때문에 나는 캄보디아를 몹시 위험한 나라로 알고 있었고, 절대 혼자 다닐 수 없다는 말까지 들었다. 그러나 막상 내가 직접 가서 느낀 캄보디아는 안전했다.
캄보디아에는 발전이 더디고 수상가옥만 있을 것이라는 것 역시 틀린 생각이었다. 수상가옥뿐 아니라 높은 건물, 쇼핑센터까지 있는 것이 내가 생각했던 캄보디아가 아닌, 많이 발전한 캄보디아였다. 캄보디아 도착 첫날 밤, ‘어디서 어떻게 씻을까?’ 하는 비장한 마음으로 샤워를 하러 갔는데 ‘콸콸콸콸~’ 쏟아지는 물이 놀라웠고 감격스러웠다.
캄보디아에서는 사람들이 다니는 길거리에서 천 하나만 몸에 두른 채 버젓이 샤워를 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심지어 공사장에서도 바지 대신 그냥 천만 걸치고 작업화가 아닌 슬리퍼를 신고 일하는 사람이다. 우리나라에서 옷을 제대로 안 입고 돌아다녔다면 변태나 이상한 사람으로 신고를 당했을 텐데, 캄보디아에서는 옷을 거의 입지 않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당황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개 후식으로나 먹는 과일을 캄보디아에서는 무생채처럼 소금에 절이거나 장조림 또는 국을 해서 먹었다. 그냥 먹을 때도 소금에 찍어먹곤 하는 게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무표정한 학생들의 얼굴이 밝아질 때 보람을 느껴
캄보디아에서 우리 굿뉴스코 단원들이 진행했던 다양한 봉사활동을 소개한다. 부모를 잃거나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이 생활하는 곳에 찾아가 아이들이나 주변 동네 사람들을 위해 마인드 강연과 문화 공연을 했다. 때로는 함께 생활하기도 하면서 물질적인 봉사가 아닌, 마음에 쉼을 주는 봉사를 했다.
또 매주 일요일 오후에는 ‘IYF 데이’라고 하여 학교와 집 사이만을 오가며 바쁘게 사는 학생들을 위한 마인드 강연과 아카데미를 진행했다. 특히 음악 아카데미의 인기는 최고였다. 캄보디아는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우리 단원들이 학생들에게 음악 이론을 가르쳤다. 전자 피아노와 종이로 만든 피아노 건반을 이용해 피아노 치는 법도 알려주고 또 노래도 함께 부르는 동안 처음에는 표정 없이 그냥 왔던 학생들이 어느새 표정이 밝아지고 기뻐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특히 <투머로우>의 희망캠페인을 통해 전자피아노 8대 등 후원을 받으면서 학생들은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즐겁게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됐다. 그밖에 학생들과 개인적으로 만나 고민을 상담해 주는 카운슬링 프로그램도 운영했다.
세계문화체험박람회인 ‘컬처Culture’는 전시용 게시물 디자인과 전시품 제작, 이벤트 기획 등 모든 것을 캄보디아 IYF 소속 학생들이 준비하고 진행했다. 놀이공원과 대학교 등에서 진행된 컬처는 캄보디아인들에게 세계 문화를 한자리에서 체험하는 기회가 되었고, 우리 역시 그들에게 한국문화를 맘껏 알릴 수 있었다. 

▲ 앙코르와트가 있는 시엠립에서 전통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플루트 연주할 줄 아는 나를 반겨주었다.
▲ 앙코르와트가 있는 시엠립에서 전통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플루트 연주할 줄 아는 나를 반겨주었다.
 캄보디아에서 내 인생에 가장 큰 힘을 얻었다
한국에서 사는 동안 나는 스스로를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런데 캄보디아에 가서 지내는 동안 내가 가족 및 주변사람들의 배려 속에서 큰 어려움 없이 행복하게 살아왔음을 알게 되었다. 캄보디아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게는 가족과도 같았다. 많이 부족한 내 플루트 연주를 매주 들어주면서도 항상 박수로 고마운 마음을 보내주었다. 매일 실수하고 싸워서 사이가 멀어졌다가도 어느새 다시 웃으면서 다가와 주었다. 항상 간장만 반찬으로 밥을 먹을 만큼 가난한데도, 내가 왔다고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주던 그들이 너무 보고 싶다.
‘다시 캄보디아에 오겠다’고 그들에게 한 약속이 머릿속에 계속 맴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지만, 그때마다 캄보디아에서 하고 온 약속들이 포기할 수 없게 다시 힘을 준다. ‘포기를 잘하던 오성희 삶에 가장 큰 힘을 얻고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앞으로 국제 의료관광 코디네이터가 되어 캄보디아 병원에서 일하는 게 꿈이다. 병원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내게 행복을 알려준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 싶고 표정 없던 캄보디아 사람들이 다시 한 번 더 작은 소망과 행복을 얻어 미소를 지을 수 있게 해 주고 싶다. 그날을 그리며 나는 오늘도 학생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글 | 오성희 (우석대 보건의료관리학과 3학년, 굿뉴스코 해외봉사단 12기 캄보디아)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