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필요한 자존심을 버리면 새로운 기회를 만난다

투머로우 글로벌 리더스 캠프 강연자인 <광해, 왕이 된 남자>의 김호성 제작자의 소개로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최은성 사무총장을 만났다. 8월 21부터 28일까지 8일간 반포 한강공원 세빛둥둥섬에서 한여름의 더위를 식힐 영화제 소식을 전해준 그녀는 특유의 부드러운 친화력을 가진 소유자였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면 오히려 편안하고 성공적인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최은성 사무총장. 실패와 성찰이라는 열차를 무수히 갈아타고 온 그녀의 열정을 소개한다.

▲ 최은성/유학 후 다양한 분야에서 일을 해온 그녀는 특히 청소년들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에 관심이 많다. 영화로 소통의 장을 만들어내고 있는 그녀는 특유의 기획 마케팅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 최은성/유학 후 다양한 분야에서 일을 해온 그녀는 특히 청소년들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에 관심이 많다. 영화로 소통의 장을 만들어내고 있는 그녀는 특유의 기획 마케팅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건강악화로 4년 만에 상업고등학교를 졸업, 동덕여대 미술대학원 졸업 후 San Jose State Univ. Computer graphic 석사 졸업, Academy of Art University Computer 석사 졸업. 여러 회사의 기획실장 및 (주)SBS 프로젝트1팀 부장을 거쳐, (주)뮤직잇셀프 이사, (주)써니엔터테인먼트 이사, (사)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사무총장으로 밝은 마음을 전하는 영화인.

그녀의 이력에는 한 평범한 소녀가 20대부터 자신의 인생을 얼마나 개척해왔는지 선택과 열정이 담겨 있다. 주변의 환경을 탓하지 않고, 자신 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길로 뚜벅뚜벅 걸어온 그녀의 발자취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도전과 용기를 발견할 수 있다.
“10대에는 유독 건강이 좋지 않아서 중,고등학교를 8년간 다녔지만 학교에 등교한 기간은 채 2년도 안 될 정도였죠. 3남 1녀의 장녀로 태어난 저에게 아버지는 상업고등학교에 들어가서 회사에 취직하고, 시집가길 바라셨죠. 하지만 아무리 아파도 저에겐 꿈이 있었어요. 아버지에게 눈물로 미술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제 꿈을 말했죠. 아버지는 노력해서 갈 수 있다면 해보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그녀가 정말로 대학에 들어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상업고등학교에 들어갈 때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당시 최고 브랜드의 타자기를 하나 선물받았고, 대학입시가 다가오자 아끼던 타자기를 손에 들고 무교동에 있는 한 중고가게에 갔다. 
“가게 주인은 왜 타자기를 파는지 물으셨어요. 전 대학에 가고 싶다고 말했죠. 건강이 안 좋은 때라 설명을 장황하게 할 수 없었어요. 주인은 대학에 가고 싶은데 왜 타자기를 파는지 되물으셨죠. 미술 학원을 다녀야 한다고 말했더니 정말 안타까워하셨어요. 그때 돈 7만원을 주시면서 타자기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라고 하셨어요.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그때 그 순간이. 마지막인 타자를 한 글자 한 글자 쳐내려갔죠. 굿바이, 마이 프렌드!”
감수성이 풍부하던 소녀 은성에게 타자기는 글과 일기를 쓰던 유일한 친구였다.

선택1. 기회를 만나는 절실한 마음
그녀는 학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타자기를 팔고 남은 돈으로 아그리파 석고상을 사서 집에서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청계천에서 중고 문제집을 사다가 문제와 답을 얼마나 외우고 공부했는지 몰라요. 상업고등학교 학생이 대학을 가려니 장벽이 높았죠. 동덕여자대학교에 예비후보로 대기하다가 뒤늦게 3월에 합격통보를 받았어요. 가장 먼저 아버지가 놀라셨습니다. 아버지는 너의 노력으로 합격했으니 등록금만 내줄 수 있다며 다음은 알아서 하라고 하셨어요. 생각해보세요. 장학금을 받으려고 얼마나 노력했겠어요.(^^)”
그리고 그녀에게 찾아온 유학의 기회. 하지만 결혼하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겠다는 어른들의 반대로 학교와 집밖에 몰랐던 그녀는 친구 소개로 만난 한 남자와 웨딩마치를 올렸다. 하지만 공부를 하고 싶어서 선택했던 결혼이 쉽지만은 않았다.
“첫 애를 안고 시집살이를 하면서 대학원을 다녔어요. 정말 운이 좋게 문교부에서 특수 대학원생에게 장학금을 줬는데, 제가 산업디자인학과였기 때문에 가능했죠. 교수님의 유학 권고로 특별한 준비 없이 미국에 갔어요.”  

선택2. 하염없이 부족했던 유학시절
1988년은 한국에 컴퓨터조차 보급이 잘 이뤄지지 않았던 시기. 친척도 없고 친구도 없는 미국 땅에 도착한 그녀는 3D 애니메이션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쉬는 시간’을 영어로 알아듣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 레포트를 제출할 수 없을 만큼 서툰 영어실력과 엄청난 과제로 앞이 막막해 울고 또 울었던 그녀. 급기야 신경성 장염으로 몸에 이상신호가 왔다.
“제가 다닌 학교는 3D 애니메이션으로 세계 3위권 안에 드는 곳인데, 발표를 할 때는 영어를 죽을 만큼 외워서 발표하지만 쏟아지는 질문에는 벙어리가 됐습니다.”
영어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거기는 왜 그런 색을 썼느냐? 네가 좋아하는 색이냐?’ 하고 계속 묻고 답하는 미국식 수업에 그녀는 동서양의 사고 방식의 차이를 피부로 느꼈다. 지금은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학장으로 있는 마이클 그레디 교수가 당시 그녀에게 망치로 머리를 두드리는 듯한 조언을 했다.
“은성, 네가 쓴 모자를 벗어. 관념의 모자를 벗고 미국에 맞는 모자를 써 봐. 네가 무언가를 얻으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니? 그럼 네가 쓴 모자를 벗고 미국에 맞는 모자를 써야 하지 않겠니? 그렇다면 네가 이곳에서 얻으려고 했던 것은 다 얻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네가 한국으로 돌아갈 때, 그 모자를 다시 써.”
그때부터 그녀는 낯선 미국 땅에서 미국인들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생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3D 애니메이션 영역에서 석사 과정을 두 번이나 거치며 6년간 공부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녀 앞에 펼쳐진 운명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한국에 돌아온 그녀는 가정이 해체되는 위기를 겪었고, 몇 년 간 마음이 무너지는 시간을 고스란히 겪었다. 일자리 또한 쉽게 구할 수 없었다. 그녀가 배운 기술은,  ‘천리안’과 ‘나우누리’가 사람들에게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인터넷 발달의 초창기인 한국의 교육보다 훨씬 앞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 다행히 그녀는 초창기 웹디자인을 대부분 맡아서 일하게 됐다. 안양대학교, 상명대학교, 한성대학교에서도 강의를 시작했다.
“지금은 이해하지만, 그 당시에는 3D 기술을 접목한 영화에서 세트장 없이 불을 만들고 비가 내리는 장면을 만들 수 있다고 가르치면 학생들이 본 적이 없으니 이해를 못했어요. 동영상을 보여줘도 학생들의 반응은 ‘교수님, 그것 가짜지요?’ 하고 말하는 거예요. 정말 열변을 토하면서 가르쳤지만 그런 세계를 본 적이 없으니 믿지 못하는 것이죠. 그랬던 제자들이 지금은 3D 영역에서 주역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선택3. 완벽함보다 조화로움에 승부수
2000년에는 SBS 방송국에 특채로 여성 부장으로 입사했지만 여성이 많지 않던 영역이라 남성 동료들의 시기와 질투를 한몸에 받았다. 끙끙대며 버티던 그녀에게 상사는 놀라운 조언을 한다.
“은성, 남자들은 대부분 강함을 가졌지만 부러질 수 있지. 넌 그런 강함과 여성의 부드러움도 갖고 있다. 부드러움으로 그 강함을 감쌀 수 있는데, 여성이라는 장점을 활용해봐.”
“아니, 그럼 남자들에게 예쁘게라도 보이라는 건가요?”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너는 여성이고 어머니다. 그런 장점을 살려보란 말이야.”
상사의 조언으로 그녀는 ‘완벽함’을 추구하기보다 ‘부족함을 인정하자’는 쪽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의 능력이 부족한 것을 인정할 때, 상대는 나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싶어해요. 그게 친화력을 만들어내죠. 내가 너무 완벽하면 그 완벽함 때문에 상대는 비교하고 반감을 가지게 되죠. 그때부터 ‘모르는 것’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스스럼이 없어졌죠.”
그녀는 인생에서 결정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멘토가 되는 사람을 하나씩 만난다. 그리고 그들의 조언이 삶을 더욱 넓은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세를 배우게 했다. 새로운 시각으로 열정적으로 몰입하며 일을 해내다가 그녀는 또다시 건강이 나빠졌다. 의사에게 사형선고를 받고서야 방송일을 그만둔 그녀는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사무총장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마음속에 여러 가지 자존심을 버리고 나니 비로소 투쟁하거나 분쟁하지 않아도 편안하게 나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됐죠. 다른 사람들과 나 자신을 비교하던 마음도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그동안 남과 나를 비교하면서 달려온 게 얼마나 나를 힘들게 한 것이었나 생각했어요. 부족함을 인정하고 나니까 다시 채울 수 있게 됐고, 부족했던 사실을 완전히, 깨끗하게 인정하고 나면 오히려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아요. 이런 법칙을 좀 더 빨리 알게 됐더라면 세상 살기가 얼마나 편했을까 생각해봅니다. 하하하하.”

 
 
선택4. 위기는 또 다른 기회
1999년 출범한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는 국제 영화제로, 성장영화를 다루는 비상업 영화제이다. 최은성 사무총장은 산업디자이너 출신이지만 영화제를 기획하는 기획자가 되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김종현 집행위원장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영화의 열정을 품게 된 그녀는 삶의 초점이 입시에 맞춰진 청소년들이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게 되길 바라는 심정으로 오롯이 재능기부를 하며 일을 시작했다. 특히 마약, 가정폭력, 재난 등으로 어려움을 겪은 청소년들이 어떻게 그 어려움을 극복해가는지 여러 나라의 배우와 감독들과 교류하며 아동·청소년·가족 영화를 사람들에게 전한다. 
“80년 된 이탈리아 지포니국제영화제, 40년 된 체코의 질른청소년영화제 다음으로 외국에서는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가 알려져 있습니다. 50명의 국제 심사단들이 유럽에서 오고, 배우와 감독들이 한국을 찾고 있기에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는 계속 성장하고 있습니다.”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에는 2천 명의 영화 관계자와 가족과 함께, 연인이나 친구와 함께 관객 15만 명이 해마다 영화를 관람한다. 그녀는 오늘도 영화제를 기획하고 알리는 일에서 행복을 느낀다.
지금까지 어려운 환경 속에서 남을 탓하기보다 ‘오늘의 60% 노력이 내일의 60%의 결과’라고 조언하는 그녀. 현실의 심한 고통도 삶의 일부로 승화시켜 살아온 그녀는 특히 청소년들의 올바른 성장에 관심이 많다.
“잠시 중단했던 영화 아카데미 캠프도 새롭게 개최할 예정입니다. 배우 한효주, 구혜선과 같은 다양한 영화 배우가 배출될 만큼 좋은 캠프였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후학을 양성하고 재능을 기부하며 살고 싶네요.”
현실에서 심한 고통과 부딪히며 살아온 그녀는 꺾이거나 숨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삶에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끊이지 않는다. 그녀의 친화력은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물고 편안함을 주는 그녀의 매력이다.  

사진 | 홍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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