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st Africa (1) 시에라리온, 기니

이번 호는 서부아프리카에서 봉사하고 온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아프리카 봉사의 꿈’을 이룬 뒤 또 다시 아프리카에서 ‘한국어 교수의 꿈’을 안고 돌아온 함소현 씨의 이야기와 코트디부아르 오지 마을에서 말라리아와 배고픔을 견디며 봉사하는 동안 한층 성숙된 마음을 배우고 온 변정우 씨의 이야기입니다. 익숙한 한국생활을 잠시 뒤로하고 전혀 다른 문화 속에서 겪은 경험들은 이들에게 평생의 자산이 될 것입니다. 

 
 
Sierra Leone 시에라리온
▶국가 시에라리온은 ‘사자산獅子山’이라는 뜻. 15세기에 포르투갈인들이 들어왔을 때 해안 산지에서 울리는 천둥소리를 듣고 지었다고 한다. 공용어는 영어다. 1991년부터 2002년까지 일어난 내전과 쿠데타로 1만 여 명의 국민이 사망하며 숱한 고난을 겪은 나라다. 또한 반군세력이 무기를 구입하고 게릴라군의 활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다아이몬드를 밀반출하는 일명, '피의 다이아몬드'로 인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 일상생활 시에라리온 아이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물을 길어오는 것이다. 대체로 교육열은 높은 편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학교를 다니고, 수업을 마치면 오후 늦은 시간에 한번 더 물을 길어온다.
▶의생활 옷은 길거리에 펴놓거나 길거리 벽에 걸어놓고 판다. 자기에게 맞는 옷을 골라입을 수 없기 때문에 마음에 드는 옷 위주로 큰 사이즈의 옷을 입는 편이다.
▶학교생활 학생들은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닌다. 학교를 다니다가도 학비가 없으면 잠깐 휴학하고 돈을 벌어 다시 학교를 다닌다.
▶ 여가생활 축구를 좋아해서 운동장에 가면 사람들이 축구하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젊은이들은 영화관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보거나 영국 축구 경기를 보며 문화생활을 한다.

 Guinea 기니
▶국가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 서부에서 첫 번째로 독립한 나라. 독립을 일찍 했음에도 불구하고 발전은 아주 더디다. 수도 코나크리조차도 전력이 부족해 자주 전기가 나가기 일쑤. 그래서 집에 텔레비젼이 있는 집을 보기 어렵다.물의 왕국이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물 사정도 좋지 않다. 물은 아침에만 잠깐 나온다. 사람들은 보통 축구를 하거나 잠을 자며 시간을 보낸다.
▶ 일상생활 여학생들은 발목까지 오는 긴 치마를 교복으로 입는데, 치마는 무릎까지 트인 형태의 치마다. 학교에 갔다 오면 여학생들은  밥을 짓고 요리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숯을 피워 밥을 하다보니 밥하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또 요리할 때도 재료를 튀겼다가 물을 넣고 졸이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어서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남학생들은 축구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데, 오후 시간의 운동장에 가면 축구를 하는 사람과 구경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 취업.시험학생들이 선호하는 직업은  공무원이고, 은행원도 인기가 있다. 장사를 하면서도 대부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것을 본다.4 박이라는 수능시험이 있는데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다시 학교를 다녀야 한다. 학교에 입학하는 나이가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다보니 학생들의 연령이 17살부터 30살까지 천차만별이다.
▶ 에피소드1 학생캠프  때 한국에서 초청한 공연팀이 댄스공연을 하고 노래를 불렀다. 평소 문화공연을 본 적이 없는 기니 학생들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조용히 쳐다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봉사단원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르는 것을 힐끗 쳐다보고서야 같이 호응을 하던  기니 학생들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 에피소드2  날씨가 덥다보니 나무 그늘이 보이면 그 아래에서 앉아 쉬곤 했다. 처음보는 우리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고 마실 물도 주고, 모르는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누며 친근해 질 수 있다는 것이 기니 사람들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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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한국어만큼 따뜻한 언어가 또 있을까요?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글자를 만드신 세종대왕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는 한글. 그래서 한글을 문자로 사용하는 한국어는 사람에 대한 사랑과 따뜻한 마음이 담겨있는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제 마음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매개체이기도 하고요. 저는 이런 점에 매력을 느껴서 아프리카에서 한국어교수를 꿈꾸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의 한국어 교수’라고 하니 조금은 엉뚱하게 들리시나요? 저도 처음부터 이런 꿈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그 꿈을 가지게 되었는지 지금부터 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내 마음 속 새겨진 주홍 글씨‘우리 가족’
공부만 열심히 해서 대학에만 가면 모든 다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대학은 또 다른 시작일 뿐이란 것을 알았을 때 마음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하느라 힘들고 지친 부모님의 모습, 매일을 다투시는 두 분, 온기를 느낄 수 없는 텅 빈 집안, 언젠가부터 사라진 가족의 웃음 소리, 그리고 사라져 버린 대화…. 이 모든 상황에 대한 탈출구를 공부라고 여기고 열심히 공부했건만 대학 입시 실패라는 결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른 채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마음 둘 곳을 찾아 처음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게 좋았고, 술을 마시면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러나 술자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더욱 공허하고 텅 빈 것 같은 마음은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술자리를 전전하며 무의미한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우연히 학교 벽에 붙은 한 장의 포스터가 제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내 젊음을 팔아 그들의 마음을 사고 싶다’라는 문구가 적힌 포스터에서 사람들의 환한 웃음이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나도 저렇게 웃을 수 있을까? 나도 저렇게 웃고 싶다’고 생각하며 해외봉사에 지원했습니다.
해외봉사를 지원하며 참가한 워크숍에서 ‘물이 서로 흐르는 것처럼 사람 마음도 서로 흘러야 한다. 흐르지 않으면 고립되고, 고립되면 알코올 중독자나 게임 중독자, 정신병자 등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굿뉴스코는 마음의 세계에 대해서 가르친다’는 강연을 들었습니다. 강연을 들으며‘나도 변할 수 있을까? 우리 아빠도 변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던졌고, 갑자기 제 마음 속에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자였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꽁꽁 무장시키고 지내다
그렇게 저는‘변화’에 대한 소망을 품고 아프리카 카메룬에 갔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현지인들과 마음이 잘 소통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한 아프리카 친구가 ‘소현이는 우리를 싫어해? 왜 우리와 말하려고 하지 않아?’라고 말할 정도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마음을 열면 상처를 받게 될까 봐 두려웠습니다. ‘내가 잘못하면 분명 저 사람들은 나를 싫어하겠지’라는 염려가 많았어요. 마음을 연다는 게 무엇인지도 잘 몰랐습니다. 저는 ‘어차피 일 년을 보내면 떠날 거야. 굳이 마음을 나눌 필요 없어. 아마 내가 상처받게 될 거야.’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꽁꽁 무장시킨 채 친구들의 관심을 외면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친구들은 끝까지 저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불어를 잘 하지 못해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저를 위해 오히려 한국어를 배워 한국어로 말을 거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8월 어느 날, 부모님의 이혼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크게 낙심하며 주저앉아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봉사활동을 포기하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지금 한국에 돌아간다 하더라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슬픔에 빠져 있었을 때, 아프리카 친구들은 제게 더욱 관심을 보이며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항상 제 옆에 있어 주었지요. 세상에 나 혼자라는 생각에 저는 그들을 무시했지만 친구들은 끝까지 저를 포기하지 않고 따뜻하게 안아주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저는 깜짝 놀랐어요. 저는 항상 제가 잘 해야만 사람들이 저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아프리카 친구들은 저의 슬픔에 같이 슬퍼하며 위로해주고 저를 편견 없이 바라봐 주고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해 제 마음은 점점 열리기 시작했고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봉사하러 가서야 알게된 부모님의 사랑
 그 후에 엄마에게 처음으로 제 마음을 담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엄마가 내 편지를 받고 실망하실 것 같아 불안했는데 결과는 너무나 뜻밖이었어요. 편지를 받으신 엄마는 제게 전화로 ‘넌 나의 사랑하는 딸이야. 엄마는 네가 늘 자랑스러워’라고 말씀하시며 처음으로 저에게
‘사랑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기뻐 그저 울 수밖에 없었어요. 그날 저는 기쁘고 행복해서 눈물이 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알았습니다. 제가 불행했던 건 사랑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제 마음 때문이었다는 것을요.
저희 집은 행복한 가정이 아니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술만 의존하며 살아가는 아빠, 그리고 맞벌이를 하시느라 항상 바빴던 엄마, 제가 중학교 3년이었던 때부터 계속 되어 온 엄마 아빠의 싸움, 그리고 이어지는 아빠의 폭언들 등. 이런 것들로인한 마음의 상처 때문에 사람들을 향해 마음을 완전히 닫고 살아 왔습니다. 언젠가 아빠가 술에 취해 저에게 심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 그 말들은 제 마음에 큰게 상처가 되었습니다. 다음날 술이 깼지만 전날의 일을 전혀 기억 못하는 아빠가 너무 미워서 똑같이 저도 아빠에게 심한 말을 했고, 그때 아빠가 몰래 숨죽여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봤는데도 저는 모른 척 했습니다. 그리고 아빠의 좋은 모습들은 다 무시하고 그날의 폭언이 아빠의 진짜 마음이라고 생각하며 미워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자랑스러운 딸이 되기 위해서 사랑받는 딸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데, 그것을 봐주지 않는다고 생각해 부모님을 미워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마음이 담긴 전화 통화와 편지를 통해서 비로소 부모님의 겉모습이 아닌 마음과 마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저와 싸우고 제 등 뒤에서 흘리셨던 아빠의 눈물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팠던 만큼 아빠도 많이 아프셨던 것이죠. 

 
 
한국어 교수를 꿈꾸며
가족들의 사랑을 발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아프리카가 계속 그리워 다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왜 그곳에 다시 돌아가야 하는지 이유를 몰랐지만 제가 가장 행복했을 때를 떠올려 보니 아프리카에 있었을 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그래서 제 마음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언어 그리고 제가 가진 작은 능력으로 그들에게 받은 사랑을 보답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아프리카의 한국어 교수를 꿈꾸게 되었죠.
 아프리카는 많은 어려움과 문제를 갖고 있는데, 그중  가장 큰 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꿈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예전의 제 모습처럼 마음에 절망이 가득한 친구들 또한 많아요. 다른 아프리카 친구들이 제게 했듯이, 저는 한국어를 통해 그런 친구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나가고 싶습니다.

다시 돌아가 함께 웃을 그날을 향해
한국어 교수의 꿈을 갖게 된 후 지금까지 2년가량의 시간이 흘렀네요. 저는 지금 한국언어문학과에 다중 전공을 하면서 국어에 대한 기초 소양을 쌓고 있습니다. 마인드강사교육도 받으며 교육자가 가져야 할 마음에 대해 배우기도 하구요. 아이들을 가르치며 마음을 나누고 소통하는 법을 배우고 있기도 합니다. 또 장관 포럼, 불어말하기대회, 굿뉴스코 페스티발 등 다양한 교내외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틈틈이 영어와 일본어 공부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겨울 방학 때는 대학교에서 한국어 교사 양성 3급 과정을 이수했고, 지금은 3급 시험 준비와 함께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육과에 진학하려 대학원 전공 시험을 준비 중입니다. 공부하는 것이나 학교생활에 있어 여러 가지로 어려운 부분이 많이 있지만, 한국어 교수라는 꿈이 있기에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저는 그냥 단순히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라 그들과 한국어로 소통하는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아프리카로 다시 돌아가 함께 공부하며 웃는 아프리카 친구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힘이 절로 납니다. 한국어 교수가 되어 아프리카에서 친구들을 만날 그날까지, 여러분도 마음속으로 응원해 주세요.

취재 | 안우림 캠퍼스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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