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뉴스코 9기 세준 씨의 ‘인생역전 성공기’

‘2014 FIFA 브라질 월드컵’으로 전세계가 떠들썩하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마음의 슬픔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태극전사의 활약을 보며 위로받기를 갈망한다. 2014년 6월호 커버스토리의 주인공은 박세준 씨. 성장기에 겪은 마음의 상처를 해외봉사로 치유하고 돌아왔다. ‘축구 감독’이 되기 위해 희망차게 전진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축구 감독 지망생으로 초등학교 ‘방과 후 활동’의 코치를 병행하고 있지만, 박세준 씨는 원래 테니스 선수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테니스 선수였던 친형의 훈련장에 놀러 갔다가 코치의 권유를 받고 운동을 시작했다. 타고난 운동 신경이 뛰어나 각종 시합에서 입상하며, 기대주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그가 힘들게 운동을 하지 않고 공부하길 원하셨다. 지도해주던 코치가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계속 운동하길 권유했지만, 그도 고생스러운 훈련을 그만두기로 정했다. 내심 진로를 두고 방황했다. 묵묵한 성격으로 표나지 않았지만, ‘하고 싶었던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운동뿐인데, 뭘 해야 하나’ 싶어 힘들어했다. 그 간절함이 부모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다시 운동을 하라’는 말씀을 들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뒤늦게나마 다시 실기시험을 준비해 체대에 입학했다.
“선수 생활을 계속했다면 입상 실적으로 입학했겠지만, 저는 운동을 오래 쉬었잖아요. 체육을 이론적으로 공부하는 학부생이 되어 과수업을 들었지요. 여느 학교가 그렇듯이, 체육학과 분위기는 군대를 연상케 해요. 남학생이 많아서 그런지, 선후배 간 위계질서도 굉장히 엄격하지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제가 신입생일 시절에는 단체 기합도 자주 받았어요.”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억압받는 것을 무엇보다도 힘들어하는 그였다. 회의감이 들었다. 간절히 오고 싶어 했던 체육학과에서 자신이 후회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 심신이 지쳐서 멍하니 넋을 놓고 있을 때가 많았다. 함께 고민을 나누던 동기들이 하나둘 입대하는 것을 보며 고등학생 시절을 회상했다.
고등학교 때 교복을 입고 길을 지나던 그가 공원에서 댄스 공연을 하던 굿뉴스코 해외봉사단 단원들을 봤던 것을 떠올렸다. 소나기를 맞아도 행복하게 웃던 사람들…. 그 역시 낯선 나라로 봉사하러 가서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싶어졌다. 마침 대학생활에 대해 종종 조언해 주시던 선생님께서 “잔칫집보다 초상집에 가는 게 네 자신을 성찰하는 데에  좋다”며 그를 격려해주셨다. 그도 해외봉사를 지원해서 자신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었다.    

“지원국으로 선택한 부룬디는 저와 꼭 맞는 나라였어요. 부족전쟁으로 인한 인종 학살이 있었던 곳이에요. 내가 옆집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죽임을 당할 정도로 생지옥이었대요.”   
아프리카의 광활한 대자연이 그를 맞이했다. 경쟁 사회인 한국에서 팍팍한 학교생활을 하며 느끼지 못 했던 가슴이 확 트였다. 빌딩 하나 없이 단층 건물로 이루어진 마을 풍경에도 정감이 갔다. 마음이 편해졌다. 부룬디 어린이들은 그의 서툰 언어 실력에도 개의치 않고 어울리고 싶어 했다. 그 따듯함이 그를 물들여서 꼭꼭 닫고 살았던 그늘진 마음을 서서히 열어놓았다.

 
 

“부룬디 사람들은 상처가 많아서 얼굴이 어두운 편이에요. 부모님과 친척들이 강도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걸 직접 보고 살았으니까요. 부룬디 노래들은 가사도 대부분 우울하고 슬픈 내용이에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것도 힘들어해요.”
친한 친구였던 엘비스 유카타에게는 부모와 친척을 모두 여읜 상처가 있었다. 엘비스는 내전 당시 아버지의 도움으로 간신히 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지만, 탈출 도중 이웃 어른이 살해당하는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아야 했다. 사태가 잠잠해져 귀국했을 땐 ‘부모님이 모두 사망하셨다’는 비보를 전해 들었다. 떠올리기조차 싫을 아픈 기억을 이야기해 준 엘비스가 세준 씨는 눈물겹게 고마웠다고 한다. 남 같지 않은 친구들의 상처 앞에서 자신이 했던 방황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비상금으로 지참하고 있던 용돈을 굿뉴스코 지부에 모두 기부하고 현지인처럼 생활했다. 무일푼의 가난한 자가 되어 함께하는 생활이 행복했다. 

현지에서 지내며 순간순간 한국에서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부유하진 않아도 부족함 없이 자랐던 20년, 모든 게 풍족한 한국에서 그는 항상 무언가에 갈급해했다. 반대로 부룬디 사람들은 참 겸손했다. 가난 때문인지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소소한 일상에도 행복해했다. ‘봉사하러 왔다’며 아프리카 사람들을 얕잡아보았던 자신의 마음이 부룬디 사람들 앞에서 너무 지저분하게 느껴졌다. 한 달, 두 달 시간이 흐르며 그는 자연스럽게 슬픔에서 벗어났다. 자신의 속내를 스스럼없이 표현할 수도 있게 됐다.

“무전여행을 갔을 때였어요. 히치하이킹을 일곱 번씩 해서 지방으로 떠난 뒤, 봉사활동을 하고 올 계획이었어요. 하염없이 걷다가, 마트가 하나도 없는 산골짜기에 다다랐지요. 작은 집 하나를 발견했는데 주변의 밭에서 곡식을 자급자족하며 사는 곳이었어요. 하룻밤 신세를 진 뒤, 다음 날 아침 그 집을 나서려는데, 주인 할머니가 ‘이렇게 가난한 나라에 와서 봉사활동을 해 주어서 고맙다’며 무릎을 꿇으시고 제 청바지에 묻은 흙을 치맛자락으로 직접 닦아주시는 거예요.”
눈물이 왈칵 솟을 것 같았다. ‘내가 이런 사랑을 받아도 될까?’ 싶어서 가슴이 먹먹했다. 언제부터인지 부룬디 사람의 새까만 피부가 참 따듯하게 보였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성격이 많이 변해있었다. 주변을 의식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속으로 삭이던 습관이 없어졌다. 속 얘기를 나누는 것도 자연스러워졌다.
과 친구들은 그가 변화될 수 있었던 비결을 궁금해했다. 교수님의 주관하에 강단에 서서 학과 선후배 70~80여명에게 ‘해외봉사로 얻은 경험’을 강연했다. 상담을 신청해오는 후배들도 많았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조언해주자, 그와 비슷하게 해외봉사를 떠나는 학생들도 하나둘씩 생겼다.  
“복학해보니 학과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있더라고요. 저도 봉사활동과 동아리 활동을 다양하게 하며 학교생활을 했어요. 새로운 꿈도 꾸게 됐어요. 부룬디에서 어린아이들에게 댄스와 컴퓨터를 가르친 경험이 있거든요. 축구교실을 열어 초등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어요. 덕분에 지난 달엔  ‘축구 지도자 자격증’ 시험도 치렀어요. ”

 
 

20대는 젊은이들이 인격을 가꾸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이다. 박세준 씨는 해외봉사를 하며 마음속 상처를 회복했다. 그는 부룬디에서 보낸 1년을 디딤돌로 삼아 현재 자신의 미래를 행복하게 준비한다. 그는 인터뷰가 끝날 무렵에 이렇게 말했다.
“경험을 쌓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주변에 많은데, 많은 대학생이 활용할 줄 몰라서 학교생활을 무미건조하게 하더라고요. 굿뉴스코 해외봉사는 여기에 가장 좋은 돌파구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사진 | 이규열 (Light House Pictures 실장)  
헤어&메이크업 | 윤미영   의상협찬 | JACK&J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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