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정부학자금지원 수기공모전 우수상

▲ 홍지역_상명대학교 영화영상학과 졸업. 한국장학재단을 통해 꿈에 대한 희망과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는 그는 인생에 어떤 풍파가 올지라도 계속하여 전진할 수 있는 에너지가 넘친다.
▲ 홍지역_상명대학교 영화영상학과 졸업. 한국장학재단을 통해 꿈에 대한 희망과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는 그는 인생에 어떤 풍파가 올지라도 계속하여 전진할 수 있는 에너지가 넘친다.
1. 풍파風波
2007년 12월의 어느 밤. 점호가 끝나고 행정반에서 집으로 건 전화는 아무도 받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 아버지에게 건 전화도 긴 통화 연결음 뒤에야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지금 병원이다. 조금 있다가 막둥이 뇌수술 들어갈 거 같다.”
거의 반사적으로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에이,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무슨 뇌수술이에요?”
“뇌출혈이란다. 바로 수술해야 된다는 구나….”
아버지의 목소리는 무겁게 그리고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제 열아홉 살, 수능을 막 치른 막둥이가 뇌출혈로 쓰러진 현실을 직시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목소리를 높이며 속사포처럼 쏟아댄 내 질문에 아버지는 아무 말도 못하셨다. 여동생에게 전화를 했지만 울기만 할 뿐이었다. 전역을 채
4개월도 못 남긴 내 당직근무의 밤은 요동치고 있었다.
말년 휴가를 잘라 나온 병원 중환자실엔 열아홉의 생일도 지나지 않은 막둥이가 누워있었다. 침대에 묶여있는 팔과 다리, 머리엔
2개의 커다란 튜브가 꽂아져 있었다. 가족들은 넋이 반쯤 나가 있었고 어머니는 군복을 입은 나를 보며 굵은 눈물을 소리 없이 흘리셨다. 수술을 집도한 신경외과장님이 말씀 하셨다.
“뇌출혈 수술은 잘 됐습니다. 근데 외상이 없는 상태에서 뇌출혈이 일어났다는 건 원인이 따로 있는 겁니다. 일단, 뇌출혈에서 회복하는 게 먼저에요. 그리고 경과가 좋아지면 검사를 더 해봅시다. 마음에 준비는 하셔야 할 겁니다. 아마 예전처럼 돌아오지는 않을 거예요.”
 늦은 밤 병원 옥상으로 올라가 무릎을 꿇었다.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이 세상 모든 신들께 두 손이 부서져라 간절히 빌었다. 제발 동생을 살려달라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도 빼곤 아무 것도 없었던 시린 겨울밤이었다.
천우신조로 기적이 일어났다. 막둥이가 별다른 후유증 없이 빠른 속도로 회복을 한 것이다. 병원사람들도 놀라워하며 함께 기뻐했다. 몇 가지 검사를 더 해본 결과 10만 명 중 1명꼴로 발생하는 뇌혈관 희귀질환인 “모야모야병”으로 밝혀졌다. 불치병이자 난치병이지만, 정말 감사하게도 일상생활은 가능한 병이었다. 힘겹게 한 번의 뇌수술을 더하고 나서야 막둥이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나 역시 국방의 의무를 마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몇 달 간 생사의 고락을 넘나든 병원생활은 우리 집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 후였다.

2. 풍파風波2
2008년 3월. 친구들은 따스한 봄바람을 타고 학교로 향했지만 막둥이의 병원비와 수술비로 인해 나는 복학할 수 없었다. 돈 때문에 힘들어하시는 부모님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못난 부모 만나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다며 눈시울을 붉히시는 어머니를 달래드리고 얼마 되지 않는 병장월급과 캐리어가방만을 손에 쥔 채 웃으며 서울로 상경했다. 한 달에 17만 원의 고시원 방을 잡고 닥치는 대로 일하기 시작했다. 새벽 편의점 알바, 주간 화랑에서 그림 판매, 야간 가라오케 등 돈을 조금이라도 더 주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았다. 하루 20시간, 그렇게 세 달을 일하고 나니 몸에서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결국 모든 일을 관두고 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평 남짓한 고시원에서 몸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세 달을 쉬게 되자 돈이 바닥났고 며칠만 더 있으면 방세를 내야하는 막막한 때에 군대 친구 어머님으로부터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고시원에서 몸 버리고 돈 버릴 바에야, 집으로 들어와라.”
어머님의 진심 어린 한 마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기에 거절할 수 없었다. 빈손으로 가방만을 쥔 채 친구네 집으로 들어갔다. 친구 어머님이 해주시는 하루 세 끼의 따뜻한 밥과 푹신한 침대에서의 잠은 저절로 몸을 낫게 하고도 남음이었다.
 몸이 회복되자 전투적으로 면접을 보러 다녔다. 우연히 홍대 럭셔리秀노래방 주임님을 만나게 됐고 상무님, 대표님까지 차례로 뵙게 되면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연말인데다 야간에 일하면서 미친 듯이 뛰어다니느라 몸은 힘들었지만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치열하게 일할 수 있었다. 간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식비와 부수입은 그날그날 아침에 퇴근하면서 ATM기에 넣었다. 남들이 자는 밤에 일하는 사람들은 낮에 일하는 사람들보다 더 간절한 이유가 있듯이 그 간절함에 통장의 잔고는 무섭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매달 집으로 보내는 생활비를 빼고도 상당한 액수가 쌓여갔고, 캠퍼스의 정문이 조금씩 눈앞으로 다가왔다. 
학교로 돌아갈 설렘에 부풀어 있던 2009년 12월의 어느 날 아침, 아버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하지만 난 도중에 전화를 끊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급하게 돈이 필요하시다는 게 요지였는데, 그 액수가 지금까지 등록금으로 벌어둔 돈과 거의 일치했기 때문에….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시린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아닌 돈에 대한 서러움의 눈물이었다. 은행을 찾아 계좌이체를 하는 단 몇 초 만에 지난 2년의 시간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졸업할 때까지의 등록금은 마련했다 생각했는데 내 스물 네 살의 끝자락은 또다시 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결코 포기할 순 없었다.

3. 가능성의 시작을 열어준, 한국장학재단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던 2010년 2월, 서럽게 흔들리고 있던 나에게 봄볕처럼 다가와준『한국장학재단 학자금대출』덕분에 간신히 복학을 할 수 있었다. 거치기한이 2017년 2월, 2025년까지의 대출기한과 당시 5.7%의 이율마저도 내겐 너무나 감사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대학생에게 돈을 제공해준다는 것 즉, 노동의 대가가 아닌 꿈의 가능성에 대한 투자였기 때문이다. 스물다섯, 5년 만에 돌아온 1학년 2학기는 한국장학재단 덕분에 그렇게 시작할 수 있었다. 청춘의 꿈이 넘실대는 캠퍼스의 낭만과 다시 배울 수 있다는 기쁨도 잠시, 학기 당 500만원에 육박하는 등록금은 나에겐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남은 3년 반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 아침, 다시 앉은 텅 빈 강의실 책상에서 내린 결론은 하나 뿐 이었다. 장학금, 오직 장학금뿐. 결론이 나왔으니 남은 건 실행이었다.
수업은 무조건 강의실의 앞에서 3번째 줄 안쪽에 앉았다. 발표나 질문은 언제나 가장 먼저 시작했고 매일 수업이 끝나면 자정까지 도서관에 앉아있었다. 초조해하지도 의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도서관 책상에 않아 있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시험기간에는 매일
12시간 이상 앉아 있었다. 처음엔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글귀와 문장들도 12시간 이상 부여잡고 있으면 이해가 됐다. 그리곤 그것을 리포트와 답안에 치열하게 담아냈을 때의 쾌감은 짜릿하기 그지없었다. 눈 깜짝할 새 한 학기가 지난 후 내 손에 쥐어진 성적은 4.39였다. 첫 결과물 치곤 매우 긍정적이었다. 그건 ‘하면 된다.’는 확신을 주었기에. 그러나 곧 새로운 문제가 등장했다. 차석을 한 것이다. 5년 만에 돌아온 학교에서 차석을 했지만 나는 마음껏 기뻐할 수 없었다.

 
 
4. 가능성의 파트너, 한국장학재단
학교 교칙 상 차석은 등록금의 70%만 지원을 해준다. 나머지 30%는 내가 부담을 해야 했다. 방학 때 알바를 해서 방세와 생활비를 마련하는 것만도 쉽지 않은데 등록금까지…. 또다시 학자금 대출을 받을 수도, 집에 손을 벌릴 수도 없는 상황에 앞이 깜깜했다. 사방팔방으로 방법을 찾아다니던 나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도움의 손길은 또다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내겐 희망과도 같았던 바로 한국장학재단의『희망드림장학금』이었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신청서를 제출했고 얼마 후 장학생에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떨리는 손으로 재단홈페이지를 방문해 최종적으로 확인을 한 후 미친 듯이 환호성을 질렀다. “하면 된다, 된다, 반드시 된다!” 그렇게 장학금을 받아 2010년 2학기를 무사히 등록할 수 있었다.
한국장학재단 덕분에 다시 한 번 시작할 수 있었던 새로운 학기. 내안엔 ‘하면, 반드시 된다!’라는 가능성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 차석을 해 더 많은 학점을 신청할 수 있었고 지난 학기의 시행착오 덕분에 보다 효율적으로 공부의 밀도를 높일 수 있었다. 시간을 쪼개 교내 근로 장학생으로도 활동했다. 그래도 사람인지라, 점심시간이 없는 빡빡한 강의스케줄에 지치고 힘들 때가 오면 한국장학재단의 도움을 떠올렸다. 그러면 감사하게 생각할 줄 아는 여유가 생겨났다. 그 감사함은 내게 있어 또 다른 가능성이자 확신이었다.
그로부터 4개월 후, 확신은 4.5점 만점이라는 성적으로 돌아왔다. 전액 장학금, 수석이라는 자그마한 영광과 함께. 그 뒤로 이 수기를 적고 있는 지금까지 한국장학재단의 국가장학금과 모교로부터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꿈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새로운 가능성에 요동치는 가슴으로.

5. 풍파는 언제나 전진하는 자의 벗
20살 이후로 내 꿈은 영화감독이다. 지난 8년 동안 네댓 개의 크고 작은 풍파가 나를 흔들고 지나갔다. 2013년, 학교로 돌아온 지 4년이 흐른 지금. 어디까지나 한국장학재단의 시의적절한 도움이 있었기에 다시 꿈을 좇을 수 있었다. 조기졸업을 앞두고 영화 시나리오, 창업동아리, 20개가 넘는 공모전, 저작권 관리사 자격증, 호주 워킹홀리데이 준비 등 하루 24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생활하고 있는 내게 사람들이 묻는다. 도대체 그런 에너지가 어디서 오는 거냐고. 나는 웃으며 말한다. 내겐 든든한 가능성의 파트너가 있다고.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은 거야. 다음에 무엇이 잡힐지 아무도 모르거든.”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대사처럼, 돈 때문에 좌절해야 했던 내 인생의 초콜릿 상자가 되어준 한국장학재단. 스물다섯의 흔들리고 있던 청춘에게 영화감독이라는 꿈에 대한 희망과 확신의 가능성을 제공해준 한국장학재단에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함을 전한다. 이제 그 감사함으로 더 큰 무대로 나아가 보다 많은 사람들과 살을 부대끼며 땀 흘리고 이야기하고 노래하며 꿈꾸려 한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은 그렇게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한때는 세상을 원망하고 한탄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그저 내 앞에 놓인 평탄하지 않은 길을 포기하지 않고 누구보다 큰 꿈을 꾸며 자신 있게 전진하면 될 뿐! 끝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풍파에 흔들리고 있을 대한민국의 청춘들에게 이 격언을 바치며 수기를 마치고자 한다. 그대들의 가슴도『한국장학재단』과 함께 뛰기를 바라며….
“인생의 목적은 끊임없는 전진에 있다. 앞에는 언덕이 있고, 냇물이 있고, 진흙도 있다. 걷기 좋은 평평한 길만 있는 게 아니다. 먼 곳으로 항해하는 배가 풍파를 만나지 않고 조용히 갈 수만은 없다. 풍파는 언제나 전진하는 자의 벗이다. 차라리 고난 속에 인생의 기쁨이 있다. 풍파 없는 항해! 얼마나 단조로운 것인가? 고난이 심할수록 내 가슴은 뛴다.” 

 지금 이 순간, 내 가슴은 뛰고 있다. -니체-

홍지역_상명대학교 영화영상학과 졸업.
한국장학재단을 통해 꿈에 대한 희망과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는 그는 인생에 어떤 풍파가 올지라도 계속하여 전진할 수 있는 에너지가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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