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을 넘어 감동까지 선사하는 명강의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철학수업, 문학과 역사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인문학강좌, 그리고 아름다운 심성을 가꿔 주는 문화예술까지. 학문의 전당인 캠퍼스 곳곳에는 지성과 교양에 목마른 우리를 채워 줄 숨은 명강의가 가득하다. 고려대 의대 나흥식 교수의 <생물학적 인간> 강의에서 생명의 오묘함과 신비를 배워보자.

 
 
달콤했던 주말을 뒤로하고 월요일 아침 다시 학교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제법 의지가 필요한 일이다.
4월 7일 아침 8시 30분, 고려대 안암캠퍼스 우당교양관 6층 대강당에는 한바탕 자신과의 작은 싸움을 치르고 등교한 학생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의과대학 나흥식 교수가 진행하는 학부 교양과목 <생물학적 인간> 이른바 <생인> 수업에 출석하기 위해서다. 대강당에 도착해 보니 입구 앞에서 대학원생 조교가 엄지손가락만 한 작은 쪽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한 장 건네받아 들여다보니 출석표다. <생인>의 수강인원은 무려 260명. 일일이 호명하여 출석을 부르기가 힘들다 보니 지정된 출석표에 이름과 학과, 학번을 적어 제출하는 것으로 출석확인을 대신하고 있었다.
전임교수가 맡는 수업으로는 고대 내에서 가장 큰 규모인 <생인>이지만, 수강신청 기간에는 가장 일찍 마감되는 강좌이기도 하다. 고대에서는 우수강의를 선정해 시상하는 ‘석탑강의상’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데, 나 교수는 지금까지 이 상을 10회나 받았다. 석탑강의상이 도입된 것이 2004년이니 매년 이 상을 놓치지 않은 셈이다. 의대에서 수여하는 교육부문 우수교수상도 두 차례나 수상했다. 그렇다면 학생들의 평가는? 고대생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인 ‘고파스’에 접속해 <생인>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를 찾아보았다. ‘교수님이 강의에 열의를 다하시는 모습이 멋있어요’ ‘내가 수강한 교양수업 중 최고’ ‘인문계 학생들이 들어도 이해가 잘 되고, 조금만 열심히 수업에 임하면 생물학 전반을 이해할 수 있다’ 등 호평이 대부분이다.
이는 실제 수업시간에서도 그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9시에 시작하는 수업을 20여 분 앞두고 일찌감치 강의실로 들어온 나 교수는 강단에 올라가 그날 쓸 PPT 자료를 프로젝터로 띄우는 등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대충 준비를 마친 나 교수 앞으로 수강생들 예닐곱 명이 길게 줄을 섰다. 수업시간에 미처 이해하지 못한 내용들을 질문하기 위해서였다. 수업을 마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다소 의외였다. <생인>은 말 그대로 생물수업이다. 결코 알아듣기 쉽지 않은 과목이다. 인체 조직의 메커니즘을 설명한 그림을 보다 보면 이해가 되기는커녕 눈이 팽팽 돌아간다. 코르티코이드, 에스트로겐, 멜라토닌 등 입에 잘 달라붙지도 않고 구분도 안 되는 호르몬은 또 어찌나 많은지(실제로 <생인>의 중간고사 범위에 포함된 호르몬의 수만 약 30가지다). 그런데도 학기마다 이렇게 많은 수강생들이 몰려들고 또 적극적으로 수업에 임하는 비결이 궁금해졌다.

명강의 노하우 #1 지식이 서 말이라도 ‘스토리로’ 꿰어야 보배
나흥식 교수가 강의를 이끌어가는 첫 번째 노하우는 바로 스토리메이킹, 즉 강의내용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 전달하는 것이다. 단순히 나열된 지식덩어리는 뇌에 부담만 줄 뿐 쉽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대신 지식을 논리와 감성이라는 고리로 연결된 이야기로 만들어 전달하면 이해하기도 쉽다. ‘이야기야말로 상대의 닫힌 뇌를 여는 황금열쇠’라는 게 그의 말이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인체의 혈액 내에는 항상 일정한 농도의 칼슘이 존재한다. 만약 칼슘농도가 떨어지면 항상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우리 몸은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해 농도를 높이는데 그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칼슘농도가 떨어지면 우선 뼈에 저장된 칼슘을 끌어다 쓰는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급하게 돈이 필요할 때 적금을 해약하는 것과 비슷하죠? 또 콩팥을 작동시켜 소변으로 빠져나가는 칼슘을 줄여도 됩니다. 돈이 부족하면 씀씀이를 줄여야 하듯이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소화기관에서 칼슘을 많이 흡수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적금을 해약하거나 씀씀이를 줄여도 안 되면 돈을 많이 벌어오면 되지요. 농도가 높을 때는 이와는 정반대 과정이 이뤄집니다. 우리 몸은 이런 메커니즘을 통해 칼슘의 농도를 조절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스토리로 짜여진 강의는 핵심원리를 꿰뚫기 때문에 잊어버리더라도 나중에 쉽게 기억해낼 수 있다. 무엇보다 남녀노소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고 재미있다. 나 교수는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잡지 <과학소년>의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주말이면 일선학교로 자주 강연을 나간다. 그의 스토리식 교육의 효과를 눈여겨 본 여러 학교의 요청 때문이다. 가르치는 대상도 전교생이 12명에 불과한 시골 초등학교 학생에서부터 서울 강남의 고교생들이나 과학고) 학생들까지 다양하다. 올해 들어온 고대 의대 신입생 83명 중 학창시절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이 8명이나 된단다. 과학교사 모임인 ‘신나는 과학을 만나는 사람들’이나 교육청에서도 강연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선생님을 가르치는 선생님인 셈이다.

명강의 노하우 #2 학문學問이란 묻고 배우며 끊임없이 소통하는 것
나흥식 교수는 전형적인 ‘아침형 인간’이다. 매일 아침 7시, 늦어도 7시 반 전에 출근하여 외부전화가 걸려오지 않는 9시까지 논문을 쓰거나 강의를 준비하는 등 하루 일의 대부분을 이 시간에 처리한다.
학생들이 보낸 메일에 답장을 쓰는 것도 이 시간이다. 그는 학생들 사이에서 메일 답신이 빠르기로 정평이 나 있다. 컴퓨터는 물론 스마트폰으로도 메일을 확인하는데, 그의 폰은 2010년에 나온 구형이다. 하지만 답장을 보내는 속도는 가히 LTE급(!)이다. ‘교수님은 메일을 드린 당일 답장을 주시는 경우도 많고, 심지어 새벽에도 답장을 주신다’는 것이 수강생들의 한결같은 말이다. 이번 학기에 그가 보낸 답장만 200여 통에 이른다. 개중에는 수업내용과 관련 없는 가족의 건강이나 질병에 대해 상담을 부탁하는 것도 있지만, 어김없이 답장을 보낸다.
학생들의 질문 중 좋은 것들은 따로 추려 두었다가 답변과 함께 슬라이드로 작성해 수업 첫머리에 제시하기도 한다. 가령 누군가가 ‘야근은 암을 유발한다는데, 사실인가요?’라는 질문을 보냈다면, 메일로 답을 보낸 뒤 이를 강의 슬라이드에 담아 수업시간에 공유한다. 학문은 한자로 學文이 아닌, 學問이라고 쓴다. 단순히 지식을 배우는 학문學文이 아니라 묻고 배우는 소통 속에서 이뤄지는 상호작용이 학문인 것이다. ‘학생의 절반 이상이 수업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잘못된 시험답안을 썼다면 이는 강의가 잘못된 것’이라고 나 교수는 말한다. 학생들에게 메일을 보내거나 수업시간 전후에 질문할 것을 권장하는 것도 그래서다. 학생의 눈높이를 알아야 강의수준을 맞출 수 있기 때문.

 
 
명강의 노하우 #3 삶=앎, 삶을 변화시켜야 참된 앎
“생물은 과학 중에서도 쉬운 편이라지만, 저는 고교 때 생물이 너무 어렵고 재미도 없었어요. 하지만 나 교수님 수업은 중간중간에 실생활과 아주 밀접한 사례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아주 쉬워요. 공부한다기보다는 유익한 상식을 얻어가는 느낌이라 아주 재미있습니다.”
<생인>을 수강하는 미디어학부 4학년 최주원 씨의 말이다. 그의 강의를 듣고 나면 평범한 것도 비범하게 보인다. ‘촛불을 훅 불면 왜 꺼지는 걸까?’ 대부분 사람들은 입바람에 이산화탄소가 섞여 있어 산소의 공급을 차단하기 때문에 촛불이 꺼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람만 불어도 촛불이 꺼지는 것을 보면 이는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촛불은 기화된 상태의 파라핀이다. 촛농이 심지를 타고 올라가 기화된 후 촛불의 연료로 쓰이는 것이다. 그런데 바람이 불면 기화된 파라핀이 날아가면서 연료가 차단되기 때문에 촛불이 꺼지는 것이다.
스트레스는 왜 건강에 해로울까? ‘스트레스가 건강에 해로운 것이야 상식 아닌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길지 모르지만 <생인>의 수강생은 그래서는 안 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글루코코르티코이드’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된다. 그런데 이 호르몬은 면역력을 억제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래서 건강에 해로운 것이다. 태릉선수촌에 가면 뜻밖에 건장한 체구의 선수들이 감기에 시달리는 것을 어렵잖게 볼 수 있다. 과도한 운동으로 신체가 스트레스를 받아 면역력이 약화된 탓이다.(90쪽으로 계속→)
이처럼 <생인>을 수강하다 보면 단편적인 지식들이 실생활과 하나둘 연결되면서 촘촘한 그물망이 짜여진다. 그물이 촘촘할수록 고기도 많이 낚을 수 있듯, 제자들이 세상을 보는 시야도 그만큼 넓어지는 것이 나 교수가 지향하는 바다. 그렇게 ‘앎’이 쌓이다 보면 ‘삶’도 바뀐다. <생인>을 수강한 어느 법학과 학생은
‘의학과 법학을 결합한 법의학 공부를 하고 싶어졌다’는 소감을 메일로 보내오기도 했다.
시쳇말로 ‘준비도 없이 하던 가락으로’ 진행하는 수업은 학생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나 교수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결합해 강의를 진행하기 위해 인문학 서적을 많이 참고한다. 스승의 이런 세심한 배려에 학생들 역시 마음으로 화답한다.
“졸업한 후에도 매년 스승의 날이나 밸런타인 데이가 되면 잊지 않고 선물을 보내옵니다. ‘선생님의 지도가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는 편지와 함께 말이지요. 그때 교육자로서 보람과 기쁨을 느낍니다.”

대학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해 연구를 시작하던 시절, 그는 노벨상을 꿈꾸었다. 하지만 막상 연구를 진행하면서 인프라는 물론 학문의 역사, 규모 등에서 선진국과 많은 격차가 있음을 절감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알려진 사실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강의만큼은 철저한 교수법과 열정으로 세계 수준의 대학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세상에 중요한 금이 3가지 있다고 합니다. ‘황금’ ‘소금’ ‘지금’이 그것인데 그 중 최고는 지금입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열심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사진 | 홍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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