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PPY in AUSTAILA(2)

성적도 친구들도 부모님과의 관계도 한순간에 앗아갔던 게임. 호주에서의 1년간 해외봉사를 하며 그 게임중독을 극복하는 힘을 터득했다는 윤정웅 씨는 이제 현실 속에서 행복한 꿈을 꾼다.

 
 
“학생, 학번이 어떻게 돼요?”
휴학계를 제출하러 학과 사무실로 간 내게 조교가 물었다. ‘내 학번이 뭐였더라?’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입학 후 딱 일주일만 학교를 다니고 다시 가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저, 학번은 잘 모르고요. 제 이름은 윤정웅입니다.”
“아, 올 F 맞은 학생?”
올 F, 점수로는 0점. 학교를 가지 않았으니 시험이 언제인지도 몰랐고 당연히 시험도 치르지 않았다. 간혹 길에서 만난 고등학교 때 친구가 “너, 시험 어떻게 됐냐?”고 물을 때도 “응? 나 학교 안 가는데…” 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곤 했다. 학교에 가는 대신 친구들과 술을 마시거나 게임에 빠져 지냈다. 그러던 내가 호주로 1년간 해외봉사를 다녀오고, 지금은 (간혹 늦잠을 자서 지각을 하긴 하지만) 열심히 학교생활을 하고 있으니, 내가 생각해도 이런 나 자신이 참 신기하다.

게임 속의 나는 장군 vs. 현실 속의 나는 중독자
해외봉사를 가기 전 나는 흔히 말하는 게임중독자였다. 내가 게임을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친구들을 따라 <바람의 나라>, <메이플 스토리> 같은 간단한 게임을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서든 어택>이라는 1인칭 시점의 총격전 게임이 나오면서 게임에 점차 깊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주로 4:4 혹은 5:5로 팀을 이루어 총격전을 벌이는데, 상대 팀원들을 모두 죽여야 이길 수 있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없이 게임을 했지만 친구들이 잘하니까 점차 자극을 받아 승부욕을 갖게 되었고, ‘친구보다 게임을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마우스, 키보드, 헤드셋 등의 장비를 구입해 게임을 즐기게 되었고, 프로게이머 못지않은 실력을 갖게 되었다. 게임 속 나의 레벨은 최고계급은 별 넷 대장. 게임을 할 때만큼은 너무나 즐겁고 행복했다. 대인관계도 좋았다. 적어도 게임 속에서는 말이다.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어 게임대회에도 많이 나갔고, 조금씩 유명해지면서 온라인 친구요청도 많이 들어왔다.
대개 게임을 오래 하는 사람은 성격도 신경질적으로 바뀐다. 게임중독에 빠진 나 자신에 대해 하도 스트레스가 쌓이다 보니 어느 날 홧김에 ‘이깟 게임, 나도 끊을 수 있어!’ 하고 마우스와 키보드, 헤드셋 등 게임장비를 모두 박살낸 적이 있다. 그런데 다음날 다시 게임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았다.
내 친구들은 거의가 게임을 하면서 만나고 알게 된 친구들이었다. 그 밖에 다른 사람들과는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과 대화하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러다 보니 대인기피증이 생겼다. 사람이 많은 곳에는 아예 가지 못했다.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면 얼굴을 마주하면서 이야기를 해야 하지만 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대화를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몸은 몸대로 망가져갔다. 밤새 게임을 하다 보면 아침에 잠자리에 든다. 낮에는 잠을 잔 뒤 저녁이 되면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거나 PC방으로 갔다. 게임에 중독되면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 식음을 전폐하면서 게임을 하게 된다. 살도 많이 빠져서 몸무게가 58kg까지 줄어들었다. 게임 속에서의 나는 별 넷을 단 장군이었지만, 현실 속에서의 나는 점점 피폐해져 갔다.

 
 
삶에 해외를 느끼던 내게 찾아온 해외봉사 프로그램
부모님과의 관계도 점점 더 소원해져 갔다. 어머니는 아들인 나를 잘 키우고 싶은 마음에 과외교사도 붙여주시고 학원에도 보내주시는 등 내 공부를 위해 많은 투자를 하셨다. 하지만 나는 공부하는 것도, 집에 있는 것도 싫었고, 밖에 나가 노는 것이 더 즐거웠다. 밥 먹고 잠 잘 때가 아니면 집에 있을 때가 별로 없었다.
게임을 마치고 PC방을 나설 때 찾아오는 허무감이 싫었다.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지?’ 하고 정체성에 혼란이 찾아오기도 했다. 죽고 싶을 때도 있었다. 당시는 소위 ‘뻑치기’라고 하여 지나가는 사람을 둔기나 몽둥이로 내리치고 금품을 빼앗는 범죄가 자주 일어났다. ‘나도 길에서  뻑치기라도 당해 이런 삶을 마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2010년 3월,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전공인 전자과가 적성에 맞지 않아 일주일만 출석하고는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았다. 예전처럼 게임에 빠져 지냈다. 그런 내게 고모가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을 소개해 주셨다. 고모의 아들(내게는 사촌 형)도 2006년 우크라이나로 해외봉사를 다녀왔다고 하셨다. 러시아어를 전공한 형은 우크라이나에서 지내며 소극적인 마인드도 진취적으로 바뀌었을 뿐 아니라, 러시아어도 유창하게 배워 명문대로 편입도 했다고 하셨다.
워낙 게임에 빠져 살던 나였는지라 처음에는 ‘관심 없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PC방에 갔다 오면서 여느 때처럼 ‘난 왜 이렇게 사는 걸까?’ 생각하던 중 고모 말씀이 떠올랐다.
“네 사촌 형도 이렇게 바뀌었는데, 너도 해외봉사 한 번 다녀와 봐.”
그렇게 이듬해인 2011년, 나는 10기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원으로 호주로 가게 되었다.

마음의 세계를 배우며 게임중독에서 벗어나고
내가 봉사단원으로 활동하게 된 도시는 브리즈번으로, 호주에서 인구가 세 번째로 많은 대도시였다. 하지만 IYF지부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활동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인근 대학에 가서 친구들도 사귀었고, 학생 자원봉사자를 모아 문화박람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기상시간은 아침 6시. 일어나 청소와 아침식사를 한 뒤, 오전에는 지부장님과 단원들과 모임을 갖거나 개인공부를 했다. 시드니 IYF지부 건물을 리모델링할 때는 벽돌을 쌓는 등 공사를 돕기도 했다. 지부장님으로부터 마음의 세계에 대한 강연도 듣고 상담도 받으면서 어느새 게임중독에서도 벗어났다.
호주에는 역시 백인들이 많이 산다. 아주 오래 전 옛날, 금을 찾아 몰려들었다가 호주로 몰려들었다가 눌러 앉아 살게 된 유럽인의 후예들이다. 백인들을 위한 복지정책 역시 잘 마련되어 있다. 결혼하고 자녀를 둘 이상 낳으면 정부에서 지원금이 나오는데, 따로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을 만큼 큰 돈이다. 그래서 개중에는 폐인처럼 사는 사람도 많다. 길거리의 쇼핑센터 주변 벤치에서 마약을 피우기도 한다. 주유소 뒤편으로 보면 바닥에 주사기가 잔뜩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약을 주사하고 버린 것들이다. 클럽에 가면 대마 같은 마약은 쉽게 구할 수 있다. 그런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고, 나를 게임중독에서 벗어나게 해 준 마음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백인들은 대개 아시아인을 무시한다. 게다가 우리는 대부분 영어도 서툴러 우리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관광지로 유명한 섬나라 피지로 한 달 동안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수도인 수바는 호주처럼 도시도 잘 꾸며져 있고 소득수준도 높다. 하지만 수바를 벗어나면 대부분 우리나라의 70~80년대를 연상케 하는 시골로, 초가집도 많고 사람들도 가난하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마음은 겸손하고 순수했다. 사람들을 만나 나를 게임중독에서 벗어나게 해 준 마음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했더니 굉장히 신기해했다.
호주의 골드코스트라는 곳으로 여행을 간 것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여행을 마치고 브리즈번 지부로 돌아가는 날, 여비가 없어 지나가는 차를 세워 얻어 타는 히치하이킹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곳은 히치하이킹으로 차를 얻어 탄 사람들이 차 주인을 죽이는 살인사건이 많이 일어난 곳이라 히치하이킹 자체가 불법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서 히치하이킹을 시도하다가 ‘손가락욕’을 당하기도 했다. 손가락욕을 하도 많이 당하다 보니 나중에는 웃음이 나왔다.

▲ 사람들을 만나 나를 게임중독에서 벗어나게 해 준 마음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했더니 굉장히 신기해했다.
▲ 사람들을 만나 나를 게임중독에서 벗어나게 해 준 마음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했더니 굉장히 신기해했다.

이제는 나도 새 꿈이 생겼다
해외봉사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내 삶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달라져 있었다. 가족들과도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IYF 활동 등 대외활동에도 부지런히 참석 중이다. 전에는 부모님과 대화할 일도 거의 없었고, 그러다 보니 서로를 향해 오해도 많이 쌓였다. 하지만 이제는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는 덕에 가족들과 대화시간이 많이 늘어났다. 학교를 다니느라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느라 요즘은 만나면 할 얘기가 더 많아진 것 같다.
게임도 한 번 시작하면 내리 10시간을 몰두할 정도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컴퓨터를 거의 쓰지 않고 과제할 때 필요한 정보를 찾느라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이용하는 정도다.
해외봉사를 가기 전에는 없던 새로운 인생의 꿈도 생겼다. 바로 축구를 호주에 있는 동안 나는 축구를 몹시 좋아했다. 축구를 실제로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축구를 공부하고 경기를 분석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축구 해설도 하는 기자가 되는 꿈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내 전공은 축구가 아닌 전자과인데, 어떡해야 하지? 전공을 바꾸어야 하나?’라고 고민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TV에 나오는 축구 해설위원들은 대부분 축구와는 상관없는 전공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하면 꿈을 이룰 수 있는지 부지런히 길을 찾는 중이다. ‘공부’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축구에 관심을 갖고, 관련기사나 전술분석도 많이 본다. 세계적인 축구 해설가나 지도자들의 자서전도 사서 읽는 중이다.
내가 진짜 축구전문 기자가 된다면, 단순히 가십거리를 저장하거나 잘못된 여론을 형성하는 기사가 아닌 축구를 매개체로 사람들과 공감하고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사를 쓸 것이다. 해외봉사를 다녀오면서 남들과 마음으로 소통하는 법을 배웠으니 말이다. 게임 속 세계에 취해 살던 내가, 이제는 현실 세계에서 진짜 꿈을 갖게 된 것, 그 터닝포인트는 해외봉사였다.

윤정웅 _굿뉴스코 호주 10기, 청운대학교 전자공학과 3학년

취재 | 안우림 캠퍼스 리포터   
장소제공 |카페 the 맑음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