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뉴스코 페스티벌, 별이되어 온 그대! (2)

컴퍼스로 작은 원을 그리고 그 안에서만 살아가려는 경향을 ‘컴퍼스 콤플렉스’라 한다. 나 역시 조그만 원을 그리며 그 안에서 22년을 살아왔다. 2013년 3월, 처음 베트남에 왔을 때도 나는 큰 원을 그린 사람을 부러워할 뿐 작은 원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2014년 현재 나는 점점 내 원의 크기를 키우며, 한계를 극복하고 내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이곳에서의 봉사활동은 내게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안겨주며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컴퍼스의 크기를 키워주었다.

▲ 김주안_2013년 영남대학교 재학 중에 베트남으로 해외봉사를 간 그는 그곳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자신의 경험을 담아 에세이를 기고해 주었다. 이번 봉사활동을 계기로 베트남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어 유학을 계획 중이라고 한다.
▲ 김주안_2013년 영남대학교 재학 중에 베트남으로 해외봉사를 간 그는 그곳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자신의 경험을 담아 에세이를 기고해 주었다. 이번 봉사활동을 계기로 베트남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어 유학을 계획 중이라고 한다.
2013년 1월, 굿뉴스코 해외봉사단 워크숍에서 내 마음을 뜨겁게 했던 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해외봉사를 가게 되면 ‘상상하지 못한 일들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마인드 강사의 이 말 한마디가 내게 해외봉사에 지원하길 잘했다는 확신과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나는 이 구절을 가슴에 새기고 내 생애 처음 베트남으로 떠났다.
베트남은 자연 그대로의 풍경을 간직한 곳으로 수도에만 300개가 넘는 호수가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또한 세계 1위 오토바이 보유국, 먹거리의 천국, 성조가 6개나 되는 신기한 언어를 쓰는 나라이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젊은이들로 활기가 넘치는 곳이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할 만큼 충분히 매력적인 곳이었다.

‘끝’이 ‘똥’일 줄이야
베트남에 온 지 겨우 한 달 남짓 지나 낯선 언어와 문화에 조금씩 적응해 갈 즈음 내게 떨어진 첫 번째 봉사 미션은 한국어교실 수업 진행이었다. 베트남어를 모르는데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1시간 30분 동안 가르쳐야 한다는 압박감과 막막함에 가슴을 졸이며 수업을 시작했다. 간신히 외운 내 소개를 베트남어로 떠듬떠듬 이야기하자 학생들 한두 명이  웃기 시작했다. 초보 선생님의 아슬아슬했던 첫 수업은 통역해 준 베트남 대학생의 도움으로 잘 끝나는 듯 싶었다.
 그런데 나를 황당하게 만든 웃지 못할 사건이 수업 말미에 터졌다. 1시간 30분이라는 긴 수업이 끝난 후 간신히 한시름 놓으며 ‘오늘 수업 여기서 끝~!’ 하고 학생들에게 한국어로 인사를 하는데, 갑자기 모든 학생이 박장대소를 하며 데굴데굴 구르는 것이 아닌가. 순간 너무 당황스러웠다. 한두 명도 아니고 수업을 듣던 30명 모두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는 상황이라니.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하게 서 있었던 나에게 통역하던 친구가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한국어로 ‘끝’이란 발음은 베트남어로
‘똥’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러니 나는 학생들에게 ‘똥!’이라고 인사를 꾸벅 한 셈이다. 한참 긴장했던 나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실수했다는 수치심에 자책하며 몸 둘 바를 몰라했겠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만난 새로운 사람들 앞에서 나는 ‘실수하며 성장하는 거야. 그 실수 앞에 나를 옭아매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여 줄 줄 아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스무 살이 넘어 알게 된 어머니의 마음
나는 22년 동안 한국에서 자라면서 힘든 일이라곤 몇 번 해 보지 않고 편하게 자라왔다. 그러나 베트남 하노이에서 집짓기 봉사를 하며 삽질을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한 적이 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삽은 생각보다 정말 무거웠다. 일하는 방법도 요령도 몰랐기에 그저 온 힘을 주어 종일 땅을 팠다. 일손도 부족했고 그 누구도 쉴 틈 없이 분주하게 일하는 가운데에 감히 내가 ‘여자라서 못하겠다. 몸이 약해서 못하겠다’는 변명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었다. 오전 내내 땅을 파고 나니 오른쪽 팔은 잘려나간 것처럼 저리고, 평소 잘 쓰지 않았던 허리를 숙였다 펴기를 수십 번 반복했더니 허리통증도 심했다.
오후가 되자 온몸이 아프고 쑤셔서 절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도 모르게 ‘오늘이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삽질하는 날이야! 그러니까 까짓것 후회 없이 해보지 뭐!’라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생각을 바꿔 마음을 다잡고 삽질을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일에 집중할 동안에는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고 지치지도 않았다. 해가 떨어진 저녁이 되자 그날 일이 겨우 마무리지었다.
일이 끝나고 나니 힘이 빠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이 욱신욱신 쑤시고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었다. 특히나 오른쪽 팔은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나기도 했다.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쳤을 그 때, 처음으로 한국에 계신 어머니 생각이 났다. 매일 밤 퇴근하고 집에 오셔서 팔이 너무 아프다며 잠을 쉽게 들지 못하셨던 어머니. 그래서 내게 팔 마사지를 해 달라고 하셨던 어머니. 내가 아픈 것보다 훨씬 더 아프셨을 텐데…. 그때 내가 왜 어머니 팔을 한 번 주물러 드리지 못했을까, ‘어머니 오늘 얼마나 힘드셨어요?’라고 다정하게 말 한마디 못 해 드렸을까, 하는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온종일 건축일을 하며 몸은 힘들었지만, 항상 나를 위해 고생하신 부모님의 노고를 20살이 넘어 뒤늦게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더불어 한계에 부딪힌 힘든 순간에도 마음 자세를 바꾸면 다시 힘이 생긴 것처럼 무슨 일이든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알게 된 날이기도 하다.

내 생애 처음으로 만난 나병 환자들!
2013년 5월 10일! 하노이에서 한참 떨어진 깊은 숲 속에 있는 작은 분교, 그곳에서 나는 생애 처음으로 나병 환자들을 만났다. 내가 상상하던 그들은 위협적이고 두려운 존재였다. 그곳에 가면 나병 환자들이 진물이 흐르는 손으로 달걀을 주며 먹으라고 권한다던데, 그곳에 가면 그들이 ‘이렇게, 저렇게 한다던데’라는 수많은 소문이 나를 괴롭혔다.
그런 두려움과 의심을 안고 도착한 그곳은 폐교를 그들의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고 있는 하나의 집단촌이었다. 나병 환자들은 대부분 할아버지 할머니셨는데, 그들의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도 같이 살고 있었다. 아이들은 겉으로는 건강해 보였지만 그들 몸속에도 잠정적으로 나병균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과 함께 생활할 수 없어 격리되어 있다고 했다. 아이들은 처음 보는 우리에게 경계하는 태도를 보이며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함께간 봉사단원들과 같이 그들에게 의식주에 필요한 생활물품과 치료비를 전달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며칠 동안 연습하고 준비한 공연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조금씩 웃음을 보이며 마음을 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후 시간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한 명 한 명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불치병 때문에 숨어 살아야 했던 온갖 설움과 썩어 들어가는 살들을 보며 느낀 수치심과 괴로움으로 얼마나 오랜 세월 힘들고 외로웠는지 그들의 마음의 상처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어느 누구도 찾아오지 않아 희망 없이 살고 있던 그들이 먼 타국에서 온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마음이 따뜻해져 감을 느낄 수 있었다. 또 그들의 아픔을 들어주며 마음의 친구가 되었을 때 좋은 옷과 음식과 돈을 받았을 때보다 더 행복하게 웃는 것을 보았다. 나병 환자뿐 아니라 세상 다른 소외된 사람들도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눌 때 이와 같겠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간이기도 했다.

▲ 베트남 하노이 외곽에 있는 깊은 산 속 나병 환자촌에서 만난 아이들과 함께.
▲ 베트남 하노이 외곽에 있는 깊은 산 속 나병 환자촌에서 만난 아이들과 함께.
500여 베트남 대학생들 앞에서 나를 이야기하다
1년의 봉사활동 일정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에, 내 한계를 넘는 마지막 미션, 그래서 제일 어려운 과제가 나에게 주어졌다. 500여 명이나 되는 하노이대 학생들 앞에서 베트남어로 5분 동안 나를 소개하며 봉사활동에 대해 발표하는 것이었다. 베트남어가 아직 서툰 내가 수백 명의 사람들 앞에 서서 발표를 해야 한다니, 눈앞이 캄캄했다. 발표할 내용을 한국어로 적고 내 서툰 베트남어 실력으로 직접 번역을 하고 난 후, 현지 학생에게 원고를 교정받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최종 원고를 온종일 손에 들고 다니며 밥 먹을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심지어 잘 때도 혼자 중얼중얼 외워야 했다. 그런데도 도무지 자신이 생기지 않아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2월 11일, 드디어 발표 날짜가 성큼 다가왔고, 한없이 자신 없던 내가 드디어 하노이대학교 대강당에 섰다. 수많은 학생들 앞에서 천천히 원고 내용을 외워 나갔다. 아주 떨리는 순간이었지만 베트남 학생들이 내 발표에 귀 기울이며 경청해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서툰 발음과 표현에도 그들은 내 이야기를 이해하고 재미있는 내용이 나오면 소리 내어 웃어주고 중간 중간 박수를 치며 나와 소통하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발표를 마쳤을 때엔 발표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 것 같은 여운이 남았고, 동시에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이번 발표 또한 내가 넘을 수 없는 높은 산처럼 보였는데, 막상 발을 내딛어보니 어느새 산을 넘을 수 있었다. 내 한계를 다시 한번 넘는 순간이었다.

베트남에 오기 전 내가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게 될 줄, 수많은 학생 앞에 서서 낯선 언어로 내 이야기를 해 볼 줄, 온종일 건축일을 하게 될 줄 상상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 모든 일이 나에게 압박감과 부담감을 안겨 주었지만, 그것을 극복해 내는 순간 나는 비로소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비록 한국어를 가르치며 실수를 하고, 생애 처음으로 삽질을 하며 울기도 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원의 크기가 커져 가고 있었다. 베트남 하노이에서의 낯설고 힘들었던 기억들이 지금은 주옥같은, 소중한 시간이 되어 나를 성장시킨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한계를 극복한다는 것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다. 한계를 극복할 때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더 넓은 세상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누구보다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동안 나는 내가 그린 작은 원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았는데, 내 컴퍼스를 더 넓게 펼쳐줄 인연을 만나, 어쩌면 영원히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르는 값진 것들을 베트남에서 배우고 얻었다. 나는 ‘최고의 행운아’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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