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아산병원 응급의학과 의사 박소영

멀티플레이어처럼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있는 의사 박소영 씨의 첫 번째 업業은 의사요, 두 번째 업業은 사회 봉사자다. 만나면 만날수록 기자 같고 때로는 마케터 같은 내면의 에너지가 넘치는 그녀의 모습에 놀랄 때가 많다.  11월 23일 청년 슈바이처 상을 수상한 그녀의 건강한 마인드를 소개한다.

 
 
왕이건 거지이건 자신을 찾아오는 병자라면 신분과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술을 베푼 심의 허준. 평생 의사의 손길이 닿지 않는 아프리카 오지의 환자를 치료해 후세에까지 회자되는 슈바이처. 환자의 육체뿐만 아니라 병을 이길 수 있도록 마음까지 어루만져 준 두 명의처럼, 의사라면 누구나 그 같은 길을 걸으리라 다짐한다. 하지만 세월의 추에 이리저리 이끌리어 환자의 고통만을 생각하고 치료하게 되는 위대한 의사는 많지 않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돈 못 버는 의사, 대접받지 못하는 의사’가 되고 싶지 않은 현실의 왜곡된 시선을 견디며 명의의 길을 걸으려는 젊은 의사 또한 드문 시대가 됐다. 하지만 지난 23일 연세대 동문회관에서 ‘청년 슈바이처 상’을 수상한 박소영 의사는 남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단지 부유해지는 의사’의 길보다 사람들에게 꿈과 삶의 의미를 찾아주는 의사의 길을 걷고 있는 박소영 씨의 행보에 대해 주변인들은 부러움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왜 그런 삶을 사는지 묻자 그녀의 눈동자가 빛이 났다.
“이상과 꿈을 좇아 살아가고 목표를 세워서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인생의 값진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목표를 이룬 사람들이 생각보다 그 기쁨을 오래 느끼지 못하는 것을 봤어요. 자신만을 위해 노력한 시간이 마침내는 외롭고 허무함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죠. 그런 길을 버리고 남을 위해 살고자 하니 저는 행복한 의사가 됐습니다.”

공부하는 기계에서 가슴 뜨거운 청년으로
박소영 의사가 처음부터 행복을 손쉽게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학창 시절 명석했던 그녀지만 문득 자신이 공부만 잘하는 공부벌레같다는 생각을 한 박소영 씨에게 인생의 길 위에 멈춰 서서 세상을 새롭게 바라본 계기가 생겼다. 2003년 우연히 알게 된 국제청소년연합의 ‘월드캠프’. 캠프에서는 한국의 아름다운 도시 제주도, 김천, 대전, 광주를 4주 동안 순회하며 푸른 눈동자의 유럽인과 아메리카인, 키 작은 아시아인, 검은 피부의 아프리카 사람들 등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을 가진 이들이 교류했다. 각양각색의 국적을 지닌 또래 수천 명의 20대 젊은이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는 소식에 그녀는 처음으로 가슴 벅찬 희열을 느꼈다. 박소영은 그때의 추억을 잊지 못해 다음해 캠프에도 참석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두두’와의 만남. 두두 역시 멀고도 먼 첫 한국 방문에서 외국인들과 한국 친구를 사귀게 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가난한 아프리카에서 성장한 두두는 속 깊고 마음이 따뜻했고 박소영과 팀원의 친구들은 그런 두두를 좋아하게 됐다. 아프리카라면 불행하고 가난하다는 편견을 가지기 쉽지만 두두 덕에 박소영은 이 까만 피부의 소녀와 덩달아 즐거운 추억을 만들게 됐다. 둘은 다시 만날 약속까지 했고, 유독 검었던 두두의 피부를 오히려 사랑스럽게 느낄만큼 가까워졌다. 두두의 두드러지게 하얀 치아와 빛나는 눈동자를 박소영은 ‘아프리카의 검은 보석’으로 기억했다. 그런 두두가 캠프 마지막 날 자신의 옷과 신발까지 우정의 흔적으로 남겨주었다.
2006년 그렇게도 생소하던 아프리카로 해외봉사를 떠났던 박소영에게 아프리카는 더 이상 낯선 곳이 아니었다. 친구 두두가 언제나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두두를 만나기 위해 남아프리카행 항공기에 몸을 실었을 때, 재회를 기다리던 그녀는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도착할 무렵, 간발의 시간 차이로 더 이상 두두를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후천성 면역 결핍증AIDS에 걸려 죽음을 맞은 두두, 스물여덟 살 젊은 나이의 두두를 생각하면 박소영의 마음은 안타까울 뿐이었다. 아프리카에서도 선진국으로 꼽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이지만 에이즈에 노출되어 죽어가는 인구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14%. 부모의 질병으로 유전되는 경우는 물론 병원 치료로 오히려 에이즈에 감염되는 경우도 있었다. 후천성 면역 결핍증에 대한 아프리카 사람들의 부족한 의식이 낳은 안타까운 사연이 두고두고 의사 박소영의 가슴에 사무쳤다.

▲ (왼쪽) 합지증에 걸린 칼렙의 어머니와 함께. (위)해마다 아프리카 의료봉사에서 만나는 환자들을 돌보는 박소영 의사. (중간) 칼렙을 위해 열린 후원음악회를 도와준 지인들과. (아래) 2013년 나눠드림 콘테스트에서 드림워커 대상을 수상한 박소영.
▲ (왼쪽) 합지증에 걸린 칼렙의 어머니와 함께. (위)해마다 아프리카 의료봉사에서 만나는 환자들을 돌보는 박소영 의사. (중간) 칼렙을 위해 열린 후원음악회를 도와준 지인들과. (아래) 2013년 나눠드림 콘테스트에서 드림워커 대상을 수상한 박소영.

한 아이를 살리는 후원 음악회의 결실
2007년 한창 바쁜 의과대학 3학년, 주변 분들의 추천으로 국제청소년연합이 주최한 영어 말하기 콘테스트에서 두두와의 사연을 발표한 그녀는 ‘스페셜 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박소영은 환자와 마음을 나누는 의사가 되리라 다짐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아프리카로 의료봉사를 다니며,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두두처럼 안타까운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의료봉사를 하며 희망을 주는 것이 그녀에게 꿈이 되었다.
2013년 9월, 바쁜 와중에 만났던 박소영 의사로부터 자선 음악회 초청을 받았다. 아침저녁으로 야근에 철야까지 해내는 그녀가 아프리카의 한 아이를 위해 성금을 모금하려고 음악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올해 아프리카 의료봉사 이후 한국으로 귀국한 그녀에게 케냐 GBS 방송국에서 한 아이의 안타까운 사연을 보내온 것이 계기가 되어 자선 음악회 준비가 시작됐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들부터 그녀의 뜻을 지지해서 모인 이들까지 음악회에 모인 사람은 82명. 자신의 재능을 기부했던 가수, 테너의 음악부터, 뮤지컬 배우인 친구들의 뮤지컬 한 소절까지 의미가 담겨 있는 노래를 들은 참가자들은 박소영 의사를 돕는 손길을 보고 느끼며, 세상의 소금이 되고 있는 그녀를 작은 슈바이처 보듯 했다. 행사에는 유명인사의 저서와 잡지, 디자이너의 넥타이 기부 등 도움의 손길이 다채로웠다. 당초 예상한 기부금보다 훨씬 많은 금액인 580만 원이 모인 결과에 박소영 씨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1살 난 칼렙 무투아니는 양쪽 손가락 발가락이 붙은 합지증으로 태어난 아이입니다. 그 아이는 세월이 몇 년 흐르면 더 이상 수술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꼭 수술을 해야만 했어요. 그런데 많은 분들이 도와주실 줄 몰랐어요. 너무 놀랍고 기뻤답니다.”
물론 주변에선 좋은 시선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생각보다 많은 수술비로 ‘굳이 왜 한 사람을 위해 이런 일을 하느냐?’며 비판하는 시각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치 있는 일이기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며 <내가 만일 아픈 마음 하나를 달랠 수 있다면>이란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떠올렸다.
상수리 푸른 나무 하나가 성장해 많은 이들이게 그늘을 드리워 휴식을 취하게 하듯 그녀의 마음에는 아프리카로 가겠다던 두두와의 약속이 자양분처럼 심겨져,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한 그루 나무로 성장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아프리카의 불우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의사로 성장케 했다.

기적적으로 이뤄진 꼬마 칼렙의 수술
칼렙의 수술은 총 세 번. 큰 수술인 만큼 액수도 컸지만 신기하게도 일본에서까지 그녀의 선행 소식을 전해 듣고 돈을 보내준 이도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수술 날짜가 잡히자 박소영 씨는 아프리카 케냐로 떠났다. 그리고 알게 된 칼렙의 부모님의 기구한 사연이 또 한번 마음 아프게 남았다. 가난한 형편에 강도를 만나 한쪽 팔까지 잃어버린 칼렙 아버지의 한 달 수입은 3만 원. 하루 종일 일을 해도 병이 걸린 아이를 살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이를 위해 모인 금액은 약 천만 원. 칼렙의 수술비와 생계 지원비로 모두 후원했다. 그런 도움의 손길이 칼렙 가족에게 인생을 좌절하지 않고 새롭게 시작할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었다.
“아프리카에서 천만 원은 엄청난 금액입니다. 아프리카에서 그 아이를 보는 순간 불행을 가져다준 아이가 아니라, 복덩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평생 어려울 수 있고, 그 어려운 시기에 태어난 아이라 가족이 좌절할 수 있지만 울던 엄마에게도 기회를 선물해 줄 수 있어서 좋았고, 마을 사람들 모두 행복해하는 것을 보니 저역시 기뻤습니다. 세상을 알지도 못한 때에 이 아이가 사람들의 도움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고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청년 슈바이처 박소영
의사 박소영 씨의 인생 목표가 달라지고 삶을 바라보는 자세가 달라지자 자연스럽게 상복도 터졌다.
2013년 꿈 나눠드림 대상, 2013년 자원봉사영상공모전 최우수상, 2013년 청년 슈바이처 상까지 올해에 받은 상만 세 가지이다.
“참으로 신기해요. 예전에는 무언가 되겠다고 악착같은 의지로 목표를 이루려고 했는데 얻은 게 없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세상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니 오히려 하는 일이 즐겁고, 무엇을 해도 상을 받아요.”      
시간에 늘 쫓기고 빠듯하게 하루하루 환자를 대하는 의사에게 최고의 포상은 ‘하루를 쉬는 것’이라고 한다. 그 시간 못 잔 잠을 자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말이다. 힘든 의료 현장에서 죽어가던 환자가 새로운 생명을 얻는 현장을 목격하는 게 박소영 의사의 보람 중 보람이다. 아산병원에 첫 발을 내딛던 4년 전, 여의사를 뽑지 않겠다는 면접관들과의 첫 대화에서 당당히 ‘세상은 바뀔 것’이라고 말했던 그녀다. 하지만 지금은 박소영 그녀가 세상을 바꾸고 있었다.
“대학 입학은 가군, 나군으로 복수 지원이 가능했지만 병원의 실정은 달랐죠. 한 번 지원하고 떨어지면 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죠. 합격한 이후로도 셀 수 없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독수리 새끼가 나는 법을 훈련받는 것처럼 사람간의 관계를 배우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그 아픔을 헤아려볼 수 있게 됐습니다.”
그녀는 이제 동료들이 부러워하는 꿈을 꾸고 성취하는 의사이다. 그녀의 10대는 앞이 보이지 않아서 어려웠지만 20대의 그녀는 누구보다 당차게 앞을 달려가는 삶을 살았고 30대 문턱을 넘은 현재 인생의 더 넓은 마음의 지경들을 배우고 있다. 또한 그녀가 좌절할 때마다 큰 버팀목이 되어 주는 신앙의 힘에 의지하는 것이 그녀가 사는 법이다.

▲ 살짜리 칼렙은 합지증으로 손가락과 발가락이 붙었지만 음악회에서 모인 성금으로 수술을 할 수 있었다.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아갈 아이에게 희망을 전해줄 수 있게 됐다. 좌)수술 전 칼렙, 우)수술 후 잠든 칼렙.
▲ 살짜리 칼렙은 합지증으로 손가락과 발가락이 붙었지만 음악회에서 모인 성금으로 수술을 할 수 있었다.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아갈 아이에게 희망을 전해줄 수 있게 됐다. 좌)수술 전 칼렙, 우)수술 후 잠든 칼렙.
독수리 날개 치듯 비상하다
“저를 보는 이들이 한결 같이 행복해 보인다고 합니다.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 한때는 학비가 없어서 학교를 다 마치지 못할 것 같아 울기도 많이 울었던 저입니다. 의료봉사 때 비행기 표값도 없어서 누군가에게 빌려서 다니곤 했을 만큼 어렵기도 했어요. 고시원에서 어렵게 지낼 때도 있었지만 지난날을 돌아보면 비온 뒤에 땅이 굳듯 더 이상 어려운 20대가 아니었습니다. 실패도 맛보고 도전하며 날개를 달아 훨훨 날 수 있었던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
이른 나이에 인생의 아픔을 알고 이해할 수 있게 된 박소영 의사. 고통 받는 환자들의 애환까지도 어루만질 수 있게 된 그녀는 지금도 피치 못할 사연으로 생을 그만두려는 응급 환자들에게 한걸음 다가가 이야기를 나눈다. 죽음 앞에서 생을 마감하려던 그들이 그녀의 손을 잡고 인생을 다시 살아보겠노라 돌이킬 때, 그녀는 세상을 얻은 것처럼 보람되고 행복하다고 고백한다.


사진 | 홍수정 기자   디자인 | 이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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